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0년만에 다시 떠올린 기호학과 신화학

1980년대 초중반 대학 다니던 시절 기호학(記號學)이랑 신화학(神話學)을 참 재미나게 공부했던 한 때가 있습니다. 하도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대충 생각나는대로 말씀해보면 이렇습니다.

기호학은 기호의 형성과 유통에 대한 이런저런 논리들을 다룹니다. 기호는 원래부터 아무 뜻이 없는 것일 수 있는데 그것이 한 사회에서 일정한 관계 안에서 만들어져 쓰이는 과정에서 어떤 뜻을 담아내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쓰는 말이나 글도 이와 같은 기호 가운데 하나인데, 그런 기호는 죄다 그 자체로서만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기호가 통용되는 사회 또는 집단을 벗어나면 그 기호는 이미 기호가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기호에서 중요한 것은 변별성(辨別性)입니다.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 이것은 저것과 다르다, 이런 차이가 없고 그런 차이에 따라 구별이 되지 않는다면 절대 기호가 될 수 없습니다. 말(語)과 말(馬), 배(腹)와 배(舟)가 나는 소리에서 차이가 없으면 그 뜻하는 바도 구분할 수 없는 그런 이치입니다.


2. ‘현대의 신화’는 어떤 노릇을 할까?

신화학도 무척 재미가 있었습니다. 신화의 생성·유통과 소멸 따위를 다루는 학문이라 할 수 있는데요, 저는 현대 사회의 신화가 더욱 그랬습니다. 신화의 특징은 우연성(偶然性)입니다. 물론 신화의 내면 또는 배경에는 나름대로 필연(必然)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철두철미 우연입니다.

신화는 인간이 아닌 신(神)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일이기 때문에도 그러하겠는데요, 우리나라 갖은 건국신화를 봐도 이 일과 저 일 사이에는 무슨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필연으로 이어지는 맥락이 전혀 없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인과 관계도 없으며 대부분 ‘원래부터 그러한’ 사실 또는 존재로만 제시될 뿐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신화는 그 자체로써만 설명이 될 따름입니다. 하늘에서 알이 내려왔다는 가야의 건국신화도 ‘원래부터 그러할’ 따름이지 무슨 힘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일러주지 않습니다. “왜?”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 “신(神)이니까”뿐입니다.

이는 인간의 영역으로 한 걸음 다가온 전설, 그보다 더 인간화된 설화, 나아가 인간사를 다루는 이야기나 소설(小說)이랑 견주면 이런 특징이 좀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또 춘향전 같은 고대 소설은 신화적 요소가 강해 ‘원래부터 그러한’ 것이 많은 반면, 근대를 거쳐 현대로 올수록 소설은 필연이 지배하는 영역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신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건희가 부자인 까닭, 삼성이 돈을 잘 버는 까닭, 이런 따위가 되겠습니다. 이런 것들은 질문 또는 의문의 대상으로 삼아지는 경우가 거의 없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묻는다 해도 그 대답은 언제나 대체로 “이건희니까” 그리고 “삼성이니까”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따져보면 이건희가 부자이고 삼성이 돈을 잘 버는 까닭은 인과관계를 벗어나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성에 노조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삼성이 엄청난 비자금으로 검찰이나 정치인이나 장·차관이나 고위 공무원을 주물러 왔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야 할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런 ‘현대의 신화’는 그 구실이 이런 생생한-그러나 지배집단으로서는 인정하기 싫은-인과 관계를 가리는 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머리를 돌리지 못하게 하는 그런 구실이 주어져 있는 셈입니다.

3. 창평장에서 실감한 기호학의 실제

전남 담양 창평장에서, 약으로 쓰이는 것들에 붙여 놓은 이 이름표들을 보면서, 20년도 훨씬 더 옛날에 배운 기호학과 신화학이 떠올랐습니다. 여기 ‘야셍’은 ‘야생(野生)’입니다. ‘은헹’은 ‘은행(銀杏)’입니다. 압권 가운데 압권인 ‘야셍옸나무’는 ‘야생 옻나무’가 되겠습니다.

이어나가 보겠습니다. ‘야셍누름나무’는 ‘야생 느릅나무’고 ‘유금피’는 느릅나무 뿌리 껍질을 뜻하는 ‘유근피(楡根皮)’입니다. ‘누뭄나무’는 제가 소견이 좁아 잘 모르겠는데요, 아마도 ‘느릅나무’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국산헉게나무’는 ‘국산 헛개나무’일 테고요, ‘염두륨’은 ‘염두릅’이 아닐까 싶습니다. ‘업나무’는 ‘엄나무’가 확실해 보이고요, ‘오갈피나무’는 ‘오가피나무’라고도 한답니다. ‘젠피’는 무엇일까요? ‘제피’일 것 같은데요, ‘초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줄 압니다. 이어지는 ‘땅까지’는 ‘땅버들’이겠지요.

