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쉰 살 먹은 '철수'한테 비친 '철수와 영희'

김훤주 2012. 1. 3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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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6일 저녁 8시 부산 광복동에 있는 극단 새벽에 가서 연극을 봤습니다. 노래가 있는 연극 - 철수와 영희를 위한 콘서트였습니다. 극단 새벽의 이성민 연출가가 대본을 만들어 이번에 무대에 올렸습니다.

연극은 재미 있었습니다. 아니 재미 없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연극을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됩니다. 이 연극을 보면 사람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아니 오히려 편안해집니다.

연극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일본 청년이 쓴 책 <가난뱅이의 역습>과 한국 청년이 쓴 소설 <철수 사용 설명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두 책과 바로 관련되는 내용이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이 두 책을 모두 읽었거나 아니면 두 책 가운데 하나만 읽은 사람은 이 연극을 아주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두 책 가운데 아무것도 읽지 않은 사람도 아주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저마다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 책에 나오는 내용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성민 연출가. 2011년 12월 25일 홍보 콘서트에서.


1. 콩나물 시루에 끼얹어지는 물

연극은 문과 눈으로 열립니다. 어두운 무대에서 소리만 나옵니다.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세상을 다스리고 바라보는 이치가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얘기입니다. 문(文)이 아무리 좋은 이치를 담고 있어도 눈(眼)이 없으면 보지 못합니다. 문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눈이 어그러져 있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추상적이고 눈에 잡히지 않는 뜬구름 잡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 뜻이 무엇인지 따지고 새기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드는 느낌 그대로 누리면 그만이겠지 싶습니다.

이런 문답은 몇 차례 더 이어집니다. 교육이란, 기르는 것이 아니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다른 사람과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어디를 향하게 하고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대사도 있습니다.


제가 제대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디를 향하고 어디로 나아가는 것은 사람이 할 따름이지 교육이 하지는 않는다는 말도 나옵니다. 마찬가지 이를 두고 깊이 생각하거나 무슨 교훈을 얻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어쩌면 시루에 든 콩나물에 끼얹어지는 물과 같다고 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끼얹어진 물은 시루에 콩나물을 스윽 한 번 위에서 아래로 스쳐지나갈 뿐이지만 콩나물은 쑥쑥 자랍니다. 오히려 물에 잠겨 있으면 콩나물은 자라지 못하고 썩어 버립니다.


그와 다를 바 없이, 연극을 한 편 봤다고 해서 그 연극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들어야 보람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주어지는 대로 편하게 즐겁게 보고 나면 그것이 정한 이치에 따라 사람 살아가는 데 이런저런 보탬이나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지지리도 못난 철수와 세상 이치를 나름대로 아는 영희

철수와 영희. 연극 마치고 뒷풀이 자리에서 찍었습니다. 한 달 전보다 둘 다 살이 엄청 내렸습니다.


여기 철수는 지지리도 못난 인간입니다. 취직을 하려고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면접관이 이리저리 던지는 물음에 그만 머릿속이 하얗게 돼서 대답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생각할 줄 아는 인간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평범하게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온 29살 청년이면 대체로 그러한 그런 인간입니다. 어머니한테서는 용돈을 끊어버리겠다는 둥 구박을 받고 아버지한테서는 날마다 안타까움에 찌든 눈길과 느낌을 받는 친구입니다.


철수는 영희와 인터넷을 통해 이어집니다. 페이스북으로 소통을 합니다. 영희는 18살 먹었습니다. 그런데 철수는 영희보다 세상 사는 이치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모릅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현실과 다른 설정이라고 미심쩍어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희는 학교에 다니지 않습니다. 이른바 홈스쿨(home school)을 합니다. 아침 나절에 동네 아파트 단지를 돌며 세탁물을 걷는 일로 밥벌이를 하고 나머지 시간에 자기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팟캐스트도 합니다. 이름이 '미주알고주알'이라지요. 지금 이름을 떨치고 있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와 경쟁을 하고 있답니다. 하하.


영희의 공부는 자유롭습니다. 자기가 궁금해하는 데 대해 공부를 합니다. 세상 사는 이치를 이런저런 책을 많이 읽어 많이 알고 있지만 인생살이 경험은 많지 않아 세상과 다른 사람을 가볍고 우습게 여길 수는 있을 것입니다.


