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대나무
대나무를 보면 먼저 장독대가 떠오릅니다. 아버지 태어나시고 할아버지 태어나시고 어머니 시집오시고 할머니 시집오셨던 옛날 시골 우리집이 그랬거든요. 진해 소사동 시인 김달진 생가.
마을 뒤 언덕배기 가장 높은 데 자리잡고 있던 우리집은 뒤에 병풍처럼 대숲이 우거져 있고 그 바로 앞에 장독대가 있었습니다. 장독대랑 부엌은 또 붙어 있엇지요.
장독대에서 우리 어머니는 눈물 꽤나 흘렸을 것입니다. 시집살이가 만만치 않았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밥을 짓거나 불을 때면서도 많이 울었다고 생전에 어머니가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겨울에 더 많이 울었을 것 같습니다. 겨울 바람에 어울려 여느 때보다 더 크게 내는 대숲 소리가 어머니 울대를 타고 나오는 울음을 감춰줬을 테니까요.
대숲에 들어가 한 번 앉거나 누워 보신 적 있나요? 어떤 이는 대밭에 뱀이 많아 그렇게 할 수 없다고도 하시지만 저는 대밭에 가 앉거나 누워 본 기억이 많습니다. 우수수 쓸리는 대숲 바람 소리는 시원함을 더해준답니다.
시원함을 안겨주는 대밭에는 위안이 있었습니다. 대밭에 홀로 들어가 쪼그려 앉거나 엎드리거나 드러눕고 싶을 때는 대부분 기분이 울적할 경우였습니다.
어머니한테 야단을 맞거나 친구들하고 딱지치기를 했다가 다 잃었다거나 하는 때입지요. 그래서 대숲에 들어가 멍하니 있거나 눈물 몇 방울 떨구고 나면 기분이 풀어지곤 했습니다.
대나무를 보면 마당이 생각납니다. 우리집은 대나무로 비를 만들어 썼습니다. 아침저녁 저는 너른 마당 비질을 했습니다. 마당을 억센 대 비로 쓸고 나면, 저녁 무렵 햇살이 내려앉으며 비질 무늬를 곱게 새겨주곤 했습니다.
마당에서는 갖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보리나 나락 타작도 하고 도리깨질도 했습니다. 닭들이 구구구 돌아다녔습니다. 제가 사랑방 아궁이에서 곱게 새겨진 비질 무늬를 마주하면서 볕바라기를 한 것은 그 일부였지요.
마찬가지 어릴 적 일인데요, 간밤에 눈이 엄청나게 내렸는데 아침에 보니 대숲이 온통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습니다. 밤새 내린 눈을 뒤집어쓰고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대나무가 갈라지며 내려앉는 소리였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그 눈은 대나무에 잎이 없었으면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나무야 천성대로 그리 살 뿐이지만, 사람 생각을 이입(移入)해 보면, 잎을 못 버리는 욕심 때문에 생고생 한다고 여길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대나무를 사람들은 어떻게 여길까?
대나무를 보면 길이 떠오릅니다. 우리집 대숲 뒤에는 가느다란 오솔길이 있었습니다. 자주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 길을 타고 진골 고개를 넘어 20분 남짓 걸어가 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가곤 했습니다.
이런 실감 말고도, '선비의 길'이랄까 하는 것도 있습니다. '대쪽 같은 성품' 이런 것도 있고요, 대나무까지 쳐서 '매난국죽(竹)' 해서 사군자라 이르는 데서도 짐작이 됩니다.
대나무처럼 곧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지고 꺾일지라도 옳지 않은 일에는 굽히면 안 된다는, 자기는 못하고 어쩌면 그리하는 사람을 멍텅구리 정도로 여기면서 그냥 입에 발린 칭찬할 때 써먹는 그런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곧게 사는 것이 정녕 옳고 좋은 일일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 아니 그 전에 곧게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대나무처럼 사는 것이 정녕 곧은 삶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곧게 산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면 맞을까요? 낱낱이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고 옳지 않은 구석이 털끝만큼이라도 있으면 절대 가담하지 않는 것이 곧은 것이라면 저는 곧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만. ^^
사람들은 또 대나무를 보면 청빈이랄까 청렴결백 따위가 생각난다고 합니다. 겉이 푸르니까 깨끗하고(淸), 속이 비어 있으니까 가난하다(貧)는 것입니다. 욕심부리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대나무는 독선적인 욕심꾸리기다
저는 사람들이 보는 그렇게 좋게 여기는 식으로 말고 다르게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나무가 사는 데는 다른 것들이 잘 살지 못합니다.
대숲이 우거진 데서 같이 자랄 수 있는 것이 엄나무정도뿐이라고 저는 압니다. 엄나무는 그늘진 데서도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나무는 높이 솟아올라 햇볕을 독점합니다. 대나무가 또 무슨 독성 물질(이를테면 피톤치드라고 통칭되는)을 뿜어내는지는 몰라도 무성하게 떨구는 이파리 때문에라도 아래서는 다른 싹이 잘 트지를 못합니다.
대숲에서는 다른 것들이 자라지 못합니다.
대나무를 보면 저는 사기꾼이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무슨 엄청난 사기꾼은 존재는 아니고요. 별다른 밑천도 없으면서 쪼잔한 사기만 치고 다니는 그런 불쌍한 존재쯤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대나무는 사실 풀인데도 나무라 합니다. 허명입니다. 그리고 대나무는 아무리 굵어도 속은 비었습니다. 허장성세입니다. 허장성세는 또 있습니다. 마디마디마다 성가실 정도로 가지를 내어뻗습니다.
이렇게 허명을 내고 허장성세를 해도 결과를 놓고 볼 때 대나무는 얻는 것이 없습니다. 겨우 세상 사람들로부터 가탁(假託)을 받아 곧음이라거나 맑음이라거나 하는 헛이름을 얻었을 뿐입니다.
대나무는 죽어서도 동반을 한다
대나무를 보면 저는 동반(同伴)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지금은 많은 부분 플라스틱이나 철재로 바뀌었지만 옛날 농사에서는 대를 쪄서 많이 써 먹었습니다.
대표 삼아 말하자면, 고추나 가지 같은 것을 기를 때 대나무 찐 잔 가지를 지줏대로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이 가지나 고추가 잎이 무성할 때는 '동반'이라는 느낌을 못 받는데 겨울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겨울 들판, 잎을 다 지우고 아무것도 매달지 않은 채로 서 있는 고추를 봅니다. 줄지어 서 있는데, 바로 옆에는 조그만 노끈으로 헐겁게 묶여 지줏대 노릇을 했던 대 꼬챙이도 함께 나란합니다.
바람이 쌩쌩 몰아쳐도 별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성하게 매달고 있거나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이 있으면 그 무게와 넓이에 따라 흔들릴 텐데 말입니다.
겨울 벌판에서 죄다 버리고 둘이 함께 서서 마치 참선에라도 들어간 듯한 고추와 그 지줏대 대나무, 어디로 흘러가는 길목에 있지는 않은 존재들이지만 정말 '동반'이라는 이미지에 걸맞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대나무 또한 사람들의 이런저런 입방아나 생각 따위와는 아무 아랑곳없이 제 태어난 모습대로 살다가 죽어갈 따름입니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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