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부러진 화살' 허구 있지만 사실까지 부정해서야

기록하는 사람 2012. 1. 3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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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러진 화살>을 놓고 이런 저런 논란이 많다. 영화의 내용이 '팩트(사실)'이냐 '픽션(허구)'냐에서부터 영화의 주인공인 김경호 교수(안성기 분)가 과연 사법권력의 희생양이냐 아니냐를 놓고 많은 이들이 설전과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와중에 언론은 영화의 바탕이 된 '석궁사건'의 실체를 영화 내용과 비교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런 기사와 논쟁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영화에서 사법권력의 희생양처럼 나오는 김경호 교수와 실존인물인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당연히 '일부 사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다. 그냥 내 느낌을 편하게 이야기한다면, 우선 실제 김명호 교수에 비해 영화 속 김경호는 너무 멋있다. 안성기라는 배우의 아우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좀 심할 정도의 왜곡이다.
 
실제 재판 과정을 일일이 취재하고 기록해 <부러진 화살>(2009, 후마니타스)이라는 책을 낸 작가 서형에 따르면 김 교수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고집불통이며 성격도 좋지 않다고 한다. 이 책은 김 교수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만들지 않는 불편한 성격을 갖고 있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해 '멍청이' '쓰레기' '개소리' '개판'이란 말을 서슴지 않는다. 나 역시 이 책을 쓰면서 김 교수로부터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좋은 감정을 갖기 힘들었다." 

영화에서 기자로 나오는 김지호.책 '부러진 화살'을 쓴 서형 작가로 보인다.


영화는 대부분 이 책에서 서형 작가가 기록한 항소심 재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나올 때 김명호 교수는 책의 발간 자체를 반대했다고 한다. 작가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건의 주인공인 김명호 교수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채 이 책을 내게 되었다. 김 교수의 생각대로만 책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내용이 포함되었다고, 자신의 요구대로 책의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 이야기를 쓰지 마라'고 할 정도라면 거의 '파쇼'다. 이런 식이라면 기자들이 쓰는 기사도 일일이 취재원의 사전 검열과 허락을 받아야 할 판이다.
 
게다가 영화는 김 교수에 대한 모든 재판, 즉 1997년 '부교수 지위 확인 소송'이나 2007년 '교수 지위 확인 소송'에 대한 재판도 싸잡아 잘못된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영화만 보면 김 교수는 진실과 정의를 바로잡으려다 부조리한 권력에 희생당한 영웅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들 재판의 절차나 과정, 판결의 결정적인 하자는 드러난 게 아직 없다. 분명한 팩트는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김 교수의 캐릭터라든지, 석궁사건 이전의 재판까지는 그냥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허구적 설정이라고 보면 된다.
 

영화에서 김경호 교수역을 맡은 안성기 씨.


확실한 것은 2007년 판결에 불만을 품고 석궁에 화살을 장전한 채 판사의 집에 찾아갔고, 그게 고의적이든 우발적이든 발사가 되었고, 화살이 판사의 몸에 바로 맞았는지, 벽에 튕겨서 맞았는지, 아니면 아예 맞지 않았는지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은 이런 부분을 명확히 규명해야 했다. 왜? 이게 제대로 규명된다 하더라도 김 교수의 범죄 자체는 성립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형량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권리가 있고, 검찰은 기소한 혐의를 입증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재판은 혈흔 감정이라든지, 피해자인 판사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부러진 화살의 행방 등 김 교수와 변호인의 지극히 당연한 요구를 마땅한 이유도 없이 반복적으로 '기각'한다. 재판부가 사전에 정해놓은 '엄벌' 각본대로 끌고 가려고 그랬는지, 피해자인 동료 판사의 거짓말이 탄로날까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김 교수의 건방진 법정 태도가 거슬려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이유도 아니라면 정말 김 교수의 요구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것이어야 하는데, 이유 설명도 없이 계속 기각을 때리는 판사의 모습이 관객은 황당한 것이다. 바로 이게 영화에 비친 '불통 사법부'의 모습이다.
 
이 석궁사건 항소심 재판 과정은 적어도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게 맞다. 김 교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혈흔 감정 신청이나 부러진 화살의 행방을 추궁하는 것마저 억지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좀 지나치다. 물론 현실에서도 김 교수가 '진실과 정의를 수호하려다 권력동맹에 희생당하는 영웅'인지 아닌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흉기를 들고 판사에게 따지러간 범죄자인 것도 명백하다. 하지만 비록 흉악범일지라도 '적법절차에 따라 제대로 재판받을 권리를 박탈당한 불쌍한 인물'인 것만은 사실이다. 사실과 허구의 사이, 이런 정도만 가려서 보면 혼란은 좀 정리될 것 같다.

※경남도민일보에 썼던 칼럼에 좀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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