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장애청소년에게 들려준 습지와 사람살이

김훤주 2013. 7. 3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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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경남장애청소년교육문화진흥센터의 부탁을 받아 장애청소년과 그들을 돕는 비장애청소년을 상대로 ‘습지와 사람’을 주제로 삼아 교육을 했습니다. 7월 27일 오전 11시부터 한 시간 정도였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부탁을 받고 교안을 만들 때 완성된 문장으로 했지만 이번에는 요점을 정리하는 식으로 해 봤습니다. 중요한 몇 가지만 아이들 기억에 남도록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초점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습지랑 우리 사람의 생명 유지 또는 삶이 전혀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습지라는 것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둘레 곳곳에 널려 있는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보통 사람들은 습지라 하면 경남 창녕 우포늪(소벌)이라든지 전남 순천 순천만이라든지 하는 크고 잘난 그래서 널리 알려진 습지만을 떠올리는데 실제 습지=물에 젖어서 축축한 땅은 집앞 도랑을 흘러가는 물줄기와 그 둘레에 만들어져 있는 수풀 따위까지도 일컫는 보통 개념이라는 얘기입니다.

소벌(우포늪)의 고운 속살.

 

크고 잘난 그래서 널리 알려진 습지만 습지라고 여기면, 그런 잘난 습지는 사람들이 보전해야 마땅하다고 여기면서도 자기랑 가까운 데 있는 보통 습지는 업신여기고 보호 대상으로 생각지도 않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들어가는 머리에서는 물과 물놀이, 쌀과 밥을 얘깃거리로 삼았습니다. 집에서는 수도꼭지를 틀거나 정수기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물이 사실 따지고 보면 도랑을 거치고 낙동강을 거쳐서 오는, 말하자면 습지를 지나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 쌀이 자라는 데를 논이라고 하는데, 그 논이 사람이 오랜 세월을 들여 만들고 발전시켜온 인공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원래 따지고 보면 습지이기도 하거니와 요즘 들어서는 논 그 자체를 중요한 습지 가운데 하나로 꼽는 사실을 일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습지가 없다면 물도 쌀도, 물놀이도 밥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 물, 마실 물 그리고 물놀이

 

우리가 마시고 놀이하는 물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어디로 갈까?

 

* 쌀과 밥 그리고 논

 

쌀은 어디에서 나올까? 밥은 어떻게 지을까?

논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을까? 논이 원래부터 논이었을까? 

 

* 습지는 물에 젖어 축축한 땅, 그것은 무엇일까?

 

습지는 별난 존재가 아니랍니다. 습지를 두고 별난 무엇이라고 여기는 그 순간 인간은 습지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바로 근본에서 멀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아버지 고향 시골 마을에 가면 마을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을까?

배산임수(背山臨水) 뒤로 산이 있고 앞으로 물이 있는 자리.

산이 있어야 물이 나옵니다.

소벌의 한 부분인 나무개벌. 고요하고 그윽합니다.

 

“생명의 땅이다.

 생명이 움트는 자궁이다.

 생태계의 보고다.

 생물다양성이 살아 있는 터전이다.

 홍수와 가뭄을 조절하는 자연저수지다.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터전이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생태관광지다.

 습지는 우리 인간의 삶터다.”

 

이렇게 진행하면서, “”안에 있는 낱말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도 해줬습니다. 사람들이 습지를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그런 결론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런 것들을 우리 청소년이 낱낱이 외워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다만 우리 둘레에 있고, 그것들을 통해 우리가 목숨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물과 양식을 얻는다는 사실이 핵심으로 중요하다는 얘기랍니다.

 

다음으로는 경남에서 옛날부터 사람들이 습지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는지를 짚어봤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옛날에도(어쩌면 옛날에는 더욱더) 습지와 관련을 지어 사람들이 살아왔다는 것을 세월의 흐름 속에서 알려주면 좋겠다 여겼습니다.

 

경남은 가야의 옛 땅, 가야의 배경은 넓디넓은 습지

 

* 창녕 부곡면 비봉리 습지 유적

 

비봉리에서 나온 8000년 전 통나무배(쪽배).

