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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 타고 즐기기 : 남강변(한실~중촌)

김훤주 2011. 2. 21.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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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반도병원 앞에서 77번 시내버스를 2월 9일 오전 9시 45분에 탔습니다. 이 버스는 9시 35분에 기점 이현동을 출발했을 것입니다. 대곡면 소재지는 10시 22분에 지났고 종점인 한실에는 10시 36분 떨어졌습니다.

남강변을 걷습니다. 남강변을 골라잡은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낙동강 아닌 남강에도 있을 것은 죄다 있습니다. 절벽도 모래톱도 있고 철새도 갈대도 있고 왕버들 소나무 대나무 따위도 모두 있습니다.

다만 작을 뿐이랍니다. 낙동강은 본류고 남강은 지류니까 당연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낙동강은 이른바 4대강 살리기 공사판이 돼 버린지 오래입니다.

24.5t 적재정량을 넘긴 덤프화물차는 규정 속도조차 어긴 채 달려야 하고, 밤새도록 작업하던 준설선은 기우뚱 침몰해 끄집어낸다고 야단입니다.

곳곳에 골재 적치장이 널렸고 모래 퍼내는 현장에는 굴착기 소리가 요란합니다. 바람이 세면 아프리카나 몽골에서나 볼 수 있다는 모래바람까지 잔뜩 일어납니다.

한 마디로, 낙동강이 자연을 빼앗긴 채 인공으로 덧칠되고 있습니다. 물과 땅과 풀과 나무와 철새와 들짐승과 사람이 한 데 어울려 있던 그런 장소가 이미 아닌 것입니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의 한시가 생각납니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쓴 글을 한글로 옮긴 책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 나옵니다. 제목은 '억선형(憶先兄)', 우리말로는 '세상 떠난 형을 생각한다'쯤이 되겠습니다.

"我兄顔髮曾誰似(아형안발증수사) 우리 형 얼굴은 누구를 닮았을까?
每憶先君看我兄(매억선군간아형)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날 때면 형 얼굴을 보았네.
今日思兄何處見(금일사형하처견) 이제 형 생각나면 어디 가서 봐야 하나?
自將巾袂映溪行(자장견몌영계행) 내 모습 비춰보러 시냇가로 걸어가네."

마지막 巾袂는 머리를 동여매는 두건과 윗도리에 붙어 있는 소매를 뜻하니까, 뜻으로 봐서는 '모습'으로 옮기면 알맞겠지 싶습니다.

어쨌거나 세상 떠난 아버지가 생각나면 형을 보며 그리움을 식혔는데 형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시내에 비친 자기 모습 보며 형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는 내용입니다.

걷기 시작한 한실 마을 들머리 풍경.


딱 그 꼴입니다. 낙동강이 제 모습을 잃었으니 옛날 낙동강을 보고프면 남강 같은 지류를 눈에 담을 수밖에 없습니다. 낙동강과 남강을 부모-자식 관계라 할 수는 없지만 말을 하자면 그렇습니다.

물론 남강과 남강변은 그 자체로 값어치가 있을 뿐 망가지기 전 낙동강과 낙동강변에 대한 기억을 위한 존재는 절대 아닙니다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좀 쓸쓸한 까닭이 있습니다.

한실~마진~중촌으로 이어지는 남강변은 반달의 곡선처럼 휘어진 채 거슬러 오르는 길이랍니다. 낙동강보다는 크기가 작은데 그래도 그보다는 손타지 않은 순정함에 눈길이 더 갔습니다.

한실 버스 종점에서 마을로 들지 않고 나오다 왼쪽 밭두렁을 타고 둑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예서부터 내쳐 걸었는데 첫머리에서는 독수리 20마리남짓을 제대로 눈에 담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독수리가 그냥 보기는 좋으나 카메라에 제대로 담기는 어려운 줄 이번에 알았습니다. 잘 찍어보려고 애쓰다가 그냥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다른 일을 놓칠까 싶어서지요.

(관련 글 : 경남에 전체 독수리의 절반이 몰리는 까닭http://2kim.idomin.com/1850)


뒤이어 걷는 걸음은 마음대로 놀렸습니다. 멀리서 보는 풍경이 좋겠다 싶으면 둑길을 계속 따라가고 가까이서 자세히 보고 싶으면 모래밭으로 들어가 강물을 곁에 두고 걸었습니다.

벼랑과 소나무와 대숲과 버들과 갈대와 모래톱과 개울이 어우러져 있는 남강.


