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이병철의 삼성과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김훤주 2011. 5. 1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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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라는 책이 제게 주어졌습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1857~1944)은 그때까지 제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제가 견문이 넓지 못한 탓입니다.

아이다는 미국의 여성 기자였습니다. 책의 부제 '어떻게 한 명의 저널리스트가 독점 재벌 스탠더드 오일을 쓰러뜨렸나'처럼 미국 석유황제 존 데이비드 록펠러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도한 활동을 초점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쨌거나 이 책을 올 1월에 다 읽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제게 보내주신 출판사 '생각비행'에서는 빨리 그럴듯한 소개글을 기대하셨겠지만, 저는 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책에 나와 있는 탐사 보도라든지 하는 내용이 지금 우리에게는 그다지 새삼스러운 내용이 아닌데다 다루고 있는 내용이 1900년대를 전후 미국이어서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그래서 책을 보내주신 데 대해 깜냥껏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부담만 지고 죽 지내왔습니다.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두 가지에 착안을 하게 됐습니다. 1900년대 미국에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 있었다면 우리나라 1900년대에는 과연 누가 있었는가를 떠올리게 된 것이 하나입니다.

그랬습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을 2000년대와 비교를 하니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보였던 것입니다. 100년 넘게 발전해온 언론과 언론 관련 학문과 언론 관련 기술의 역사를 무시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1900년대 조선과 비교하니까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의 특징과 장점이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1900년대 조선의 지식인과 언론인은 대부분 현실과 영합한 인물이거나 아니면 '우국지사'였습니다.

현실과 영합한 인물은 여기서 얘기할 필요도 없거니와, 우국지사들도 실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걱정만 하고 고민만 하면서 "아아, 이 일을 어찌할꼬?", 장탄식만 하고 지냈습니다.

말로만 실사구시와 격물치지를 했지 스스로 사실을 찾아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논설이나 평론이 주를 이루었으며 다른 보도들은 '~하얏다더라' 하는 식으로 자기가 몸소 확인한 팩트보다는 남에게서 전해 들은 내용이 많았습니다.

물론 일제 강점 아래 또는 조선 왕조의 지배 아래라는 점에서 외부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를 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우리나라 언론과 언론인들은 주장만 했지 그 기반이 되는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점검하는 활동은 거의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앙 집권이라든지 오랜 왕조 통치를 받아와 민주주의나 자유의 개념이 거의 없었다는 시대와 공간의 한계도 있어 왔겠지만, 이 같은 우리 언론 환경과 관행은 지금도 크게 보면 거의 달라진 것이 없지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 1900년대에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을 상대로 이룬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제껏 탐사보도 형태로 저술된 책 가운데 단연코 으뜸…… 1904년에 출간된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 The History of the Standard Oil Company>"(4쪽)라는 말은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에서 몇몇 대목을 인용해 봤습니다. 그러면 대강을 짐작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의 모습도 스탠더드 오일과 록펠러의 모습도 그리고 당대 사람들의 생각도 대충 떠올릴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 언론의 역사랑 견주면 실상을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도 들었지요. 우리나라 자본주의를 두고 학자들 가운데서는 무슨 '천민'자본주의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본의 속성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에 무슨 '천민성'이 있다면, 그것을 발현되지 못하도록 막을 힘이 없으면 어느 나라에서든 그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타벨은 이런 사람이었다

타벨을 유명하게 만든 책,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는 잡지에 실린 연재 기사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 책은 '추문 폭로 muckracking'로 알려진 새로운 형태의 저널리즘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타벨은 수많은 저널리스트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한 세기 전의 글이지만 타벨이 쓴 기사는 저널리스트 혼자서도 범법 행위를 밝혀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표본이다.(5~6쪽)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 여든 해 이상을 살았던 타벨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동인은 하나로 정리할 수 있다. 정치·경제·사회 문제에 대한 진실을 찾아내고 널리 알리려고 하는 열정이다. 타벨은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이야말로 진실에 좀 더 가까이 가는 길이라고 믿었다.(11쪽)

