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죽음과 스러짐이 가득한 봄 들머리 우포늪

김훤주 2012. 4. 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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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 일요일에 경남 창녕 우포늪(소벌)을 다녀왔습니다. 지역금속노조 식구들이 나들이를 하는데 길잡이를 좀 맡아달라고 하는 바람에 나선 걸음이었습니다.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바람이 꽤 불고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사실 제가 길잡이를 크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원래가 사람이 느끼려고 하는 만큼 느끼고 보려고 하는 만큼 볼 뿐이라는 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남들이 잘 보려고 하지 않는 그런 것에 눈길을 많이 두시고 눈에 바로 보이지 않는 작은 것 숨은 것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더 신경을 쓰시면 남다른 느낌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만 했습니다.

물론 소벌이 소벌(우포)+나무개벌(목포)+모래늪(사지포)+쪽지벌로 이뤄져 있다거나 하는 얘기는 나름대로 드렸습니다만. 어쨌거나 이날 일행은 이방면 우만마을 들머리 목포(나무개벌)에서 소벌 징검다리를 지나 사초 군락지까지 3km 남짓을 걸었습니다.

2011년 겨울에 들르고 서너 달만에 찾은 소벌은 어둡고 무거웠습니다. 그렇지만 이파리를 떨군 나무들은 그럴 듯했고 양지바른 데나 물기가 촉촉한 데 나 있는 파릇파릇한 풀들은 보기가 좋았습니다. 열흘 남짓 전이었으니까 지금 찾으면 나뭇가지 연둣빛이 좀 더 짙어져 있겠지요.
 

나무개벌 들머리 왕버들 무리. 나무는 아직 거뭇거뭇하지만 바닥에는 새 싹들이 푸릅니다.


소벌을 비롯한 모든 습지는 생명의 보고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이 있고 땅이 있고 그래서 나무랑 풀이 있고 갖은 벌레도 있으니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잘 갖춰져 있다는 뜻입지요. 그런 바탕 위에 물 속과 땅 위에 사는 동물들이 있고 말씀입니다. 새들이 여기 습지를 찾아오는 까닭도 알고 보면 단순해서 말하자면 먹을거리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모든 생명, 모든 탄생은 바로 죽음과 관련돼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보기로 들어도 마찬가지인데 이를테면, 제가 오늘 아침에 먹은 그 많은 것들이 죽지 않았으면 제가 지금 이처럼 살아 있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갈대 억새 우거진 둑길을 걸어 나무개벌을 둘러봤습니다. 여기 이것들도 스러져가는 존재들 가운데 하나겠지요.


풀이 싹터서 자라는 데는 앞서서 피어났다가 스러져간 풀들이 필요합니다. 스러진 풀을 거름 삼아 새 풀이 자랍니다. 그 풀을 먹이삼아 자라는 벌레들이 있고 그 벌레들을 먹이로 삼는 다른 많은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명체와 생명체가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얽혀 있습니다. 그 얽혀 있음이 생생하고 적나라한 데가 바로 습지, 우포늪입니다.

겨울, 아직 싹이 트지 않고 있는 때에 가면 그런 죽음과 스러져감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봄에서부터 가을까지는 갖은 삶과 생명들의 모습이 눈을 어지렵혀서, 이런 죽음과 스러져감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 편견을 깨고, 추운 겨울에도 덤불 아래 볕바른 데서는 풀들이 여리나마 새 빛을 잃지 않고 자란다는 사실도 알게 해 줍니다.
 

나무개벌 풍경. 가운데 점점이 떠 있는 것은 아래로 그물을 달고 있습니다.


소벌의 일부인 나무개벌은 보시는대로 물이 무척 넓고 또 다른 데보다 깊은 편입니다. 그래서 헤엄을 칠 줄 아는 작은 철새들이 많이 있습니다. 짐작하시는대로 철새들은 물 속에 사는 벌레나 물고기를 잡아 먹습니다. 사람도 철새와 다르지 않아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데, 그 방법은 달라서 바로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그물을 씁니다.
 


그물은 끄트머리가 화살표처럼 돼 있습니다. 두 개를 맞붙이기도 하는데요, 그물은 떠 있는 검은 점 아래로 있고 화살표 부분에서도 모양대로 말려들어가 있습니다. 물고기가 왼쪽에서 오른쪽 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다가 걸리면, 이것들이 돌아가지 않고 계속 진행 방향으로 치받는 이상은 화살표 있는 데에 모이도록 고안돼 있는 그물입니다.