저는 여기서 ‘야셍’, ‘은헹’, ‘옸나무’, ‘누름나무’, ‘유금피’, ‘누뭄나무’, ‘헉게나무’, ‘염두륨’, ‘업나무’, ‘오갈피나무’, ‘젠피’, ‘땅까지’ 이 모든 것이 그에 걸맞은 대상을 나타내는 기호로서 제 노릇을 확실하게 하고 있음을 봤습니다.

‘야생’이라 하지 않아도, ‘은행’이라 하지 않아도, ‘옻나무’라 하지 않아도, 이것들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나타내지 않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야셍’이라 함으로써, ‘은헹’ 또는 ‘옸나무’라 함으로써, 그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더욱 생생하고 씩씩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아주 세게 울려왔습니다.

처음부터 옳고 그름이 있지는 않(았)으며, 어쨌든 이것과 저것이 같지 않고 다름을 나타내면 된다는 기호(학)의 기본을 충족하는 그런 기호를 현장에서 실감나게 체득했습니다. 밋밋하게 넘어가지는 ‘생’·‘행’·‘헛개’ 따위가 아니라, 혓바닥에 더해 아래턱까지 확실하게 돌리지 않으면 발음하기 어려운 ‘셍’·‘헹’·‘헉게’ 따위여서 더욱 뚜렷하게 뜻이 새겨져 왔습니다.

4. ‘현대의 신화’에 젖어 있었기에 터져나온 웃음 

아울러 신화의 본질도 곰곰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표기를 보고 웃음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습니다만, 그렇게 터져나온 웃음에 담긴 의미를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저 표현들의 생생함 덕분에 웃었음이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것이 ‘사투리’여서 웃어졌던 측면도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투리는 우스갯거리입니다. 사투리는 천박하기도 하고 무식함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투리는 표준말 앞에서 미안해 하고 스스로를 숨기려 합니다. 그런 사투리를 저렇게 마음껏 싸질러 놓았으니 틀림없이 부끄러운 줄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사투리는 없습니다. 당연히 표준말도 없습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 표준어라고 하는데 가만 따져보면 더없이 황당무계합니다. 도대체 교양이 무엇일까요? 김치조차 제대로 담글 줄 모르는 사람 보고 교양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 나부랭이 하나 더 안다고 교양인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는 분명 관점의 차이일 따름이고요, ‘교양 있는 사람’이 표준말 여부를 가리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 자체에도 잘못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서울말만 표준어가 돼야 하는지 또한 정당한지 여부를 따져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사투리도 없고 표준말도 없으며 다만 지역말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말이 있고 경기도말이 있고 충청도말이 있고 강원도말이 있고 경상도말이 있고 전라도말이 있을 뿐이지 그 사이에 높낮이는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신화는 이런 따져봄을 못하게 만듭니다.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말은 사투리’라고 규정한 다음 ‘사투리는 교양 없는 것들이 쓰는 천박하고 무식한 말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가 바로 지역말에 대한 ‘현대의 신화’입니다. 그런 신화가 제게도 체현돼 있었습니다.




‘야셍’·‘은헹’·‘헉게나무’·‘젠피’·‘업나무’·‘옸나무’ 따위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그 싱싱함이 즐겁고 반가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게서 느닷없이 터져나온 웃음 가운데 한두 줄기는 앞에 말씀드린 ‘현대의 신화’에 스스로가 ‘뼛속까지’ 젖어 있었기에 나온 산물이라는 반성을 ‘뼈저리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평장은 아주 좋았습니다. 5일·10일에 서는 이 장은 유과를 비롯한 한과와 엿이 명물이었습니다. 맛도 썩 괜찮았고요, 이에 들러붙는 끈적거림도 없었습니다. 싸게 나오는 죽물(竹物)도 좋았고, ‘할마시’들 들고 나와 파는 콩·팥·녹두나 두부·떡국도 좋았습니다. 국밥도 맛이 좋았습니다. 이 모두가 값도 비싸지 않고 싼 편이었습니다.)

김훤주
남도5일장
카테고리 역사/문화 > 문화일반
지은이 김옥경 (민속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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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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