타벨이 부딪힌 최대의 난관은 자신의 성별이나 록펠러의 대응이 아니었다. 늘 그랬듯 타벨은 자신의 기사 작성 방식에 대해 고민했다. 스탠더드 오일과 록펠러의 실체를 다루는 조사는 주로 문서로 이루어졌다. 타벨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수백 장 아니, 수천 장의 문서를 낱낱이 조사한 다음, 회사 경영진과 경쟁업체 사람, 기업 규제 담당 공무원, 과거와 현재의 학술 전문가를 일일이 만나고 인터뷰해서 알아낸 사실을 기술했다. 다시 말해서 타벨은 오늘날 탐사보도라고 일컫는 기사 작성 방식을 1900년에 고안했다. 이 덕분에 완젹히 새로운 형태의 저널리즘이 등장했다.(12쪽)

타벨은 어느 날 물에 가라앉는 물체가 있는 반면 뜨는 물체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 남동생은 어떨지 무척 궁금했다. 만일 옷을 입은 상태에서 물에 띄우면 어떨까도 궁금했다. 반드시 알아내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아무도 감시하지 않는 틈에 동생을 집 근처 다리로 데려가 개울에서 떠밀었다. 다행스럽게도 옷자락이 쫙 펼쳐졌기 때문에 윌은 한동안 물에 떠있었다. 그 사이에 동생의 비명을 들은 근처의 인부가 달려와 구해주었다. 아마 나는 그날 매를 맞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혼이 났는지는 기억이 없고, 궁금증을 해소했을 때으ㅟ 평화로운 기분만 남아 있다. 나는 남동생을 뜨는 물체로 분류했다."(100~101쪽)

책 331쪽에 나오는 타벨. 오른쪽에서 두 번째.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칭찬은 상식이 통하는 여자라는 말이다."(184쪽)

타벨의 이름으로 나온 첫 번째 기사는 '신시내티의 산업과 기술'이라는 제목의 글로 1886년 <셔토퀸> 12월호에 실렸다. …… 아주 세밀한 부분을 잘 기술하는 타벨의 성향이 이때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이전에도 많은 기자가 "공적 사업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고 있다"는 식의 글을 썼지만 공연장이나 박물관, 예술 학교에 실제로 어느 정도의 금액이 기부되었는지를 타벨만큼 구체적인 내용을 밝혀 기사로 작성한 예는 많지 않았다. 타벨의 기사 중에서도 가장 생생한 부분은 직접 관찰한 사실에 대한 묘사였다. 박람회장을 방문한 타벨은 그곳이 얼마나 "시험에 들게 하는 장소였는지"에 대해 평했다. "술을 절제하는 이들이 박람회장에서 처음 맞닥뜨리는 곳이 맥주 용기 전시장이라는 점은 시험에 빠질 만한 상황이었으며 …… 전시회장 외부에 설치된 단 하나의 광고판이 맥주 광고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소름이 끼쳤다. 맥주와 맥주 용기를 만드는 사업은 분명히 이 도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산업 중 하나이며, 경영자들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기로 유명한 이들이니 박람회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성공적으로 확보했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185~186쪽)

냉소적인 감정이 드러나는 한 편지에서 타벨은 "같은 이익을 공유하는 일단의 족벌이 생겨날 것이다. 굴, 올리브, 가금家禽 계통 같이 통제권이 있는 분야에 따라 다양할 수 있으나 재산, 정책, 특권은 세습된다. 영원토록 재산을 축적해가는 이 나라는 적어도 문장학紋章學(문장紋章의 기원, 구성, 구도, 색채의 상징 등을 연구해 주로 중세 사회·문화사를 해명하는 학문)적인 면에서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아연 계통의 족벌이라고 하면 스미스 1세, 2세, 3세처럼 대대로 이어질 테니까 말이다."(188~189쪽)

타벨은 감상주의적인 선택을 지양하고 구체적인 증거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렸다. 록펠러는 직원들에게 거래 원장을 세밀하게 기록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다양한 자료를 종합하고 신중히 분석한 다음 사업적 결정을 내렸다. 타벨 또한 이와 비슷한 접근 방식을 보였다. 타벨은 정부 부처나 기업의 서류를 조사하고 인터뷰한 다음 기사를 작성함으로써 글에 힘을 부여했다. 타벨과 록펠러 두 사람은 평생토록 자신의 직업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사실과 자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 예측을 중시하는 산업혁명 이후의 풍조와도 닿아 있었다.(190쪽)

