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의령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을 한 백산 안희제 선생과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물리친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두 분 생가를 찾아서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눈에 띈 안내판은 우습게도 '호암 이병철 선생 생가'였답니다.
'이병철'은 많이 들어봤는데 '호암'은 아는 이가 많지 않을 듯싶습니다. 뒤에 '선생'이라는 극존칭까지 붙어 있으니 어쩌면 무슨 대단한 인물로 착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삼성 재벌을 창업한 바로 그 '이병철'이랍니다.
의령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끈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온 몸과 마음을 바친 백산 안희제 선생이 태어난 땅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대 재벌을 만든 이병철이 태어난 땅이기도 합니다.
이병철은, 지금 삼성 재벌 회장으로 행세하는, 그러나 공식으로는 회장이 아닌 '이건희'(그래서 실제 회장 권한은 누리면서도 그에 걸맞은 책임은 전혀 지지 않는다고 합니다.)의 아버지이고 그 아래 3대 세습을 준비하고 있는 '이재용'의 할애비입니다.
2012년 11월 30일 회장 취임 25년을 맞은 이건희. 사진 뉴시스
물론 엄청나게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 하고, 또 이병철이 바로 그런 엄청난 부자임은 사실이지요. 나아가 이병철 태어난 집이 기세가 매우 드높고 맥이 좋다는 얘기도 사실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병철이 '선생' 호칭까지 받을 만한 인물이냐는 다른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돈만 많았다 뿐이지 사회에 이바지를 많이 했거나 사람됨이 훌륭한 그런 인물은 아닌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병철은 먼저 박정희 집권 시절인 1966년 일본에서 사카린을 건설자재로 속이고 들여온 밀수범입니다. 다른 부정과 불법도 숱하게 저질렀습니다. 당시 재벌은 누구나 다 그랬다지만, 지금껏 사회를 썩게 만들고 있는 정경유착의 시조격이기도 한 인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쌓은 부를 대대손손 물려줌으로써 정경유착과 불법부정조차도 대대손손 이어지도록 만든 장본인이랍니다. 이병철-건희-재용 집안은 지분이 삼성 전체의 10%조차 안 되면서도 순환출자제도 따위 희한한 지배구조로 삼성을 통째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그리고 이들의 3대 세습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정일-정은 말고는 정치와 경제를 통틀어 비슷한 보기를 찾기조차 어렵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보는데, 이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사람이 있는지요?
저는 이런 이병철 이름 뒤에서 '선생'을 떼어내야 한다고 봅니다. 극존칭 '선생'의 속성은, 그렇게 일컬어지는 사람에 대한 끝없는 긍정과 존경입니다. '호암 이병철 선생'이라는 호칭 또는 규정의 뜻은 이렇다고 저는 여깁니다.
밀수범이라도 좋다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정경유착이라도 좋다 돈만 많이 번다면, 3대 세습은 더 좋다 돈만 많이 벌어 놓았다면……. 돈을 으뜸으로 치고 전지전능한 신(神)의 자리에까지 올리는 지금 우리 시대 물신 숭배의 생생한 표현이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이병철 이름 뒤에서 '선생'을 지우는 일은 대통령 선거 따위와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물신 숭배에서 풀려나야 이 '선생'을 지울 수 있습니다.
2009년 2월 11일 대구에서 벌어진 '호암 선생' 동상 제막식. 사진 뉴시스.
이렇게 유권자가 바뀌지 않으면 대통령은 절대 달라지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자기를 뽑아준 유권자를 절대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이는 자기가 내세운 747 공약을 전혀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쉽게 손에서 놓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노력은 했습니다.
이 경우는 유권자에게 더 잘못이 있습니다. 당시 모든 사정에 비춰보면 '7% 경제성장, 4만 달러 국민소득, 7대 선진국 진입'이 불가능함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 유권자들은 '그래도 CEO 출신이니까', '그래도 이명박이니까' 하며 이명박 후보를 찍었습니다.
문제도 정답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유권자가 얼마나 바뀌느냐가 중요하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권자들이 '돈만 된다면 무엇이든 다 좋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상, 재벌을 옹호하는 박근혜는 물론 재벌을 짐짓 비판하는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공공연하게 재벌과 부자를 찬양하는 박근혜를 지지하는 이들은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렇지 않은 문재인이나 안철수 등등을 지지하는 이들은 자기 내면을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이가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남의 노동의 결과를 자기것으로 가로채고 싶어한다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세상이 별로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고요? 권한(權)이 있는(有) 유권자니까요. 주인이 바뀌지 않았는데도 이를 거스르고 앞장서 바뀔 머슴은 없으니까 그렇지요. 적어도 지금은, 유권자 대다수가 가장 가치롭다고 여기는 존재나 개념을 손쉽게 짓밟고 깨부술 배짱은 누구에게도 없거든요. 이는 유권자가 물신을 숭배할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김훤주
※ <기자협회보> 11월 7일치에 실었던 글을 제목과 내용을 고쳐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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