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질경이·쇠비름으로 새 날 여는 박덕선씨

김훤주 2013. 12. 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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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엔들 대표이사 박덕선씨는 1963년 산청군 차황면 상중리에서 태어났다. 황매산 기슭이다. 그이는 들풀이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 생래적으로 이렇게 하고 살 수밖에 없구나 하는 느낌이 40대 들어 찾아왔다고 했다.

 

그런 삶은 그보다 훨씬 일찍 찾아와 있었다. 1990년대 후반 글쓰기운동·독서운동과 여성운동에 뛰어들었고 곧이어 생태운동에 나서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거기에는 어릴 적 체험들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2010년부터는 우리 산과 들에서 나는 풀-산야초를 갖고 건강식품을 만드는 주식회사 산엔들(http://www.mnfkorea.kr/) 대표를 맡고 있다.

 

1. 들풀에게 말을 걸던 산골 소녀

 

 

말하자면 그이가 태어난 고장만 해도 그렇다. 약초가 굉장히 많은 황매산 자락이라 골짜기가 깊다. 거기서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풀과 나무를 보면서 같이 놀았다.

 

“금호국민학교를 다녔어요. 운동장에 서서 한 바퀴 돌면 항아리에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높은 산봉우리가 에워싸고 있죠. 예닐곱 살 때부터 꼴 베고 오라 하고 소먹이고 오라 하고 했지요.

 

들풀이랑 어울려 살았는데요, 그것들이 피고 지고 나고 하는 것이 신기했고 그래서 민감하게 느끼게 느끼고 정서적으로 바라봤습니다. 이게 차이인 것 같아요.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면 다 같지 않을까 싶은데 다 다르더라고요. 저는 이런 어린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는데 다른 친구들은 까마득하게 잊고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은 꽃봉오리가 맺혀 있다 내일은 피어나곤 하잖아요? 마주보고 앉아서 ‘코스모스야, 너 어떻구나. 맨드라미야, 너는 모양이 이렇구나.’ 말을 걸고 얘기를 나눴어요. 국민학교 가는 길이 대략 1.2km정도였는데, 꽃이랑 놀다 지각한 적도 있고 논밭에 나가다가도 풀들이랑 앉아서 이야기하고 놀았습니다.”

 

2. 약초와 더불어, 할아버지와 더불어

 

 

산청한방엑스포 현장에서.

박덕선씨는 특히 할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은 편이라 했다. 할아버지가 특별한 재주나 학식을 갖춘 분은 아니었다. 당시 산골에 살던 흔히 보는 남자 어른 가운데 한 명이겠다. 토박이 농사꾼으로 하늘에 비를 내려줘야 농사지을 수 있는 천수답, 천봉답, 다랑논 몇 마지기를 갖고 사는 분이었다.

 

일이 없거나 틈이 나면 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는 약초꾼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증상에 나름 처방도 하고 민간 요법도 많이 알고 있었다. “저는요, 감기에 걸리거나 하면 약(양약)을 먹는다는 것을 읍내 중학교 들어가서야 알게 됐어요. 그 전에는 할아버지가 산에서 캐온 것들을 갖고 다스렸거든요.

 

할아버지는 이른 봄이 되면 나물이나 약초를 캐러 나가셨어요. 저는 할아버지를 따라 다녔고요. 더덕은 어떤 냄새가 나고 하는 것들을 익혔습니다. 할아버지는 그것들을 갈무리해서 방안 가득 늘어놓고 말리곤 했습니다. 약초 향기가 온 방에 가득 차 있었지요.

 

또 사랑채 뒤편 토담에는 상비약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어요. 귀한 약초들은 장에 넣어뒀고요. 그러다가도 마을 사람이 급하게 병이 나거나 급체를 하면 내어주기도 하셨습니다. 작은 밭뙈기 하나에 아편을 기르셨는데요, 아편대를 삶아 먹여 소를 살리시는 것도 봤습니다. 산에 나는 온갖 것들을 갖고 먹고 치료하고…. 할아버지가 무슨 약을 어떻게 쓴다 하는 것들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3. 그렇지만 벗어나고 싶었던 산골, 약초 더미

 

들풀이나 자연 생태에 감수성이 열려 있는 소녀였지만 당시 그런 삶이 즐겁고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산골이 싫었고 약초 더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린 시절 이런 환경이 본인이 느끼기에는 사대에 뒤떨어진 것이었고 도망치거나 뿌리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니 지금 자기를 있게 만든 것들, 자기가 만들어 냈던 것들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 “국민학교 졸업하고 가장 먼저 꿨던 꿈이 무엇이었겠어요?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시골 국민학교 교무실 복도 끝에 기증 도서들이 가득 있었는데, 물론 지금 보면 그게 겨우 한쪽 벽을 차지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 때는 그 책이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60권짜리 계몽사 어린이 세계문학전집…, <알프스 소녀 하이디>, <빨간 머리 앤> 이런 것들 실화인지 아닌지 모르고 읽다가 작가를 꿈꾸게 됐습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서 바깥세계로 나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중에는 읽다가 읽다가 숫자로 가득한 통계연보까지 다 읽었습니다.”

