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고려 시대 신돈이 창녕 사람이라고?

김훤주 2014. 3. 14. 07:54
반응형

[우리 고장 사랑 고3역사문화탐방] (11) 창녕군

 

창녕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의 주제는 인물이었습니다. 신라진흥왕척경비, 술정리동삼층석탑, 석빙고 등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들을 많이 품고 있는 곳이 창녕이지요.

 

그러나 이것들은 창녕의 뿌리와는 바로 관련이 덜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신라진흥왕척경비는 원래 창녕 빛벌에 살던 가야 세력을 정벌한 위에 들어선 것이지 토박이 가야 세력의 유물은 아니라 할 수 있거든요.

 

우리는 욕심을 최대한 줄여야만 했습니다. 창녕을 1박2일 일정으로 제대로 다 둘러볼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창녕 하면 떠오르는 인물인 망우당 곽재우·한강 정구·편조 신돈을 중심에 두고 창녕의 자연·역사·문화를 돌아보기로 했답니다. 2013년 12월 20~21일 이틀 동안이었지요.

 

 

창녕에서 우포늪(소벌)을 빼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답니다. 다들 몇 번씩은 찾았음직한 우포늪(소벌)이지만 그래도 이번 참에 다시 들러 겨울철새를 눈에 담으며 걷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우포늪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바라본 우포늪 철새들.

 

1000명 밥을 담은 관룡사 구시

 

그리고 오후에는 옥천 골짜기 고향보리밥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화왕산 관룡사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그토록 유명하다는 관룡사인데도 아이들은 여태껏 단 한 번도 관룡사를 탐방한 적이 없었습니다.

 

관룡사 돌장승을 지나면서.

 

관룡사 돌문을 향하는 아이들 발걸음.

 

관룡사에는 보물이나 문화재가 많습니다. 들머리 돌장승과 범종각 북을 받치고 있는 괴수, 약사전의 육중한 지붕이나 대웅전 의젓한 자태, 조그맣고 귀여운 삼층석탑 볼거리가 수두룩합니다.

 

북을 받쳐들고 있는 괴수. 웃는 얼굴일까요, 우는 얼굴일까요?

 

이런 가운데 단연 학생들 관심과 눈길을 끈 것은 구시(구유)였습니다. 1000명 밥을 담을 수 있다는 구시를 손으로 만지며 지금은 말고 옛날 절간의 규모를 가늠해보기도 했습니다.

 

대웅전 뒤편 병풍바위.

 

그러나 무엇보다 관룡사를 멋들어지게 만드는 것은 뒤쪽 둘러친 병풍바위의 씩씩한 기운입니다. 마당 끄트머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 그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혜의 바다로 나아가는 용선대 돌부처

 

관룡사 하면 또 용선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은 언제 봐도 위풍당당합니다. 겨울철 동짓날 해뜨는 쪽을 바라보고 앉은 부처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혜의 배(용선=龍船)를 몰고 있습니다. 뱃머리처럼 산줄기가 툭 튀어나와 멈춘 바위 덩이 위에 용선대가 있습니다.

 

 

먼저 도달한 아이들이 뒤에 오는 일행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500m 남짓 되는 산길을 올라가 용선대에 이른 아이들이 연신 감탄을 합니다. 처음 누려 보는 풍경에 넋을 놓고 말을 잊습니다. 북쪽 화왕산성과 남쪽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산기슭, 동쪽 관룡사를 굽어 살피며,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누렸습니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매우 웅장하지요. 아래쪽이 풍상에 시달린 자취가 큰 반면 위쪽은 그렇지 않고 흰색을 띠는데요, 이는 지금과 달리 햇볕이나 바람을 가려주는 장치가 돼 있었음을 뜻합니다."

 

용선대에서 바라보는 동쪽 병풍바위와 관룡사.

 

절간 대웅전 부처 위에 있는 닫집 같은 물건이 여기 바깥에 나앉은 용선대 부처에게도 있었으리라는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의 설명이었습니다. 여기에 학생들은 나름대로 상상력을 더해 그 옛날 용선대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최헌섭 원장의 설명을 따라 돌부처를 살펴보는 아이들.

 

신돈이 태어나 망한 절터 옥천사지

 

관룡사에서 내려오다 두 번째 주차장이 있는 곳에서 왼쪽 오솔길로 접어들면 옥천사터가 있습니다. 제대로 놓인 돌이 하나도 없을 만큼 무참하게 망한 절터랍니다.

 

아이들이 딛고 선 바위들이 죄다 깨어져 나간 것들이랍니다.

 

주춧돌은 군데군데 놓여 있는데 석등·석탑·축대라든지가 원래 그대로 남아 있는 데는 전혀 없습니다. 석등의 일부였던 돌은 정을 맞은 자리가 뚜렷하고 연자멧돌조차 뒤집어진 채 묻혀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보복한 처절한 자취라 하겠습니다.

 

연자멧돌. 석탑 따위에 쓰였다가 깨뜨려진 돌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고려 공민왕 시절 개혁을 이끌었던 스님 신돈이 이 절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입니다. 신돈은 임금의 신임을 업고 백성들이 귀족한테 빼앗긴 신분과 토지를 원래대로 돌려주기 위해 애썼다고 합니다.