타벨은 좋은 언론인이 되려면 여러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글재주가 있으면 좋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 화려한 생활에 대한 오해는 금물이며, 지루하고 고된 기간을 지나면서도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고, 많은 업무량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다양한 재능과 능력, 체력, 그칠 줄 모르는 호기심, 논리, 믿을 만한 성품, 정보와 문장을 정확하게 다루는 일에 대한 헌신도 필요한 자질에 해당한다.(197쪽)

1880년대가 끝나갈 무렵, 타벨은 잡지사에서 보내는 시간을 못 견뎌하는 자신과 싸우면서 언론인으로 독립하는 모험을 감행해도 좋을지를 고민했다.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타인의 필요를 채워주기보다 자기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는 편이 낫다는 아버지의 철학이 떠올랐다. "<셔토퀸>에서 일하는 동안 누리던 안정감에 저항하는 나 자신을 보며 아버지의 철학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피고용인이었으니까 말이다."(198쪽)

타벨은 소르본느 대학에서 첫 학기에 정치경제학, 프랑스혁명사, 18세기 문학, 회화사를 수강했다. 이러한 과목을 들으면서 알게 된 구체적인 정보를 통해 타벨의 지식 기반은 비약적으로 넓어지고 깊어졌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런 공부를 하는 동안 타벨이 프랑스 최고의 역사가들이 개발한 방법론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타벨은 역사적 기록에서 빠진 부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한편, 모순되는 증거를 비교하고 검토하는 기법도 익혔다. 타벨은 점차 자료를 철저하게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프랑스 역사가들은 타벨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덕분에 타벨은 글을 쓸 때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형식을 갖추고 신뢰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다른 대학은 이처럼 이해하기 쉽게 글 쓰는 방범을 가르치지 않았다. 타벨은 파리에 머물며 서사 논픽션 작가로서 갖춰야 할 가장 강력한 수단을 서서히 마련하고 있었다.(222쪽)

스탠더드 오일과 록펠러 또는 미국의 어떤 기업도 타벨과 같은 저널리스트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타벨은 어린 시절을 유전 지역 주변에서 뛰어놀며 열정을 키웠고, 록펠러가 거부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인지 밝혀내려는 지적 호기심이 있었으며, 권력에 도전하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았다.(350쪽)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의 실체는 이랬다

록펠러는 전쟁에 나가 남자다움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유혹도 잘 참아냈다. 남북전쟁이 클리블랜드에서는 사업상 호기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록펠러는 기꺼이 참전해 희생 제물이 되지 않은 일에 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십대 초반의 건장한 미혼 남성이자 노예제 폐지론자로서 마땅히 참전했애 할 사람 중 하나였다. 록펠러는 아마 다른 사람들이 건네는, 그리고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질문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클리블랜드에 남아 사세를 확장하고 재산을 늘려간 사실을 록펠러는 과연 어떻게 정당화했을까?

증거가 충분치는 않지만 록펠러다운 선택은 도덕적으로 애매한 부분이 있긴 해도 법적으로 정당하고 쉬운 방법인 전쟁 지원금을 내는 일이었다. 록펠러는 어머니와 어머니를 위해 직접 지은 집, 미덥지 않은 아버지, 형제자매, 동업자와 고객, 청혼할 여인을 남겨둔 채 전장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록펠러는 참전 대체 비용으로 300달러를 냈다. 북군의 모병을 돕기 위해 추가 지원금도 냈다. 그는 동생 프랭클린을 위해 전쟁 지원금을 마련했지만 프랭클린은 나이까지 속여 가며 북군에 지원했다.(78쪽)

책 369쪽에 나오는 록펠러의 모습.


