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아직 실현되지 못한 대한민국 건국강령

김훤주 2012. 2. 1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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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분노하라>고 하는 얇은 책 한 권이 엄청나게 많이 팔렸습니다. 이 책 <분노하라>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노전사 스테판 에셀이 펴냈습니다.

여기서 프랑스 독립운동의 노전사 스테판 에셀은 1944년 3월 채택된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의 개혁안을 분노(또는 분개)하는 기준으로 내세웠습니다. 이 개혁안은 나치로부터 해방된 자유 프랑스(La France libre)가 지켜나갈 원칙과 가치를 밝히고 있다고 합니다.


개혁안에는 '모든 시민에게, 그들이 노동을 통해 스스로 살 길을 확보할 수 없는 어떤 경우에도 생존 방도를 보장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완벽한 구축', '늙고 병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삶을 마칠 수 있게 해주는 퇴직연금제도', '각종 에너지원, 전기와 가스, 탄전(炭田), 거대 은행들의 국영화', '경제계·금융계의 대재벌들이 경제 전체를 주도하지 못하게 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 정립' 따위도 들어 있습니다.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며, 노동계가 창출한 부를 정당하게 분배하는 일을 금권(金權)보다 중시'해야 한다는 이런 제안은 나중에 프랑스 공화국에서 차례차례 어느 정도 실현됐다고 합니다. 지난해 스테판 에셀은 이런 가치들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분노하라>를 썼고 프랑스 안팎에서 크게 호응을 얻었습니다.


백범 김구.

우리나라에는 이런 것이 없을까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 생각났습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우리나라로 치면 독립운동가에 해당되고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는 우리나라로 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해당됩니다.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의 개혁안보다 이른 1941년 11월 채택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인터넷에서 찾아 읽어봤습니다. 그러고는 대한민국이 아직도 실현하지 못한 내용들이 거기 들어 있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답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두고 "민족의 힘으로써 이족(異族=일본) 전제를 전복하고 5000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일보의 착수였다"고 밝힌 다음 건국강령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토지·대생산기관의 국유화 △학령 아동 전체에 대한 고등교육의 면비수학(免費修學=무상교육) △적산(敵産=일본 재산) 몰수와 국유화 △몰수 재산을 빈공(貧工=가난한 노동자)·빈농·무산자(생산수단이 없는 사람)를 위한 국영·공영 집단 생산기관으로 충당".


뿐만 아니랍니다. "△노공(老工=늙은 노동자)·유공(幼工=어린 노동자)·여인의 야간노동과 불합리한 노동 금지 △농공인(=노동자·농민) 면비의료(免費醫療=무상의료)로 질병 소멸·건강 보장"도 건국강령은 밝혀 놓았습니다.


더욱이 선거권은 만 열여덟 살 이상 남녀에게 모두 주어져 있고 피선거권도 만 스무세 살 이상 남녀에게 모두 주어져 있었습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허용하는 하한선이 제각각 만 열아홉 살과 스물다섯 살인 지금보다 훨씬 더 열려 있는 셈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좌익이 많아서 사회주의적 성격이 짙었다고 누군가 비판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은 백범 김구였습니다. 김구는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밝힌 그대로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우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건국강령은 좌·우를 넘어서 당시 독립운동세력 대부분이 합의해 만든 해방된 대한민국의 설계도라고 봐야 합당하겠습니다.


저는 이 건국강령을 다가오는 4·11총선과 12·17 대선에서 분노(또는 분개)하느냐 여부를 정하는 기준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67년 전에 이렇게 훌룡한 설계도가 나와 있는데도 이에 못 미치는 공약을 내놓는 정당과 후보에게 '쑥떡'을 제대로 한 번 먹여보고 싶은 것입니다.


김훤주
※ <경남도민일보> 2012년 2월 14일치 11면에 실린 글을 조금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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