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은, 변절한 적이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지연. 호는 위암.

1864년 태어나 1921년 세상을 떠난 장지연이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사 명단에 들어갔습니다. 장지연을 두고 항일에서 친일로 변절했다고 보는 이들이 많은 편이지만, 사상 측면에서 보면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뀌었다고 보는 근거는 바로 1905년 을사늑약을 비판하는 장지연의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황성신문>에 실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렇게 일본에 맞섰지만 나중에 경술국치를 겪고 합방이 되니 일제 통치에 협력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지연은 처음부터 ‘친일’이었습니다. 장지연이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에 빠져 있었음은 그동안 우리 역사학계가 밝혀놓은 뚜렷한 사실입니다. 러일전쟁이 한창인 때인 1904년 장지연은 5월 6일치 <황성신문> 2면 논설에서 ‘백인종에 맞서려면 황인종은 일본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일본과 러시아의 치열한 전쟁이 참담해서 세계의 겁살운과 동포의 액운이 되고 있다.”, “북경에 달려가 청나라 조정의 뜻을 (중립에서) 돌려 동양 정세를 부지하고 황색 종족을 보전하려고 한다.” “우리가 연합 대동해 평화를 유지하면 반드시 황색인종 수억 사람이 모조리 은혜와 복됨을 맞이하게 하며 동양의 크고 작은 여러 나라에게는 안녕을 지키게 해 줄 것이다.”

"이토 후작, 왜 우리를 속였느냐!"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당하자 사흘 뒤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는데, 일본(정확하게는 이토 히로부미)이 약속을 어긴 데 대한 비판 측면이 강하답니다. 주요 내용은 ‘동양 삼국 안녕 주선’과 ‘독립 방략 권장’ 약속을 왜 깼느냐, 입니다. 전문(全文)은 이렇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날 이토 후작이 한국에 오니 어리석은 우리 국민이 말하기를,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한 인물이라 오늘날 반드시 우리나라의 독립을 굳게 세울 방략을 권하리라 하여 관민이 크게 환영하였더니, 세상에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디로 제출되었는가. 조약은 비단 우리 대한뿐 아니라 동양삼국의 분열조짐을 만들어 내는데 후작의 처음 의도가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해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줄 이토 후작 스스로도 잘 알 것이다.
슬프도다. 개돼지만도 못한 정부의 대신들이 영리를 바라고 위협에 겁먹어 놀랍게도 매국의 도적을 지어 4000년 강토와 500년 사직을 바치고 2000만 국민을 노예로 만드니 저들 외부대신 박제순과 여러 대신은 깊이 책망할 가치도 없다.
명색이 참정대신으로 정부의 수석인 대신은,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궁색하게 면하여 명예를 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가. 청음 김상헌의 서류를 찢는 통곡도 동계 정온의 할복도 못하고 살아서 세상에 서니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상 폐하와 2000만 동포를 대하리요.
분하도다! 우리 2000만,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기자 이래 4000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그러니까 식민 지배 강화를 위한 조치인 ‘외교권 박탈’이나 ‘통감부 설치’ 같은 을사늑약의 주요 내용에 대한 비판이 없습니다. 반면 이토가 약속을 어긴 데 대한 통박이 앞서 있습니다. 물론, ‘시일야방성대곡’에 이른바 ‘역사적 의의’가 없다고 하려는 뜻은 없습니다만.

박노자는 <우승열패의 신화> 361쪽에서 “안중근, 장지연, 이준, 이승만, 윤치호 등 인종론 입장에서 일본 승리를 기뻐하면서도 ‘인종적 단결’보다 대한제국의 현실적 ‘국권’을 더 중시하는 지식인들은 을사조약 강제 소식에 충격을 받아 인종론 사고를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못하면서도……약속을 ‘배신’한 일본과 이토를 혐오하는 반일로 전환한다.”고 했습니다.