 

4. ‘잠수함 속 토끼’를 작가 정신으로 삼고

 

그이의 삶에는 크게 두 축이 있다. 하나는 어린 시절 민감한 감수성으로 받아들였던 자연·생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런 문학 또는 작가 정신이다. 작가가 되기 위해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문예창작을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그런 공부가 시가 돼 주지도 않았고 소설이 돼 주지도 않았다.

 

 

학위를 받는다 해도 훌륭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문학을 하고 어떤 작가가 될 것인가, 참여 작가냐 순수문학이냐를 생각하게 해 줬을 따름이다. 그이는 ‘문학(작가)은 잠수함 속의 토끼여야 한다. 시대가 불의하고 아프면 가장 먼저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문학인이어야 한다’는 게오르규의 말을 작가 정신으로 받아들였다.

 

 

소설 <25시>를 쓴 게오르규는 밀폐된 잠수함에서 산소가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는 척도로 쓰인 토끼를 작가가 할 역할에 견준 적이 있다.

 

“생태운동을 하고 산야초 공부를 본격 시작한 것도 바탕은 결국 문학이었습니다. 1996년 어름부터 독서운동을 하면서 생태체험단을 꾸려 아이들과 함께 2000년대 초반 무학산이나 추산공원 등에서 생태놀이를 막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이야 일반화됐지만 그 때는 아무도 하지 않던 짓이었지요.

 

경남은행에서 <경남의 자연을 찾아서>라는 향토문화지를 만드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 와서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거창 덕유산에서 양산 배내골까지 속속들이 찾아다니면서 탐사하고 훑었습니다.

 

한편으로 사회운동에도 참여하는데 이 또한 문학정신의 발현이었습니다. 여성 문화 동인 ‘살류쥬’(경남을 무대로 <살류쥬>라는 ‘여성 무크지’를 발행하며 전국 단위로 활동했으며 2003년께 활동이 뜸해졌다)에 1998년인가부터 2002년인가까지 참여합니다.

 

1999년 <경남도민일보> 창립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해 언론운동에 들어갔습니다. 그 뒤 경남도민일보 지면평가위원회 위원장도 맡았었지요.

 

5. 결국 어린 시절 체험과 맞닿은 생태운동에 귀착

 

 

생태운동에 귀착했습니다. 제 석사학위 논문 제목도 ‘생태문학에 나타난 여성성’입니다. 생산은 땅의 일이고 자연의 일입니다. 여성은 생산을 합니다. 여성과 땅은 동일체입니다. 여성과 생태와 문학과 글쓰기는 이렇게 하나로 모입니다.

 

지금도 경남환경교육문화센터라는 생태 교육 단체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자연·생태 감수성을 아이들에게 줘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마산창원환경운동연합에서 활동할 때도 그 분야만큼은 놓지 않았습니다.

 

노동자 문학 동인 ‘객토’와 한국작가회의 지부격인 ‘경남작가회의’에서 시작 활동을 하는 것도 이런 연장에 있습니다.” 그이는 들풀에 대한 글을 꾸준히 써왔다.

 

올해 6월에는 <풀꽃과 함께하는 건강 약초 126선>(하남출판사, 1만5000원)이라는 단행본을 냈다. 그이는 서문에 ‘산과 들의 풀과 나무를 이용한 먹을거리들이 우리 건강을 지켜왔음을 이제야 기억하고 산야초를 연구하게 된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라고 적었다.

 

“산야초 공부를 자발적으로 독학하기 시작했습니다. 40대 들어서서입니다. 오래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스승이십니다. 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랑 가장 가까워졌습니다. 할아버지랑 함께했던 어린 시절 기억과 더불어 생태 관련 도서들, 식물도감이나 한방의서가 선생님입니다.

 

할아버지랑 많은 시절을 함께하신 고향 동네 어르신들에게서도 배웁니다. 그리고 마산대학교 한약재개발과에 자원식물개발 전공으로 2012년 9월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식물학이 너무 열악하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일본이 우리 식물을 더 많이 했고 아이들은 전혀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식물 연구를 나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6. 쇠비름과 질경이의 끈질김에 눈길 돌려

 

 

들과 산에서 나는 풀 가운데 쇠비름과 질경이에 눈길을 돌렸다. 산야초로 건강식품을 생산하는 산업화 방안에 대해서 깊이 고민한 결과였고 쇠비름·질경이가 멸종 위험이 없다는 데에 착안한 것이었다. 생명력이 강인해서 모든 국민이 함께 나눠 먹어도 자연에 타격을 주지 않고 공생할 수 있는 자원이라는 얘기다.