록펠러는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석유의 잠재력을 그동안 평가절하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특유의 혜안을 발휘해 결단을 내렸다. 매력적인 석유 채굴 사업에 뛰어들어 부자의 대열에 서둘러 진입하기보다 중개상에 해당하는 정유 사업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78~79쪽)

스탠더드 오일을 폭로하는 제2권의 한 장에서 소비자들이 "록펠러를 향해 미신적인 경외감"을 보이는 경향을 다뤘다. "록펠러에 대한 소비자들의 생각은 19세기 초반 영국 사람들이 나폴레옹을 향해 품었던 생각과 똑같다. 오늘날에도 브르타뉴 농부들은 나폴레옹이 가공할 힘과 잔인한 셩격을 지녔고, 모르는 것 하나 없이 박식하며 언제나 뛰어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위인이라고 생각한다."(370쪽)

타벨은 유명 인사의 성격을 파악하는 방식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록펠러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 록펠러가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의 엄청난 재산과 권력을 흠모하기 때문이고, 또한 사람들에게 사장 보편적이고 강력한 열정, 즉 '돈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타벨은 그 뒤틀린 매력을 이해했다. "혈기왕성한 청년들은 곧잘 이렇게 질문한다. '록펠러는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재산을 모았을까?' 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최대한 록펠러를 똑같이 모방하려고 애쓴다. 이제 록펠러는 미국의 이상을 구현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썼던 방법은 국가적인 상업 규범으로 격상되기까지 했다."(373쪽)

록펠러에게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마저 그에게 기부금을 받으려고 부정적 감정을 억눌렀다. 타벨은 이렇게 설명했다. "전국의 훌륭한 교육 기관, 자선 기관, 종교 기관을 책임지는 사람들이이렇게 묻는다. '우리도 록펠러에게 뭔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록펠러의 지원을 받으면 그의 입장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370쪽)

매클루어(<매클루어 매거진>의 주인) (타벨이) 록펠러를 파헤친 기사에서 종교 활동과 자선 기부를 다룬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록펠러는 강력한 상업적인 시스템을 설립해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인 동시에 기독교 교육과 자선, 그리고 교회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하다. 록펠러는 기부금을 경영대학원을 위한 변명거리로 사용하고 있다." 매클루어와 타벨은 "사람이 평생토록 한 모든 일은 서로 연결된다"고 굳게 믿었다. "그 일들은 분리될 수 없다. 록펠러의 사업 규범과 록펠러의 종교 규범 사이에는 밀접하고 복잡한 관계가 있다."(372쪽)

"록펠러는 소득의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이 복을 내린다는 근거로 기부금을 냈다. 그러나 절대로 10퍼센트 이상을 기부한 적이 없었다. 소득 중 몇 퍼센트를 기부하려고 작정했던지 간에 말이다. …… 록펠러에게 기부는 아무리 힘들어도 해야 하는 의무였다." 타벨은 록펠러가 사후 세계의 구원을 돈으로 사려 했다고 보았다. "록펠러는 이렇게 확신했다. '헌금함에 돈을 넣으면, 그보다 더 큰 구원의 상금을 얻을 것이다!'"(374~375쪽)

타벨은 록펠러가 부정한 방법으로 끌어모은 돈을 불쌍한 사람을 돕는 자선단체에 조금씩 나눠주는 대신에 공정하게 사업해서 돈을 벌었다면 사회에 더 크게 공헌했으리라고 생각했다. "록펠러가 고백하는 종교의 원리는 록펠러가 수행하는 사업의 원리와는 상극이다. 그런데 세상은 록펠러의 커다란 영향력 아래에 있다. 록펠러으 방식을 따라 한다면 결국 그의 위선과 냉소마저 닮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단언했다. "록펠러의 위선 때문에 교회와 많은 사람까지도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그들이 엄청난 기부금을 주는 록펠러에게 비굴하게 굽실거린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375쪽)