이 일로 1906년 2월까지 64일 동안 감옥 생활을 해 놓고도 장지연은 그해 7월 7일치 <황성신문>에서 논설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함께 독립을 유지하며 서로 지팡이가 되니 일본 또한 영원히 보전된다.”고 한.중.일 삼국 동맹을 긍정하는 논리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사람은 장지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안중근도 그랬고 나중에 무장독립투쟁에 나선 신채호와 박은식 같은 인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끝은 같지 않았습니다.

장지연은 대한자강회를 조직했다가 해산되자 러시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1908년 망명을 떠납니다. 망명 생활 또한 뜻처럼 되지 않자 1909년 10월 진주로 와서 우리나라 최초 지역일간지 <경남일보> 주필을 맡습니다. 그러다가 경술국치를 당한 다음 매천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싣습니다.

1915년부터 다시 친일 기사 생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으면 그럭저럭 좋았으련만, 장지연은 1915년 새해 첫날부터 일제 식민 통치를 아름답게 꾸미는 글을 발표합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그해 1월 1일치로 실린 글이 그렇습니다.

제목은 ‘조선 풍속의 변천’입니다. 장지연은 여기서 “조선총독부가 시정 5주년 기념으로 물산공진회를 마련했는데 이는 조선총독부가 혁구쇄신(革舊刷新)하여 쓸모없는 것을 없애고 농공실업을 장려하여 진보한 성적을 모두 수집하여 진열한 것이다.”고 칭찬합니다.

장지연은 여태 <매일신보>가 여러 차례 초청했으나 1914년 10월에 ‘기신보사(寄申報社=신보사에 준다)’라는 글을 써서 거절하기까지 했다고만 알려져 있었으나 바로 두 달 뒤에 이렇게 <매일신보>에 글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좀 가볍게 이르면, 변덕이 심해 보입니다.

장지연은 이어 같은해 4월 21일치 <매일신보> 만필소어(17)-신구학(기)에서 “(아시아를 제패한 전술로 보더라도) 일본을 동양의 독일이라 일컬어도 지나치지 않다.”, 1916년 9월 16일치 만록-지리관계(5)에서 “(일본은) 동양의 패왕이다.”라 했습니다.

1917년 6월 8일치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동상(동쪽 위에 있는 일본)으로 이왕(순종) 전하를 보내며-에서 “(순종의 일본 방문으로) 내선 인민이 친목으로 사귀어 장애를 풀어 없애고 일체 간격이 없다.”, “일선(日鮮)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 하고 찬양했습니다.

이밖에도 연세대 사학과 교수 김도형이 2000년 6월 발표한 논문 ‘장지연의 변법론과 그 변화’(<한국사 연구> 109집)에 따르면, 장지연은 ‘황인종과 백인종’ 전쟁에 대해 <매일신보> 1915년 7월 3일치(‘구주(歐洲) 전쟁의 기인’)와 1918년 3월 19일치(‘황백인종전’)에서 말했습니다. 또 <매일신보> 1916년 6월 8일치 ‘시사소언’에서도 “일본이 마땅히 아시아의 맹주가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장지연이 못 빠져 나온 인종주의.사회진화론

박노자는 장지연을 다른 개신 유학자와 대조합니다. <우승열패의 신화> 400쪽에는 “결국 이(개신 유학자) 그룹은 정치적으로 분열했다. ‘황인종과 백인종 사이의 인종전쟁’이라는 구도에 매료된 장지연은 윤치호와 마찬가지로 일본 식민 당국에 협력하는 데 동의했다. 그렇지만 박은식은 신채호와 마찬가지로 중국 망명을 택하여 망명 독립투쟁의 핵심 인물이 되었으며,”라 했습니다.

장지연은 무덤이 마산에 있습니다. 장지연의 친일 행적은, 2003년 3월 이전에는 적어도 대중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해 3월 1일과 6일과 8일치로 <경남도민일보>가 세 차례에 걸쳐 보도함으로써 널리 알려졌습니다. 물론 조중동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는 매체들은 그 때도 제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만.

당시 기사와 메모를 모으고 그 뒤에 생긴 자료들까지 챙겨서 한 번 정리를 해 봤습니다. 이렇게 하고 보니 어느 정도는 ‘빛’과 ‘그림자’가 같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2005년에는 두 차례 토론회에 나가기도 했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이 명백한 친일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빛’이 너무 세었고 또 뜨거웠나 봅니다.