 

나온 것들 :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든 소나무 쪽배, 사람 똥 화석(糞石), 망태기,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조개더미, 도토리와 가래·솔방울·조, 목탄, 나무칼, 돌화살촉, 그물추, 재첩·굴·고막(짠물과 민물이 섞이는 지대에서 나는 먹을거리) 껍데기, 잉어(민물고기) 이빨, 사슴·멧돼지·개(산에서 잡을 수 있는 짐승들), 상어(바다에서 나는 고기) 척추, 가오리(바다에서 나는 고기) 꼬리뼈, 도토리 저장 구덩이(떫은 맛(타닌 성분)을 빼기 위해 바닷가 해안선을 따라 만든 구멍), 갈돌·갈판(도토리·가래·조 같은 먹을거리를 가는 기구).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얻는 방법 : 사냥과 고기잡이와 채집. 아직 농경은 하지 않았습니다.

 

습지 : 사냥과 고기잡이와 채집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지역.

 

높은 생산성 : 갯벌에는 조개가 많았고 민물과 짠물이 섞이는 기수역이기까지 하다면 플랑크톤 같은 먹이를 찾아오는 물고기나 새들도 풍부했습니다. 게다가 뒤쪽 산에서는 풀과 나무 열매를 따기 쉬웠고 산짐승도 사냥할 수 있었습니다.

 

손쉽게 옮겨다닐 수 있는 조건 : 뭍에 있는 산길보다 물길이 옛날에는 안전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다른 데로 가려고 산을 넘는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 배로는 다른 데와 교류도 하고 바다가 조용할 때는 나름대로 멀리까지 나가 바닷고기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위험과 맞닥뜨리지 않는 안전함 : 낙동강 같은 큰 강 옆에서는 지금도 사람이 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큰 강을 이뤄 흘러가는 물줄기의 에너지가 아주 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큰 강을 벗어나 그리로 이어지는 작은 물줄기가 있는 데는 물줄기가 적은데다 흐름도 세지 않아 안전합니다.

 

사람들이 습지를 벗어나 언덕배기에 살기 시작한 때는 농경사회에 들어선 다음이랍니다.

 

* 밀양 금천리 논 유적

 

밀양 금천리는 아닙니다만. ^^

3000년 전에 만들어진 보와 봇도랑, 무논(수답=水畓) 같은 농경 유적 + 돌로 둘러싸고 불을 땐 터와 마을 집터가 밀양강과 단장천이 만나는 지점 가까이 있는 밀양 산외면 금천리에서 발견됐습니다.

 

마을 집터와 생활유적은 자연제방 높은 자리에 있었고 바로 밑에는 밭 터가 나왔으며 이어서 논 터가 나왔습니다. 배후습지는 논 터보다 뒤쪽에 있었는데, 보와 봇도랑은 배후습지와 논을 이어서 논에 물을 대거나 빼는 데 쓰였습니다.

 

* 창원 동읍 다호리 고분군

 

인간은 습지에 모여 살면서 거기 생물들을 먹을거리로 삼고 물길을 교통로로 사용해 왔습니다. 창원 동읍 다호리 고분군이 그런 습지 유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남저수지 들머리 양쪽에 펼쳐져 있는 밭들이 그것입니다.

 

주남돌다리.

 

나온 것들

무덤과 널, 청동기·철기·목기, 붓과 노끈, 지우개칼, 오수전, 판상철부(납작도끼)

 

붓과 지우개칼 : 문자를 썼다는 증거입니다.