록펠러는 자신을 폭로한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뒤에도 침묵을 지켰다. 이에 타벨은 매우 놀랐다. "나는 록펠러 씨에게 답변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입수한 내용은 그가 직접 한 대답도 아니었고, 썩 진지한 대답도 아니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했을 뿐 아니라 익명으로 쓴 여러 가지 비판적인 글을 값비싼 비용을 들여서 배포한 게 틀림없었다."
록펠러를 폭로한 인물 탐구 기사가 책으로 나온 뒤에 스탠더드 오일은 홍보 이사를 고용했다. 조지프 I. C. 클라크는 전직 <뉴욕 시티> 신문사 편집장으로 미국 기업에 홍보와 관련해서 고용된 최초의 인물이었다. 클라크는 기자들을 구워삶아서 록펠러를 만나게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이미지를 매력적인 노신사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특히 클라크는 사랑스러운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록펠러를 드러내고자 했다.(380~381쪽)

타벨의 기록이 끼친 영향들

당대에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가 불러일으킨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많은 인물과 기업에 대한 기존 위상이 실추되거나 높아졌으며, 공공 정책이 변화되었고 국가의 모습이 바뀌기도 했다.(4~5쪽)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로 대변되는 대립 구도는 미국에서 가장 눈에 띄는 탐사보도 기자와 미국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사업가의 경쟁으로 이 역사적인 시기의 한 부분을 장식한다. 이 탐사보도 기자는 <매클루어 매거진 McClure's Magazine> 전속작가였던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Ida Minerva Tarbell이라는 여성이었다.(5쪽)

타벨이 록펠러를 폭로하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그를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대중에게 록펠러는 이상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였으며, 할아버지였다. 또한 "말없이 교회에 다니는 온화한 신사로 주일학교 소풍에 참석하고 골프와 마차에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 직업 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하는 일이 가능한 한 많은 돈을 기부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타벨 또한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칭찬할 만하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타벨은 의문도 제기했다. "그런 선한 이미지에서 어떻게 사업계에서 드러나는 록펠러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록펠러는 사업을 한 때면 가면을 쓰고 무력으로 지배하며 언제나 돈을 숨겨둘 장소를 주시한다. 또한 많은 돈을 벌어들일 궁리를 하고 심지어 은밀한 친구들에게서도 돈을 쥐어짜낼 계획을 세운다. 그는 절대로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멈추는 법도 없고 만족하는 법도 없다. 다정다감한 록펠러란 이미지는 대중을 당혹스럽게 하는 진면목을 감추려는 포장일까? 록펠러는 자신이 얼마나 겸손하고 기부를 많이 하며 헌신적인지를 말할 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하던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어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어두운 모습을 보고서 주저하며 침묵을 지키리라는 점을 알고 있을까?"(377~378쪽)

타벨은 록펠러의 이중인격을 이해하려면 "과정이 결과를 정당화한다"는 금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아무리 예리한 심리학자라도 록펠러의 이중성을 보면 '당황할' 만큼 심각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록펠러의 영혼이 "배 안에 밀폐된 객실처럼 분리"되어 있다는 설명도 타당하다고 보았다. "객실 중 한 칸은 사업용으로 쓰고, 한 칸은 종교와 자선용으로 쓰고, 한 칸은 단순한 생활용으로 쓰며, 또 한 칸을 무슨 용도로 쓰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쨌든 여러 칸의 객실 사이에는 문이 없다. …… 이것은 다소 희한한 설명이지만 맞는 구석도 있다."(378~379쪽)

타벨은 록펠러의 활동으로 나타난 결과를 '불편하다'고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록펠러는 "개인이 자유롭게 발전하는 일을 이 나라에서 어떤 사람보다도 심각하게 저해했다. 오늘날까지도 온 나라가 신음하고, 그 여파를 없애려고 버둥대고 있다. 그렇지만 문제가 너무 절묘하고 너무 깊이 자리잡고 있어서 혁명이라는 방법을 제외하고 다른 처방으로는 치료할 수 없을 것만 같다." 타벨의 증언에 따르면 "록펠러는 사업계에 혐오스러운 인간들이 판을 치는 스파이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제 사업을 평화롭게 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사업장은 전쟁터로 변해버렸고, 잔인하고 부정직한 방식이 횡행하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명예로운 경쟁은 사라지고 살인적인 투쟁이 난무하고 있다."(379쪽)

