가본 곳

곧고 바른 인물 두루 품은 남고북저 함안 땅

김훤주 2014. 3. 1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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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사랑 고3역사문화탐방] (10) 함안군

 

2013년 12월 17일 펼쳐진 함안 지역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의 첫 탐방 지역은 산인면 고려동 유적지였습니다. 고려동 유적지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쉽게 눈에 띕니다. 그러나 정말 마음을 내지 않으면 함안에 살고 있다 해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함안은 한반도 전통 지형(남저북고)과는 달리 남고북저(南高北低)인데요, 이를 빌미로 지배집단은 함안을 '반골' 또는 '반역' 이미지와 연결짓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배집단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보통 사람들 눈으로 보면 함안은 '권세나 시류에 휘둘리지 않고 할 말 하면서 반듯하게 사는 사람들의 땅'일 뿐이겠습니다.

 

 

시류에 휘둘리지 않는 첫 머리, 고려동 유적지

 

그런 의미를 띠는 첫머리에 산인면 고려동 유적지가 놓입니다. 고려 왕조에서 벼슬을 살았던 사람이 고려를 거꾸러뜨리고 들어선 조선 왕조에 머리를 조아릴 수는 없었던 심정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려에서 성균관 진사 벼슬을 한 이오(李午)라는 인물이 이런 생각으로 600년 전 식구들과 함께 들어와 살기 시작한 터전이 바로 여기입니다.

 

율간정 마루에 앉아서 고려동 들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배롱나무꽃이 피고 지는 계절에는 눈에 꽃이 와 감기는 흥그러움이라도 있지만 한겨울 고려동은 아무래도 썰렁했습니다. 기본 지식이 없으면 흥미를 느끼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요.

 

들머리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는 자미단(紫薇壇) 가까이에서 내린 일행은 흙돌 담장이 둘러쳐진 마을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담장은 높낮이가 저마다 다른데 안쪽은 소리 없이 고즈넉합니다. 허물어지고 있는 집도 있고 어떤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지 대문 틈서리에 우편물이 수북하게 꽂혀 있는 데도 있었습니다.

 

"이오는 마을에 담장을 쌓아 조선 땅과 구분지은 뒤 '고려동학' 비석을 세워 고려 유민들이 사는 땅임을 밝혔습니다. 스스로 논밭을 일궈 자급자족함으로써 바깥세상과 연결·접촉도 최소화했습니다.

 

이오는 아들에게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말라 유언했고요, 후손들은 선조의 유산을 돌보는 한편으로 자식들을 가르치는 데 힘쓰면서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답니다." 찾아가는 버스 안에서 먼저 들은 이런 설명들이 고려동 유적지를 돌아보는 친구들 이해를 높이는 데 한몫을 했습니다.

 

벼슬 따위와는 바꿀 수 없는, 무기연당

 

무기연당. 가운데 건물이 풍욕루. 그 앞이 하환정.

 

이어서 찾은 칠원 무기연당(舞沂蓮塘)은 국담 주재성이 1728년에 지었습니다. 전남 담양에 있는 소쇄원과 더불어 전통 정원 가운데 으뜸으로 꼽힐 만큼 경관이 빼어납니다. 그런데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풍류를 알았던 국담은 의로운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백성을 모아 막았으며 재산을 털어 군량미까지 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뒤쪽으로 한자 '敬'이 살짝 보입니다.

 

여기에는 주재성의 이상(理想)이 담겨 있습니다. 연못과 마당을 잇는 돌계단 앞 작은 돌 탁영석(濯纓石)은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고 깨끗하면 갓끈을 씻겠다'는 뜻이고 그 옆 정자 하환정(何換亭)은 '(이 멋진 풍광을) 어찌 (벼슬 따위와) 바꾸겠느냐'는 말이라고 합니다.

 

친구들은 무기연당에 담긴 뜻이야 어떻든 눈에 담기는 경관에 감탄했습니다. 저마다 자리 잡고 사진을 찍느라 바빴습니다. 때로는 의미보다 느낌에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는데 무기연당이 딱 그런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향학열이 살아 숨쉬는 칠원향교

 

칠원향교는 무기연당과는 또다른 느낌을 안겨 줬습니다. 둘레에서 가장 높은 데 자리잡은 칠원향교는 홍살문이 있으며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이 낮은 앞쪽에 있고 성현을 제사 지내는 대성전이 높은 뒤쪽에 있습니다.