 

“옛날 쇠비름이나 질경이는 작물이 아니었습니다. 농사꾼들이 원망을 많이 했지요. 어떤 조건에서든 끈질기게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쇠비름은 바위 위에 뿌리가 하늘로 향하도록 해놓지 않으면 어느새 바닥에 뿌리가 닿아 되살아납니다.

 

할머니가 콩밭 매다가 쇠비름을 보고 ‘아무리 숭악하고 독하다 해도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며 눈물을 흘릴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여기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생명력이 강인한 원인이 있다는 것이었죠.

 

그렇게 해서 연구에 들어갔는데, 너무 놀라운 것은 우리는 전혀 연구도 안 돼 있지만 미국·영국 등 서양에서는 이 쇠비름에 대한 연구가 돼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건강식품으로 먹는 오메가3는 대부분 동물성입니다. 고등어 같은 동물에게서 나온 것인데 이것은 중금속을 머금고 있기도 하지만 오메가3의 비중이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평균적으로 30% 정도고 나머지는 중성 지방입니다.

 

저희 산엔들은 식물성 오메가3 개발에 나섰고, 결국 쇠비름+참깨에서 오메가3(리놀렌산)와 오메가6(리놀레산)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고 함량까지 높습니다. 오메가3 같은 성분이 90% 남짓이고, 나머지 10% 밑도는 정도만 지방입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는 ‘식물성 오메가3’라고 표기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식물성 필수지방산’이라고밖에 표기할 수 없습니다. 알아보기 어렵게 돼 있는 것이죠.

 

제가 알기로 쇠비름+참깨로 오메가3를 만든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세계에서 최초입니다. 편견 또는 선입견이 보통 아니게 크고 무섭습니다. 이름 있는 연구기관조차 여태 해내지 못한 일을, 조그만 시골 업체가 해냈다니 믿기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기로 걸려서) 신문에 나지 않도록 조심해라’는 식으로 대접하는, 수모도 많이 겪었습니다.

 

어쨌든 건강기능식품으로 인증을 받았고, 생산(추출) 기술은 세계 특허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이런 어려움을 뚫고 나가려니 다른 나라에서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미국 FDA(식품의약국), 유럽연합 EFSA(유럽식품안전청), 일본 후생성 등등에서 앞에서 말씀드린 그런 성분이 들어 있다는 확인서를 받아냈습니다.”

 

7. 나이가 많아도 갓 귀농해 경험 적어도 쉬 할 수 있는

 

박덕선씨는 쇠비름이나 들깨 그리고 질경이가 노령화 사회에 훌륭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쇠비름·들깨·질경이는 일부러 죽이려 해도 그렇게 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풀은 나이가 많은 어르신도 손쉽게 키울 수 있다. 다만 화학 농약이나 거름은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먹성이 좋아 중금속이든 뭐든 거침없이 빨아들인다.

 

“농촌경제도 살리고 도농교류도 하도록 마을기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 고향 산청 차황 상중리에서요, 늙은 어르신들도 어렵지 않게 지을 수 있는 농사고 도시 살다 귀농한 사람이 경험 없이도 바로 수입을 올릴 수 있습니다. 쇠비름 마을을 꾸려 생태체험도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산엔들의 슬로건은 ‘인간을 자연의 품으로’다. 문명병은 생태오염으로부터 왔다. 그러니 자연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문명병을 치료하는 방법도 자연에 있다. 누가 가꾸지 않아도 정성껏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옛날 어린 시절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다 봄이 되면 뜯어서 밥이나 죽을 쑤어 먹던 그 나물들이 우리 미래라는 얘기다.

 

 

“이제는 질경이로 건강식품을 개발하고 있어요. 열을 내리고 피를 맑게 하고 염증을 없애는 효과가 있거든요. 환(丸), 작고 둥근 알로 만들 생각입니다. 이미 개발한 식품요? 쇠비름으로 만드는 ‘그린 필수지방산’ 말고, 해피홀릭 알파(남성용)와 베타(여성용), 그리고 스터디홀릭(청소년용)이 있습니다.

 

스물세 가지 산야초를 모아 만들었습니다. 소화 잘 되고 흡수율 높아지라고 발효까지 했습니다. 성분은 같지만 남성용은 기력을 키우는, 여성용은 내분비 기능에 좋은, 청소년용은 머리 활동에 좋은 성분이 좀더 들었습니다. 무슨 약재는 아니고요, 골고루 잘 차려진 고급 밥상으로 여기시면 딱 맞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이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 체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생태 체험 들풀 공부를 마음껏 하고 살았습니다. 15년 넘게 신명나게 살다 보니 그 자리가 바로 ‘블루오션’이네요.”

 

이 블루오션이 박덕선씨만의 것은 아니겠다 싶다.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어울릴 수 있는 두레 밥상 같은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훤주

 

※ 월간 <피플파워> 2013년 10월호에 실은 글을 조금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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