 

예나 이제나 기득권 세력은 저항이 완강했고요 절대권력 임금의 마음이 오래 가기는 어려웠나 봅니다. 신돈은 임금의 신임을 잃자마자 곧바로 제거돼 목숨까지 날아갔습니다.

 

가난한 백성을 위해 일한 신돈은 그러니까 적어도 요승(妖僧)은 아니었습니다. 사람 욕심이 얼마나 세고 끈질기고 완강한지를, 여기 산산조각난 석재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옥천사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돌들을 훑어보며 우리는 신돈의 참모습을 새삼 더듬어볼 수 있었답니다.

 

더 없이 잘 생긴 창녕 지석묘

 

창녕지석묘.

 

창녕에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큼 잘 생긴 고인돌이 있다는 사실도 아는 학생이 없었습니다. 장마면 유리에 있는 창녕지석묘가 그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뿐이지만 원래는 더 많았답니다.

 

1915년 일제강점기 도로 공사를 하면서 여기 높다란 언덕배기에 있는 고인돌들을 죄다 깨버렸습니다. 그러고는 그 조각들을 도로 닦는 바닥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창녕지석묘도 당시 동네 사람들이 20원을 보상금으로 일제한테 물려주는 바람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의젓하면서 큼지막한 고인돌을 앞에 두고 학생들은 최헌섭 원장으로부터 설명을 듣습니다.

 

최헌섭 원장이 창녕지석묘를 두고 얘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창녕지석묘는 언덕 꼭대기 잘 내려다보이는 데 자리잡아 둘레 평지를 한눈에 장악합니다. 아울러 얹힌 돌이 일대 재질인 퇴적암이 아니라 화강암인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녕 지석묘가 있는 장마면은 낙동강과 계성천이 만나는 강가여서 죄다 퇴적암뿐이고, 화강암은 창녕읍이나 영산면에나 가야 있습니다. 그런데 무게 40톤이 넘는 돌을 여기까지 누가 무슨 힘으로 어떻게 옮겨왔을까요? 아이들의 상상력은 곳곳에서 이어졌습니다.

 

곽재우 장군의 낙동강가 망우정

 

다음으로 찾은 곳은 도천면에 있는 망우정이었습니다.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선생이 만년을 보내다 숨을 거둔 곳입니다. 알려진 대로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남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기강나루에서 조선의 육지와 바다를 통틀어 첫 승리를 일궜습니다.

 

망우당 마루에 앉아 아이들이 아래 낙동강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곽재우는 창녕을 비롯해 곳곳에서 작지 않은 공을 세웠지만 말년 세월은 좋지가 않았습니다. 좁쌀처럼 째째한 임금 선조의 미움을 받아 귀양살이도 해야 했습니다.

 

망우정 뒤편에는 이렇게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와 비각이 있습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낙동강도 보입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모든 것을 놓고 여기 낙동강가 언덕배기 정자에서 깨끗하게 살다 갔습니다. 망우(忘憂)는 '근심을 잊는다'는 뜻인데 과연 여기서 곽재우 장군이 잊으려고 했던 근심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녁은 도천진짜순대 창녕점에서 먹었습니다. 점심으로 먹은 옥천 골짜기 보리밥과 함께 창녕 명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녕에 살면서도 자주 먹지 않았지만 창녕을 떠나면 더욱 맛보기 어려운 고향 음식들이지요.

 

창녕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며 이 친구들이 창녕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질 수 있으면 무척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창녕을 창녕답게 만든 한강 정구

 

이어 성산면 성곡친환경마을로 옮겨가 짐을 풀었습니다. 낮에 돌아본 망우당 곽재우와 편조 신돈에 이어 한강(寒江) 정구(鄭逑, 1543~1620)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모두에게서 배운 정구는 1580년 창녕현감으로 오면서 창녕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팔락정·부용정을 비롯한 여러 정자를 세우고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게 해 학풍을 일으켰고요, 가항마을에 제방을 쌓아 물난리를 막는 등 백성을 위하는 행정을 폈습니다.

 

아울러 읍지 <창산지>까지 펴내어 지역 역사·문화· 풍물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정구가 창녕을 떠날 때 생사당(관산서원)을 지어 모실 정도가 됐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이런 한강 정구에 대한 얘기는 처음 듣는다고 했습니다.

 

창녕이 가야 시대 예로부터 빛나는 땅이기는 했지만 조선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름 학풍이 살아 있음을 얘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한강 정구였음을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창녕지석묘.

자유 시간이 주어지자 아이들은 그렇게 잘 놀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며 행복해했고요, 어떤 학생들은 두런두런 모여 카드놀이를 했습니다. 캄캄한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노니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눈을 뜨니 천지가 눈에 덮여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 눈 때문에 한강 정구 관련 유적 가운데 부용정만 둘러보고 관산서원을 찾는 일정은 취소해야만 했습니다. 성곡친환경마을에서 만든 손두부를 반찬으로 점심을 먹고는 아쉽게 일정을 마무리했답니다.

 

김훤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