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하면 가장 먼저 섬진강이 떠오릅니다. 섬진강의 아름다움은 계절이 없습니다. 꽃이 피는 봄은 봄대로, 낙엽이 지는 가을은 가을대로 제 멋이 있습니다.

그래도 가장 붐빌 때는 역시 봄입니다. 전남 광양시 다압면에 매화가 필 때쯤이면 사람과 자동차로 북적이기 시작합니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십리벚꽃길이 꽃대궐을 이룰 즈음에는 북적거림이 절정을 이룹니다. 봄은 화사한 꽃잎과 더불어 사람 마음조차 붕붕 달뜨게 만드는 계절이랍니다.

여름으로 다가서는 5월 하순의 십리벚꽃길은 꽃으로 터널을 이루는 4월 초순과는 또다른 눈부심을 안겨줍니다. 4월의 눈부심은 꽃잎의 화려함 덕분이고 5월의 눈부심은 이파리의 푸름이 원인입니다. 파랗게 물이 뚝뚝 떨어져 온몸을 적실 것만 같습니다.

두 달 전 마음을 달뜨게 만들었던 꽃길이 이제는 시원한 나무 그늘에 푹 젖어 마음조차 싱그럽게 만듭니다. 이 좋은 길은 호젓하고 한적하기 그지 없어 어쩌면 쓸쓸하다 해도 될 정도였답니다. 봄날 그렇게 붐비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이가 들면 오히려 꽃이 더 좋아진다고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꽃은 금방 피었다 바로 지지만 잎은 그렇지 않고 한결 같습니다. 이에 더해 연두에서 신록으로 신록에서 녹음으로 녹음에서 단풍으로 색깔을 바꾸는 섬세함 또는 과감함까지 갖췄습니다.

사람 눈을 한꺼번에 확 잡아당기는 꽃의 현란함을 넘어서서, 튼실한 줄기에서 가지를 거쳐 솟아난 저 이파리들에 마음이 갈 때쯤이면 사람의 속내도 그만큼 깊어져 있지 않을까요.

쌍계사에서 화개장터로 이어지는 길은 심심하지 않습니다. 6km가량 되는 벚꽃길은 온통 그늘 터널입니다. 아스팔트 도로에는 이파리 사이로 스며 들어온 햇살이 하얗게 점점이 박혀 있습니다.


고개를 길 밖으로 돌리면 이제 명물이 된 녹차밭 풍경이 펼쳐집니다. 연록색 녹차 잎을 만나면 눈맛이 시원해집니다. 여기서 길러낸 녹차를 파는 분위기 좋은 찻집도 드문드문 마주칩니다. 조금 여유를 부리면 느긋하게 차 한 잔을 즐기는 기쁨도 누릴 수 있겠습니다.

약초로 유명해지는 바람에 이제는 일부러 사람들이 만들어 키우는 민들레 밭도 보입니다. 무엇보다 멋진 것은, 십리벚꽃길과 나란히 이어지는 화개천이랍니다.

화개천은 십리벚꽃길과 마치 오랫동안 사귀어온 길동무처럼 편안하게 어우러지다가 화개장터를 지나는 지점에서 헤어져 섬진강이랑 몸을 섞습니다. 화개천 건너로 보이는 집들도 여기 개천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워 보입지요.

아침 일찍 군내버스를 타고 들머리 정류장에서 내려 쌍계사에 올라가니 이른 시간임에도 찾아 온 이들과 드물지 않게 마주칩니다. 쌍계사는 칠불암과 더불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절간입니다. 신라 명필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가 있고, 구층석탑은 아름답고 마애불은 천진합니다.

아침에는 나한전 말고 모든 절집에서 우렁우렁 염불이 울려퍼집니다.


구층석탑 아래 아름드리 굵은 나무 두 그루는 드높이 솟은 키로 이 절간의 유서깊은 역사를 넌지시 일러줍니다. 그런데도 길어야 100년밖에 못 버티는 존재인 사람은 이렇게 1000년 안팎 세월을 겪은 나무 앞에서 경건하게 앞섶을 여미기는커녕 고개조차 숙일 줄 모른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쌍계사에서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불두화(佛頭花)입니다. 불두화는 이 시골 절간의 고즈넉함을 한결 더 정갈하게 만들어주는 구실을 합니다.

작은 꽃잎이 모여 봉오리를 이루는 불두화는 매달려 있을 때보다 떨어진 꽃잎이 더 아름답기도 합니다. 떨어져 수북하게 쌓인 꽃잎을 보면서 문득 사람도 그렇게 질 수만 있다면 두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쌍계사는 불두화가 한창입니다.

내려오는 길 끝에는 화개장터가 달려 있습니다. 화개장터는 가수 조영남 덕분에 유명해졌습니다. 노래를 듣고 그 이미지를 떠올리며 화개장터를 찾았다가는 실망하기 십상이지요.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만나서 어쩌구저쩌구 하는 화개장의 영화는 노래 속에만 남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시들어 사라지고 말았거든요.

이런 화개장이 지금은 관광을 위한 상설장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예전 같은 장터 풍경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람 북적거리는 맛은 새롭습니다.

규격으로 포장된 물건을 파는 사람들 가운데에 시골 할머니 한 분이 푸성귀 몇몇을 늘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앉아 있습니다. 맛나다고 이것저것 권하는데 별스레 살 거리가 없어 씩 웃었습니다. 장터 한 밥집에 들어가 먹은 음식도 여기 풍경처럼 맛이 펑퍼짐하고 밋밋합니다.

화개장터 대장간.


버스를 타고 오며가며 내다보는 차창 밖 풍경도 여기 벚나무 잎사귀만큼이나 풍성합니다. 2600원을 주고 하동 읍내에서 쌍계사 가는 길에는 경남 하동 쪽에서 바라보는 전남 광양 쪽 언덕배기와 들판이 잔잔하게 들어옵니다.

거꾸로 되짚어 화개에서 읍내로 돌아나오는 길은 2000원 차비에 전남 광양 쪽에서 경남 하동 쪽 언덕배기와 들판을 볼 수 있습니다. 뭉글뭉글한 나무숲이 모래톱과 어우러져 한 폭 그림보다 더 멋집니다. 600원을 덜 주고도 더 멋진 풍경을 누린 셈입니다.

꽃보다는 일렁이는 잎사귀에 마음 설렐 줄 아는 이들 하나도 망설이지 말고 걸어 보시라 권하고 싶을 만큼 낭만이 흐르는 사람길, 그리고 찻길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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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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