지나치며 보는 농토에서는 벼나 보리 같은 단일 작물을 짓지는 않았습니다. 잔디도 삼도 하고 시금치나 또 나무를 심어 기르기도 했습니다. 채소 따위는 돌아가며 기르겠지만 어디서는 객토를 하느라 땅을 뒤집어놓기도 했습니다.

이랑 낮은 데는 시금치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랑 높은 데는 무엇을 심을지 궁금했습니다.


청둥오리 같은 철새가 놀라 푸드득 날아오르고 철새들 노닌 발자국이 쏟아지는 데서는 녀석들 삶터에 괜히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도 살짝 들었으나 실은 즐거움이 더했습지요.


강물 따라 걷는 즐거움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풍경이 병풍처럼 잇따라 펼쳐진다는 데 있습니다. 같은 벼랑도 햇볕이 드느냐 마느냐에 따라 색깔도 느낌도 다릅니다.

같은 대숲이고 같은 소나무지만 앞에 강물이 놓이느냐 마느냐에 따라 정감이 다르고 강물이 햇살을 튕겨내는 정도가 어떻느냐에 따라서도 그 맛은 달라진답니다.

강가 둔치 사람들 농사 지은 흔적에서도 느낌이 있었습니다. 수수가 서 있는 채로 팽개쳐진 곳을 지났는데 왜 거두지 않았을까 그 까닭까지 알아채지는 못했습니다.

넘쳐흐른 강물에 농사지은 것들이 쓸려나간 자취도 이따금 있었습니다. 그런 데서는 사람들 종종걸음이나 안간힘 같은 마음씀이 느껴졌습니다.

불어난 강물에 무엇인가 쓸려나간 자취.


마진마을에는 일부러 한 번 들어가 봤습니다. 거기에 마을이 고즈넉한 실체가 있었습니다. 살지 않는 집이 꽤 많았지요.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마을 3분의1은 재실 3분의1은 빈집 나머지 3분의1은 어르신이 혼자 또는 둘이 사는 집이었습니다. 아니면 이런저런 공사를 벌이는 현장이었고요…….

마진 마을 한 건물 담벼락. 담쟁이넝쿨이 우거지면 대단하겠다 싶었습니다.


덕곡 마을 못 미쳐 1007호 지방도가 남강을 가로지르는 어귀 풍경이 멋졌습니다. 남강을 향해 서서 햇볕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한참을 눈에 담았습니다.


제대로 자란 모래톱이 하얗게 일었고 그 위에 봄여름 되면 무성하게 자라날 풀과 나무가 있었습니다. 양쪽 언덕에는 벼랑과 모래밭도 조건에 맞게 꾸려져 있었습니다.

낙동강 본류서는 이미 망가지고 사라진 풍경이라 눈길이 절로 한 번 더 갔습니다. 어쩌면 이런 마음씀이 아주 얄팍한 수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덕곡 마을 들머리에 이르니 낮 1시 15분 어름. 한실마을에서 길을 나선 지 2시간 30분가량만이었습니다. 여기 멈출까 하다 계속 발길을 놀려 대곡천을 걸었습니다.

30분남짓 걸으니 중촌마을이 나왔습니다. 별나게도 코끼리가 지키고 있는 새로 지은 마을회관 옆에 반갑게 '점빵'이 있었습니다. 이 점빵이 없었으면 앞에 지나쳐온 '덕신가든'이 무척 아쉬울 뻔했습니다.

코끼리 두 마리가 지키는 중촌회관(위쪽)과 그 마을 들머리 점빵 모습.


점빵에 들러 컵라면과 과자와 소주를 주문했습니다. 주인 할머니가 김치를 한 보시 내왔는데 맛이 좋았습니다. 50대로 젊어보였는데 나중에 중3 올라가는 손자가 있다고 해서 할머니인 줄 알았답니다.

할머니는 돈을 더 쳐 주는 손길을 마다했습니다. 컵라면 1000원, 과자 900원, 소주 1500원말고는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김치값이라도 내겠다 했더니 "시골 인심에 김치값은 무슨……", 이랬습니다.

바로 이 점빵 덕분에 걸으면서 누리는 보람이 더욱 커졌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앞서 덕곡마을 들머리에 있는 식당 '덕신가든'도 새겨둘만하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길손도 드문 이런 구석에 무슨 장사가 되겠느냐 여기기 십상이지만, 요즘은 점심이나 새참을 비닐하우스로 실어나르는 데가 이런 가든이고 또 어지간한 음식과 술은 종류대로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든이나 점빵에서 주린 속은 밥으로 다스리고 시린 속은 술로 어르면서 좀 노닥거리다가 한실에서 2시 15분 출발하는 77번 시내버스를 받아 타고 진주시내로 돌아나오면 안성맞춤이겠다 싶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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