하하. 어떻습니까? 사람에게는 삶의 수단이지만 물고기에게는 생명을 잃는 무덤이라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철새들은 사람들 편에 붙어서 어부지리를 챙깁니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보이시겠지만, 유별나게 그물 둘레 물에 청둥오리 따위가 많이 노닐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걸었습니다. 아이들도 함께했습니다. 아이들은 이날 소벌이 무엇인지 여기에 무엇이 살고 여기서 무엇을 눈여겨 봤는지 따위는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별나게 즐거웠던 하나를 중심으로 기억이 형성될 텐데, 그것은 어른들 눈에는 아주 사소한 것이기가 십상입니다. 이를테면 '징검돌 사이를 힘차게 달려가던 물살' 같은 것이지요.
 

식구들까지 함께한 지역 금속노조 소벌 나들이.


여기 물 아래 쌓이는 것들도 모두 죽음으로 스러져간 주검들입니다. 풀이 쌓여 썩고 죽은 물고기나 벌레들도 그 틈에 끼여 있을 텝니다. 거기서 다시 다른 생명이 나고 그런 거름 위에서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립니다. 이런 순환이 있기에 소벌과 같은 습지가 이를테면 생명의 보고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죽음도 있습니다. 어지간한 사람보다 오래 살았다 싶은 나무 한 그루가 뿌리가 뽑혀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억지로 죽이지도 않고 일부러 살리지도 않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별한 경우라면 또 달라질 수 있겠지만 말씀입니다. 한 세상 살다간 나무 앞에서 저는 제게 남아 있는 목숨이 얼마일까, 잠깐 생각해 봤습니다.
 


나무개벌과 소벌이 경계지어지는 언덕배기에 이런 집이 한 채 있습니다. 들머리 은행나무 두 그루가 멋집니다. 무슨 재실이라고 저는 알고 있는데, 가을에 오면 노란 은행이 또다른 장관으로 풍성합니다. 지금 이 앙상함도 저는 좋습니다. 저 앙상함 또는 헐벗음이 그 나무의 한 철을 나는 방식일 따름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소벌과 나무개벌을 갈라주는 제방 아래에 이처럼 버들이 있습니다. 무리지어 있습니다. 아직은 짙지 않지만 그래도 은근하게 연둣빛이 뿜어져 나옵니다. 얼마 안 가 저 연둣빛들 아직 덜 자란 여자아이 젖가슴처럼 봉긋하게 부풀어 오릅니다. 그러다가 곧바로 까까머리 남자아이처럼 짙푸르게 바뀌고 맙니다.
 


줄곧 길을 가다보면 이런 징검다리가 왼쪽에 나타납니다. 줄곧 가면 쪽지벌이 나오고 쪽지벌 끝에서 토평천 이어지는 제방을 따라 낙동강이 이 토평천과 몸을 섞는 유어교 아래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날 사람들은 여기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노조 일행은 점심 먹으러 갔고 저는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이인식 선생 만나러 세진 마을로 갔습니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이른바 사초 군락지가 나옵니다. 거기를 지나 줄곧 가면 우포늪 생태관이 있는 데가 나오고 더 나아가면 대대제방이 나옵니다. 대대(大垈)는 우리 토종말로는 '한터'가 됩니다. 제가 어릴 때는 이렇게 일렀는데, 요즘은 그리 말하는 이가 적어졌습니다. 이런 일이 그리 드물지 않기는 하지만, 좀 서운합니다.
 


징검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나오는 풍경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별 감흥 없이 볼 테고 어떤 사람들은 나름대로 감흥을 느낄는지도 모릅니다. 봄이나 여름에 오면 눈에 담지 못할 모습들입니다. 이런 쓸쓸한 장면을 어디에서 이처럼 풍성하게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쓸쓸만 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죽음과 시듦만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씀입니다. 저기 허옇게 말라버린 덤불을 헤치고 아래를 살피면 푸른 풀들이 바닥에 바짝 누운 채 낮은 포복으로 진군 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군데군데 푸른 빛이 밖으로 비치고 있는 데서도 저들의 행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쓸쓸함과 씩씩함의 합창입니다.
 


씩씩함과 쓸쓸함의 합창은 저기 소벌 흐린 물 속에서도 이어집니다. 탄생과 죽음이 한 순간도 일어나지 않는 적이 없는 데가 습지입니다. 죽음을 바탕 삼아 삶이 이뤄지는 풍성한 공간입니다. 삶을 이어나가 스러짐에 이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 스러짐이 있기에 새로운 탄생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끝없이 맞물리는 과정에 제가 놓였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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