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거창에서 찾아낸 걸을만한 시골길

김훤주 2011. 10. 3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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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석 달 동안 거창을 참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보기 좋고 걷기 좋은 길을 찾기 위해서였지요. 거창에는 수승대 일대와 월성계곡을 비롯해 아름다운 명승지가 꽤 많습니다. 금원산과 기백산 등 빼어난 산도 마찬가지 많습니다.

그러나 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월성계곡을 보기로 들 수 있겠는데, 골짜기는 매우 그럴 듯하지만 길은 아니었습니다. 길을 걸으면서 골짜기 풍경을 보기 어려웠고 그 길 또한 밋밋한 편이었습니다. 골짜기와 도로를 둘러싼 산들 또한 소나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다채로움이 덜한 편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둘러본 끝에 주상면 연교리 임실마을 성황단에서 도평리 봉황대까지 3km 남짓을 골라잡았습니다. 농로로 쓰이는 콘크리트길과 둑길·아스팔트길이 어우러져 시골 맛이 살아 있었고, 들판을 질러다니는 아기자기함이 있었으며 황강과 이를 따라 펼쳐지는 산들 풍경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거창읍 김천리 네거리 군내버스 터미널에서 10월 11일 오후 1시 40분 주상면을 거쳐 고제면까지 들어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는 낡고 지저분하고 낙서도 많았으나 햇살은 고왔습니다.

처음은 사람이 둘밖에 없었는데 읍내를 가로지르니 금세 열 명 남짓은 서야 할 정도로 가득차 버렸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습니다. 낡은 선풍기를 고쳐 실은 사람도 있었고 아픈 아이 데리고 병원에 갔다 오는 이도 있었습니다.

임실마을 들머리에서 1100원을 주고 내리니 2시 남짓, 길 건너 왼쪽으로 다리를 건너려는데 그 너머에 우람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옆으로 위로 자란 품이 엄청나 마흔 걸음 넘게 떨어져야 카메라에 전체 모습을 담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마을의 역사가 만만하지 않다고 일러주는 셈이랍니다.


임실 마을의 녹록지 않은 역사를 보여주는 자취는 또 있습니다. 성황단입니다. 성황단은 마을 들머리나 고갯마루에 들어서 수호신 구실을 한답니다. 커다란 종을 엎어놓은 형태로 크고작은 돌들을 쌓아 이뤄졌는데 높이가 두 길은 되지 싶었습니다.
 
층층이 놓인 돌에는 이끼가 끼어 있습니다. 둘러싼 소나무 세 그루 또한 이리저리 휘어지고 솟구쳐 올랐습니다. 다른 고장에 가면 팽나무를 성황나무로 삼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 거창은 좀 다른 모양이지요. 그 아래 길가에서는 노부부가 허리를 구부린 채로 나락을 널고 있습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오래 노닐다 마을을 오른편에 둔 채 성황단을 끼고 돌았습니다. 길가에는 메밀밭과 콩밭과 사과밭 따위가 차례차례 펼쳐집니다. 해는 이미 기울어 서산 너머에서 햇살을 보냅니다.

그늘진 산과 햇살을 받은 들판이 색다르게 어울리고 그 경계선은 환하게 부서집니다. 조금 더 가면 개울이 나옵니다. 황강이랍니다. 합천을 거쳐 낙동강에 합류하는 바로 그 황강입니다.

개울을 건너니 영월정(詠月亭)이 나옵니다. 개울이 절벽과 만나는 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절벽에는 노랗거나 붉게 물들기 시작한 잎들을 매단 나무들이 우거졌습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기에 달(月)이 뜨는 저녁 무렵 그 풍경을 읊기(詠)에는 안성맞춤이겠습니다.

개울을 이루는 물은 꽤나 쾌활해서 흐르는 소리가 가벼웠답니다. 맞은편 기슭에는 높게 자란 플라타너스가 한 그루 우뚝합니다. 푸른 빛을 떨치면서 연둣빛으로 잎이 바뀌는 형상인데, 그늘이 아주 넉넉합니다. 이런 때문인지 위쪽 도로를 지나가던 자동차들이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들어와서는 그늘에 앉아 잠깐 쉬었다 나가는 것입니다.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에 자리를 깔고 장만해 간 맥주를 마십니다. 단감과 오이를 깎고 황태포를 찢습니다. 나무 둥치에 기대어 물소리 들으며, 그늘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때 이른 단풍과 들판에 쏟아지는 햇살을 눈에 담았답니다.

이제는 둑길입니다. 둑길은 1089번 지방도를 만나 끊어집니다. 아스팔트길로 잠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1975년 만들어졌다는 콘크리트 황강교를 건너 오른편 제방을 계속 탑니다. 들판은 이제 누렇게 익지 않은 데가 드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농로를 따라 바닥에 자리를 깔고 거둔 곡물을 말립니다. 보통은 한두 사람이 일하는데 여기는 다섯이나 됩니다.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지나려는데 젊은 축에 드는 아저씨 한 분이 웃으며 말을 건넵니다.

"사진 안 찍능교? 하나 찍어 주소." 사진을 찍고는 몇 마디 고맙게 말을 주고받다가 돌아섭니다. 그이들은 말린 나락을 자루에 담고 있었답니다.


끄트머리 봉황교에서 오른쪽 비탈을 따라 걸어 조양정(朝陽亭)에 올랐습니다. 여기 올라서니 왼편과 오른편 흐르는 물줄기와 이를 둘러싼 들판과 산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지없이 풍성하고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황강은 조양정 앞을 지나면서 왼쪽 옆구리로 남산천 시냇물을 받아들인 다음 읍내로 흘러듭니다.

두 물이 합해지면 땅은 셋으로 나뉩니다. 셋으로 나뉜 땅에는 저마다 봉우리가 하나씩 솟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삼산이수(三山二水)'라면서 풍광이 괜찮은 곳으로 꼽는 모양입니다.

내려와 조금 거닐고 있으려니 바로 버스가 옵니다. 웅양면에서 나오는 버스였답니다. 1050원으로 삯을 치르고 시각을 확인하니 오후 4시 51분이었습니다.

거창읍에서 임실 마을 가는 군내 버스는 오전 6시 30분 7시 7시 40분 8시 9시 5분 10시 20분 11시 30분 오후 12시 50분 1시 40분 3시 20분 4시 10분 4시 50분 5시 40분 6시 20분 7시 30분 이렇게 있어 적은 편이 아니랍니다.

도평리 봉황대 앞에서 탈 수 있는 버스는 이보다도 많답니다. 도평리 봉황대 앞은 임실마을 가려면 타야 하는 고제면 오가는 버스뿐만 아니라 웅양면이나 가북면 오가는 다른 노선 버스들도 모두 지나다니기 때문이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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