 

오수전 : 중국 한나라 때 쓰던 동전으로 전한과 후한 사이 잠깐 있었던 신나라의 왕망도 이 동전을 만들어 썼습니다. 만든 시기가 뚜렷하기 때문에 연대를 짐작하는 데 쓸모가 있습니다. 2100년 전에 이미 교역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판상철부 : 실제 도끼 구실도 했지만 철정(鐵鋌=덩이쇠)과 마찬가지로 철기 제작을 위한 중간 가공 소재이기도 하고 화폐 구실도 함께 했습니다. 낙동강 일대에서 가장 일찍 철기 문화를 이룬 집단이 여기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습지의 높은 생산성과 편리한 교통이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 김해 가락국

 

김해 가락국을 대표하는 유적은 봉황대와 관동리에 있습니다. 봉황대에서는 옛날 물 위에 지었던 고상(高床)가옥과 항구를 지키는 목책(木柵=나무 울타리) 그리고 조개더미 등등이 나왔습니다. 조개더미에서는 중국 동전과 청동으로 만든 칼, 불에 탄 쌀 따위가 나왔습니다.

 

복원해 놓은 김해 봉황대 유적. 오른편으로 고상가옥이 보입니다

 

또 관동리는 배를 대는 데로 짐작되는 뜬다리, 우물, 도로까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김해평야의 높은 농업생산력을 바탕삼아 가락국이 세워졌다고 하면 틀립니다. 지금은 평야지만 2000년 전 가야 시대에는 바다였습니다. 봉황대 유적 바로 옆에 하천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이 해반천(海畔川=바다를 끼고 있는 시내)인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봉황대 가까운 데 있는 조개무지 유적.

 

김해 일대는 갯벌이 발달해 있고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던 오목한 바다였습니다. 그래서 김해시내 봉황대와 장유면 관동리 일대가 가락국의 항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바다가 깊고 밀물과 썰물의 차가 적은 곳이 좋은 항구입니다만, 이는 스크루를 돌려 추진력을 얻는 배가 고안된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에만 해당됩니다.

 

그 이전 오랫동안은 가장 좋은 항구의 조건은 갯벌이 발달하고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커야 했습니다. 밀물 때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뭍에다 배를 얹어 두고 짐을 내리고 물과 식량을 실은 다음 다시 밀물이 되면 배를 띄워 먼 바다로 나아가는 그런 방법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창녕 출신인 성기각 시인이 발표한 시를 한 편 적어놓았습니다. 습지랑 더불어 살면서 사람들이 물과 양식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습지에서 놀이를 하고 즐겁게 지내면서 문학 활동도 이뤄진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시에 나오는 대지국민학교는 성기각 시인이 어릴 때 다닌 학교입니다. 시 제목이기도 한 토평천은 창녕 열왕산에서 발원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입니다. 이 토평천은 골짜기를 타고 흐르다가 대지면 너른 들판을 만나면서 펑퍼짐해집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습지가 바로 우포늪(소벌)입니다.

 

토평천 창산다리 아래에 피어난 노랑어리연꽃들.

             토 평 천

 

   화왕산 정기 받아 넓은 들 안고

   굽이쳐 흘러가는 맑은 토평천

   토끼풀 가는 모가지에 꽃을 맺는 냇가에 서면

   대지국민학교 나갈 종소리 낭랑하게 퍼져오고

   여름 내내 우리는

   선생님 몰래 멱을 감았다

   돌틈 사이로 매기 잡는

   병우가 냇물 깊은 곳으로 자맥질하면

   꼭순이는

   검정고무신 넘치도록 피라미를 잡았다

   말매미 울어쌌는 버드나무

   마파람은 여지없이 거미줄에 걸리고

   수박서리 하러 갔던 홍경이가 멱살 잡혀 돌아오면

   오후 수업 시작종은 사분의삼박자로 이어졌다

   종소리에 놀라 우리는 제각기

   물에 젖은 깜장빤쓰를 입고

   발목 붙잡는 고등빼기 농로를 지나

   물새궁둥이를 흔들며 교실로 달려갔다.

 

여름철 물가 아이들의 일상을 꼼지락꼼지락 보여줍니다. 까만 반바지를 서둘러 껴입고서 물이 찔꺽거리는 고무신을 신은 채 엉덩이를 삐뚤거리며 뛰어들어가는 뒷모습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아이들은 아마 수업 시간에 늦었다고 선생님한테 한 소리 듣고 엉덩이나 뺨따귀 한 차례씩 얻어터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하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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