저는 장지연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장지연은 자기 한 몸 잘 살기 위해 친일한 여느 친일인사들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실제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그이는 무어랄까 결국 신념이 잘못돼 인생을 조졌습니다. 1921년 술에 찌들어 숨을 거둘 때까지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당시 시대 흐름이 그랬던 탓도 클 것입니다.

결국 책임은 모조리 개인에게 돌아가고 맙니다. 둘러싼 조건은 그야말로 조건일 뿐입니다. 장지연은 왜 박은식이나 신채호처럼 변신하지 못했거나 또는 안했을까요? 무장독립투쟁까지 나아간 박은식이나 신채호도, 친일로 일관한 장지연과 마찬가지로 양반 출신 개신 유학자인데 말입니다.

장지연 주필이 1910년 10월 10일치 <경남일보>에 실었다는 매천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가져와 봤습니다. 당시 장지연도 당연히 비감(悲感)에 흠뻑 젖었을 것입니다. 장지연의 삶을 보면서, 매천 황현이 목숨을 끊으며 지었다는 이 시의 표현대로, 식자인(識字人) 노릇이 쉽지 않음을 한 번 더 절감합니다.(전체는 네 편인데 첫째와 셋째만 옮깁니다. 다른 둘은 마음에 들지 않아 뺐습니다.)

난리를 겪다 보니 머리 온통 허예졌네
몇 번이나 목숨 끊으려도 이루지 못했으나
오늘에는 반드시 이루어야 하고 보니
가물대는 촛불이 아득히 하늘에 비치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한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가을 등불에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세상에 글 아는 이 노릇 어렵고 어렵구나

김훤주

지식인의 책무 상세보기
노암 촘스키 지음 | 황소걸음 펴냄
지식인의 책무는 무엇인가? 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글은 냉전 종식이후, 그리고 동티모르 사건을 빗대어 지식인의 이중적인 잣대를 비판하며 '지식인의 책무'가 무엇인지 역설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신문의 기사를 비판의 근거로 삼는다. 그것만큼 중요한 중요한 증거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언급하는 지식인은 기자만이 아닌 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평론가, 이른바 전문가들까지 포함한다.
카카오톡으로 친구맺기




김주완이 최근에 산 상품을 보여드립니다
아이몰 아이폰용 이동식 OTG 젠더 B타입 외장메모리 + C PIN 커넥터 + 5 PIN 커넥터 + 벨벳 파우치, 32GB 오뚜기 고시히카리... 아디다스 쿼드큐브 운동화 EH3096 유한킴벌리 덴탈 마스크, 50매입, 1개 샌디스크 iXpand Mini 아이폰 OTG USB, 256GB
글쓴이 : 김훤주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전 댓글 더보기
  2. 지나가다 2008.05.03 13: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노자도 그렇고 좀 당시 상황을 너무 현재의 잣대로 판단한 단정같네요(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단지 일본에 기대를 걸었다는 이유로 그를 폄하한 박노자의 논리는 비역사적 편견의 극치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적극적 친일로 치부를 했거나, 아니면 신념적으로 서구 제국주의를 일차적인 위협으로 느껴 일시적으로 동아시아적 지역주의에 매료되어 일본(이나 중국)에 기대를 걸었다가 환상이 깨졌지만 망명가서 무장투쟁하지 않고 국내에서 일단 생존하여 (은둔 도피하지 않고)살아갔다면 현재의 맥락에서는 모두 똑같은 친일파로 아무런 역할을 평가받지 못하고 매도하는 것은 좀 지나친 건 아닌지...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08.05.03 1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의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공적과 과오를 함께 기록하자는 취지입니다.