 

명륜당 앞뜰에서 향교 총무께서 얘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여느 향교와 겉모습은 같지만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학생(學生)들이 모여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향교는 학생들 책 읽는 소리가 울려퍼져야 제격이겠지요.

 

대성전 앞에서.

 

지금도 다달이 정해진 날에 나와 경전을 읽곤 한다는 총무 어르신 이야기는 수능시험을 마치고 홀가분해 하는 고3 학생들에게 아주 각별한 무엇으로 들렸음이 틀림없습니다. 칠원향교 총무 어르신은 게다가 성함을 여쭌 데 대해 “이름 그런 따위 무슨 필요 있어?” 하시며 끝까지 일러주지 않으셨습니다.

 

공부하러 나온 어르신들의 신발이 명륜당 댓돌에 놓여 있습니다.

 

소박하고 푸근한 절간 장춘사

 

칠원면 신풍식육식당에 들러 돼지고기와 더불어 점심을 푸짐하게 먹고 무릉산 장춘사로 향했습니다. 조그맣지만 분위기가 담백하고 그윽하기로 이름난 절간이 바로 장춘사랍니다.

 

장춘사 오르는 오솔길.

 

일주문이 웅장하고 사천왕이 근엄한 여느 절간과 달리 장춘사는 그냥 대나무 사립문 하나로 성(聖)과 속(俗)을 나눕니다. 더 이상 소박할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합니다.

 

 

산기슭에서 장춘사까지 걸어가는 3km가량 길은 별로 가파르지도 않고 양쪽으로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잔뜩 키를 키운 채 늘어서 있으면서 시원한 기운을 내뿜습니다. 적당하게 굽어 있어서 산자락을 따라 흐르는 오솔길 걷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장춘사에서 아이들 모습은 무장해제 그 자체였답니다. 대웅전이 어떻고 부처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선생님도 아이들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청마루나 축대에 삼삼오오 걸터앉아 그간 애썼던 마음을 풀어놓고 정담을 나눴습니다.

 

 

절간이 사람 마음에 끼치는 위안이 이 이상인 때는 아마도 없을 것 같습니다. 겨울이 깊도록 붉디붉은 홍시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에 아이들은 가장 많이 눈길을 던졌습니다. 아마 아이들은 훗날 장춘사라 하면 이날 눈에 담았던 붉은 홍시를 가장 먼저 떠올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장춘사 감나무.

 

그래도 만만찮은 말이산고분군과 함안박물관

 

말이산고분군과 함안박물관으로 옮겨갑니다. 함안 가야읍내 한가운데 나란히 있는 이 둘에 대해 대부분 아이들은 만만하게 생각합니다. 늘 보는 것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이런 생각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말이산 고분군은 먼저 규모에서도 남다르답니다. 커다랗게 쌓은, 우두머리급 무덤만도 100개가 넘는데 이는 함안에 자리잡았던 '아라가야'가 상당한 크기 세력으로 오랜 세월 존속했음을 일러주는 지표입니다.

 

함안 가야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에서 최헌섭(등이 보이는 이)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이산(末伊山)에 한자 끝 말(末)이 들어가 있으나 이는 우리말 '머리'를 한자 소리로 적은 것으로 말하자면 함안의 중심산, 으뜸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두머리들이 머리산에 묻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연을 제대로 알고 있는 학생은 없다시피 했답니다.

 

때마침 함안박물관에서 개관 10주년을 맞아 '말이산'을 주제로 기획특별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획전을 둘러보고 박물관 탐방은 상품권을 선물로 내걸고 미션식으로 진행했습니다. 마지막 마무리는 지역 역사 문화 도전 골든벨과 간단한 게임으로 했습니다.

 

문제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음에도 학생들이 자꾸 틀리고 끝까지 남는 친구가 없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하기를 되풀이해야 했습니다. 대입 수능에 지역 문제를 반드시 출제하도록 돼 있다면 사정이 조금은 달라졌겠지요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마지막 일정인 게임이었습니다. 게임은 단순했습니다. 60명을 열 팀으로 나눠 동전던지기를 한 다음 점수가 많은 순서대로 상품권을 나눠 갖는 것이었습니다. 8절 크기 종이 한 장과 500원짜리 동전 하나에 학생들이 그렇게 집중하고 열광할 줄이야!!

 

박물관 앞마당은 학생들이 쏟아내는 열기와 함성으로 떠들썩했습니다. 이제 세상으로 나아갈 친구들에게 이날 하루나마 좋은 추억이 됐기를……. 가까운 밥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나오니 짧은 겨울 하루해가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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