3. 모두 100만원으로 한 달을 사는 네 사람


영희랑 함께 사는 삼촌이랑 어머니랑 이모는 한 달 지내는 데 드는 돈이 모두 합쳐도 100만원 수준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노릇이겠느냐고 입질을 하는 이들도 분명 있겠지만, 저는 충분히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여깁니다.

영희 엄마. 2011년 12월 25일 홍보콘서트에서.


필요한 것만 하고 조금 불편하게 살면 됩니다. 마음에서 욕심을 걷어내면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 적어도 남들만큼은 해 놓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 자식만큼은 좋은 직장 얻어야 한다는 생각 등등.


연극은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을 이것저것 집어와 보여 줍니다. 갖은 것이 다 나옵니다. 철수를 통해 지금 이 시대 청년들이 맞닥뜨린 현실이 나옵니다. 외국계 대형 매장도 나옵니다. 이런 것들이 대사랑 노래랑 버무려져 있습니다.


극단 새벽 배우들이 몸소 노래를 하고 악기를 연주합니다. 연습한지 두 달 정도밖에 안 됐다는데 실력이 상당합니다. 어떤 이는 어느 노래 한 대목에서 감정이 복받쳐 울기도 했다고 합니다. 저도 울 뻔한 대목이 있습니다만 그게 어디인지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4. 욕망과 희망의 틈새에 놓여 있는 연극

'철수와 영희를 위한 콘서트'는 불편합니다. 굳이 고개를 처박아가면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은 현실 속 상황들을 재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배짱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습니다.

왼쪽에서부터 철수 영희 영희 이모 영희 엄마. 2011년 12월 25일 홍보콘서트에서.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그것이 평화가 됐든 행복이 됐든 다른 무엇이 됐든, 혼자만 누리려고 하면 그것은 욕망이 되고 여럿이서 두루 같이 누리려고 하면 그것이 희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편안하고 재미나고 즐거운 연극일 것 같습니다. 욕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불편하고 지루하고 고약한 연극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욕망을 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도 기릅니다. 바로 그 틈새에 이 연극은 놓여 있습니다.(불편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곳곳에 폭탄을 설치해 놓은 연극입니다. 웃음 폭탄!)


연극을 보는 데 들인 시간이나 돈 따위가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1월 26일 8시 공연이 첫 무대여서 완성도가 높지 못하다는 말을 연극 끝나고 나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번 더 보러 가기로 했습니다. 이 날 저는 마지막 3월 31일 공연에서 한 자리를 예약했습니다.


5.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공짜로 보여준다고?


연극이 마치고 나서 이성민 연출가에게 이번 공연이 자리가 꽉꽉 들어차기를 바란다고 했더니 그래도 돈은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연극에서 기타를 연주했던 차동희씨가 말을 이어갔습니다. "지역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짜로 보여주거든요."

연극을 마친 뒤 펼쳐진 뒤풀이.


저는 맞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날 둘이 갔는데 관람료(1인당 2만2000원, 25% 할인권이 있어서 1만6000원)를 받지 않으려 했습니다. 블로거로서 초청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저희는 3만원을 냈는데, 그랬더니 후원금으로 처리하겠다고 하더군요.


문화를 누리는 기본 취지와 자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함께 누리고 함께 책임지는 정신과 맞지 않다고 했습니다. 한쪽은 즐기는데 다른 한쪽은 자기 돈 쓰고도 모자라 배까지 곯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깎아줄 수는 있어도 공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벌이가 좋지는 않겠지만, 다들 욕심을 조금 버리면 한 해에 두세 차례 연극 관람료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는 '새벽지기'가 됐습니다. 한 달에 1만원씩 극단 새벽에다 후원하는 하는 노릇입니다. 저도 벌이가 좋지는 않습니다. 한 달에 200만원이 채 되지 않는 수준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하는 까닭은 앞으로도 꾸준하게 이런 문화 이런 연극을 누리고 싶다는 데 있습니다.


1월 26일 시작한 1차 공연은 2월 4일 끝납니다.(수·목·금 오후 8시, 토 오후 5시) 2차 공연은 2월 22일부터 3월 31일까지라고 저는 들었습니다. 전화 051-245-5919. saebyeok.communeart.net, facebook.com/saebyeoknet. 청소년은 1만5000원입니다. 언제나 예약은 필수랍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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