론 처노가 말했듯이, 록펠러는 공식적으로 타벨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록펠러가 타벨의 주장을 반박하려면 수많은 다른 진실을 먼저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간혹 보이는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진실을 말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했던 것이다." 또다른 록펠러 전기작가인 아벨은 이렇게 썼다. "록펠러가 책으로 정복당했다는 사실은 무척 역설적이다. 그는 고등교육을 권장하고 후원하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책 읽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펜이 전능한 돈보다도 더욱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록펠러는 아마도 굉장히 놀랐을 것이다."(382~383쪽)

법제도도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탓에 기업이 법을 위반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느 록펠러와 같은 기업 중역들을 징벌할 수 없었다. 회사 본사와 법원 사이에 벌어지는 재판과 무관하게 트러스트는 풍부한 자본을 이용해 전략을 구사했다. 정치 운동에 기부금을 냈고, 트러스트에서 급여를 제공하는 정치인들을 요직에 앉혔으며, 일시적으로 제품의 가격을 낮춰서 소비자의 원성이 잦아들게 했다. 그리고 반트러스트 조치를 취하려는 위협이 없어지지 않을 때 회사를 닫는다고 협박하거나 고용 인원을 감축하기도 했다. (399~400쪽)

트러스트에 관한 논란이 한참 지속되고 난 다음, 1911년이 되어서야 대법원 판사가 입을 열었다. …… 대법원장인 에드워드 화이트Edward White는 재판석에 앉아서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었다. 스탠더드 오일이 자회사들을 전부 매각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판결로 말미암아 사실상 트러스트의 존재는 없어지고, 트러스트의 유사 독점 활동은 끝장나 버렸다.

대법원장은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심 없는 마음으로 심리를 진행한다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탠더드 오일은 처음부터 회사를 조직하고, 성장시키며 이익을 내는 데 매우 천재적인 능력을 보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이익을 독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기 시작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평범한 방법으로 기업의 발전을 도모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와 전혀 다른 방향의 기업 활동과 거래를 통해서 석유산업 전체를 지배하려고 했다. 석유산업 분야에서 다른 사람들을 내쫓고, 교역하는 권리를 빼앗는 방식으로 석유시장을 지배했다."

존 마셜 할란John Marshall Harlan 대법관은 판결이 난 지 다섯 달 뒤에 죽었다. 할란은 판결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다수 대법관의 견해에는 스탠더드 오일이 계속해서 고약한 영업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허점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890년 초에 할란은 동료 대법관들에게 시민이 "인종이나 식민지와 상관없는 형태의 노예 제도에 연루된 불안을 깊이 경험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할란은 이러한 종류의 노예제도를 "생활 필수품의 제작과 판매를 비롯해 미국의 모든 산업이 몇몇 사람과 몇몇 기업의 독점적인 이익과 이득을 챙겨주고 자본을 축적하게 만드는 노예제도"라고 명명했다. 이로써 광범위한 반트러스트 법안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할란은 법안이 제기한 위험성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407~408쪽)

록펠러와 그의 동료는 대법원이 내린 판결의 상당 부분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판결을 이행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 이전에 기업을 재편성했다는 말은 사실상 엉터리였던 셈이다. 정부 기관의 기소 혹은 경쟁자와 투자자들의 민사소송을 피하기 위한 겉치레에 불과했다. 판결 전에 가장 큰 회사였던 뉴저지의 스탠더드 오일은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엑손Exxon이라는 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뉴욕의 스탠더드 오일은 모빌Mobil로, 오하이오의 스탠더드 오일은 소하이오Sohio로 회사명을 변경했고, 나머지 회사들도 이름만 바꾸었다. 각 자회사들의 경영권은 해체되었지만, 서로 자리 잡은 시장을 지키고 다른 회사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방식으로 직접적인 경쟁을 피했다.(409쪽)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물론 타벨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삼성과 이병철과 이건희가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삼성과 이병철과 이건희의 악행 또는 선행은 이미 한 세기 전에 미국에서 스탠더드 오일과 록펠러가 선취(先取)한 것들이었다.'

어쨌거나 저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는 될 수 없을지라도 스테디 셀러는 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란답니다.

김훤주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 10점
스티브 와인버그 지음, 신윤주.이호은 옮김/생각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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