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과 그 족속이 결국 추징금을 내놓기로 했습니다. 참 추잡한 집안입니다. 대를 이어 내려가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전두환은 깨끗하게 씻어내면 낼수록 좋은 그런 존재임이 뚜렷하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경남에는 전두환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경남도청 4층 대회의실에는 전두환 조상 초상이 첫째입니다. '향토 출신 선현'이라는 한자 제호 아래 여섯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5명과 함께 왼쪽에서 두번째 자리에 걸려 있는 '영수 전제 장군'이 그것입니다.
전제라는 인물은 전두환의 14대 조상입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절 봉안됐습니다. 당시 경남도지사는 이규효였습니다.
1. 권율에게 목이 베인 인물이 경남의 선현(先賢)?
초상 아래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창녕 박진·의령 정암에서 승첩했고 정유재란 때는 울산 도산전투에서 선봉장으로 크게 전공을 세우고 전사했다"는 기록이 붙어 있습니다.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선조실록>은 '도산전투'에서 전제가 "도원수 권율에게 베어져 조리돌림 당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박진·의령 정암 기록도 엉터리입니다. 1592년 의병장 곽재우가 박진·정암에서 승첩했을 때 전제는 합천에서 의병장 전치원 휘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박진·정암 전투에 전제가 참가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게다가 같이 봉안돼 있는 문익점·김종직·조식·사명당·정기룡은 사적이 뚜렷하고 또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이들과 견주면 품격마저 크게 떨어집니다.
전제가 임진왜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고 나중에 그러니까 정유재란인 1597년에 영산현감을 지낸 행적은 사실로 인정됩니다. 그러나 여기 적힌 내용은 사실이 아닙니다.
2. 12년 넘게 전제 초상 떼어내지 않은 경남도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2001년 7월 11일 최철국 경남도 문화관광국장은 "1984년 당시 이규효 도지사의 지시로 공보실에서 심의위원회를 거쳐 봉안됐다"고 밝혔습니다. 심의위원회는 문화재위원회를 뜻합니다.
최철국 국장은 경남도의회에서 전제 장군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던 당시 "최근 전제 초상의 도청 봉안이 잘못됐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던 만큼, 문화재위원회를 통해 경남을 대표하는 역사 인물들을 확정한 다음 초상의 존치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3일 경남도 문화관광국은 "이달이나 내달에 문화재위원회를 소집해 전제 초상 처리 문제를 안건으로 올릴 계획"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전제 초상은 그대로 달려 있습니다.
왼편 정기룡 장군, 오른편 사명당 대사.
2004년 전두환 비자금이 세상 사람들 관심을 끌게 되자 다시 전제 초상 철거 문제가 다시 제기됐습니다. 그 때도 경남도는 철거를 하려면 전제 장군에 대한 역사적 고증이 필요한 만큼 전문기관에 용역을 의뢰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제 초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가 제기되는 점을 고려해 이번에는 어떻게든 매듭을 지을 계획"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전제 초상은 그대로 달려 있습니다. 1984년 당시 문화재위원회에서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절차를 거쳤지만 당시 대통령 전두환의 조상이기 때문에 모셨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3. 아직도 전제가 중심인 창녕 영산호국공원
창녕군 영산면 남산호국공원에는 이 '전제'를 엉터리 기록으로 기리는 건축물이 있습니다. '전제장군 충절사적비', '임진왜란 호국충혼탑' 그리고 거기 새겨져 있는 '임진왜란 화왕산 승전도'입니다. 1982년 들어섰습니다.
당시 창녕군수는 황태조였고 경남도지사는 최종호였습니다. 충절사적비 내용은 이렇습니다. △영산현감으로서 훌륭한 목민관이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았으며 △영산 박진과 의령 정암에서 크게 싸웠고 △화왕산성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영산현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이 아니라 1597년 정유재란 때 했으며 따라서 당연히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독자적으로' 의병을 모을 처지에 있지 않았으며, 박진·정암 전투에 참여할 수도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화왕산 승전도'는 너비 3m, 높이 2m 정도 되는 조각입니다. 왜병과 싸우는 전제의 모습이 한가운데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습니다. '임진왜란 호국충혼탑' 빗돌에도 '전제'는 "특히 의병을 일으켜 선봉에 나섰던 전제 장군"입니다.
모두 엉터리입니다. "특히" '화왕산 승전'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화왕산에서는 아예 전투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1597년 왜병이 다시 쳐들어온 정유재란이 있었을 때 '농성'이 있었을 뿐입니다.
당시 상황은 <화왕입성동고록>에 적혀 있습니다. 1597년 7월 21일(음력) 방어사 곽재우가 창녕 일대 민관군을 거느리고 화왕산성에 들어가 있었던 데 대한 기록입니다.
4. 전투가 없었는데 어떻게 승전을?
여기에는 전투 관련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당시 왜병은 화왕산과 화왕산성이 매우 험난해서 함락할 수 없음을 알고 함양 황석산성으로 나아갔습니다. 물론 전제도 이 화왕산성 농성에 참여는 했습니다.
'조전장 전제 호 영수 영산현감 무오 거 초계'라고 적혀 있습니다. 지금 합천군 초계면 출신으로 영산현감을 하고 있는 영수 전제가 조전장을 맡았다는 얘기입니다. 전제는 딱 그만큼일 뿐입니다.
전제에 앞서는 인물이 있습니다. 방어사 곽재우와 종사관 성안의와 조방장 이영과 조전장 장응기입니다. (화왕산성에서 전부가 없었음은 따로 따진다 해도) 이렇게 전제보다 앞서는 인물이 네 분이나 있는데도 영산 호국공원은 지금도 전제가 중심입니다.
5. 전두환 잔재 청산 생각조차 못하는 경남과 창녕
전두환은 민주주의에 반역했습니다. 공화국의 정의를 무너뜨렸습니다. 군사반란의 우두머리입니다. 역사도 그렇게 규정했고 법정도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이런 사람 눈에 잘 보이려고 토호들이 경남도청에 전제 초상을 봉안했고 영산 그 공원에 전제 관련 엉터리 기념물을 들이세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전두환이 권력을 잃은 때로부터 따져봐도 25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껏 그대로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창녕에 인물이 없고 경남에 정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창녕에는 전제의 후손뿐 아니라 곽재우나 성안의나 이영이나 장응기의 후손도 있을 텐데, 이렇게 엉터리 기록을 문제삼는 인물이 그런 집안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마음만 먹으면 도청 대회의실 전제 초상 정도는 바로 떼어낼 수 있을 텐데, 그이에게는 이렇게 하고자 하는 정의가 없는 모양입니다. 그 아래 졸개들이나 국회의원 또는 경남도의원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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