      2003년 3월 장지연의 친일 행적을 보도 매체에서는 처음으로 <경남도민일보>가 보도했을 때 이미,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에도 얘기했지만 아무리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 해도 그것은 <정상 참작> 수준밖에 안 되고 '친일 행적' 자체를 없다고 치부하고 묻어버릴 수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3. 핑크레이디 2008.05.03 13: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학교다닐때 사탐중에서 근현대사를 제일 좋아했던 21살의 학생입니다. 지금도 근현대사에대한 관심은 여전하구요~ 제목만 보고는 우리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표적 항일인사인 장지연을 왜 친일로 몰아버리는 걸까? 하며 안좋은 마음으로 클릭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편협한 지식이 부끄럽네요^^ 언젠가 근현대사 선생님께서 안중근의사도 처음엔 친일이었다고 하는데 뭔가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이 글을 읽으니 이해가 갈 것 같아요. 우리교과서도 학생들에게 정확한 지식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 Favicon of http://ㅇㄴㅁㄹ.ㅇㄴㄹ 민족주의자 2008.05.04 1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근현대사를 매우 좋아한 21살 청년입니다..

      우리 학생들에게 가르켜 줄 부분이 많이있죠...

      하지만 뉴라이트나 친일우파중심의 역사관이 등장한시점에

      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군요...

  4. 힘내 2008.05.03 1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실: EU가 사람에게 식용금지 변형옥수수
    현실: 5월1일 세계 처음 식용으로 수입.

    진실: 미국식품안정청 FDA가 개 고양이 사료로도 금지한 광우병소, 치료물질없씀
    현실: 안전하다고 먹으라는 정부.

    일제 말살정책을 떠올리게하는
    이명박정부를 국민손으로 끌어내리는수 밖에 없습니다.

    국민 소환제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41850&
    탄핵 국회교체 1달 남음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40221
    국민투표제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43094

    한나라당의 일방적인 FTA비준이 통과되면 나라를 통체로 내준
    을사늑약처럼 옛 전처를 밟게 됩니다.+++ 퍼트려주세요

  5. 제로 2008.05.03 15: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현재 25이고 학창시절엔 국사과목을 가장 좋아했었는데요
    장지연이 친일이란거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정말 부끄럽고, 또 많이 배우고 가네요
    우리들 배울땐 그저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황성신문 이렇게
    외우기만 했지 더 자세히는 배우지 못했고 알려는 노력도 없었습니다
    시험에 '이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이 지문이 나오면
    그저 장지연-황성신문 이렇게 떠올려야만 하는 방식이었죠...
    저의 무지를 깨트려주신것 고맙습니다

  6. 1만2천년 2008.05.03 16: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을사늑약전 지식인들이 인종론적으로 일본의 승리를 기뻐함은 오늘날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의 선전에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이 좋아했던 거라 비슷한 것 같네요.. 문제는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이 되면서 길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습니다...

    대한독립을 이루고, 최초의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장기간을 두고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바로 잡는 노력을 했어야 하지만, 못했죠.. 첫단추를 잘못 꽤니 얼마나 시끄럽나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아마도 피폐된 강토와 국민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친일인사들에게 조국의 발전을 위해 과거를 묻지않고, 그대로 버려두었으니.. 사실 그러한 친일인사들은 그 당시 재산몰수하고 강제추방시키고, 대한민국의 시민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려두고, 특별법으로 계속 진행했어야 하는데... 그 친일 인사들 그렇게 해도 아무런 할말 없습니다.

    이명박대통령이 공과를 따져야 한다는데... 앞뒤 이것저것 가리면, 과연 누가 친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누가 있나요? 누구나 친일을 한 이유를 물어보면 대한민국을 위해서 희생했다라고 합니다. 공과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친일 인명사전으로 끝을 낼 수는 없습니다. 교과서를 개편해야 하고, 확실한 역사를 위해서 계속 발본색원하고, 닿지않은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과서 편찬위원들도 대부분 일본침략기 시절에 교육을 받던 사람(현재는 잘 모르겠네요..)이니, 한국말은 긴장어라고 하죠.. 첫말부터 마지막말까지 끝까지 들어야 그 뉘앙스를 정확히 알 수 있는데, 빼고빼고빼고 하니,.. 장지연같은 사람이 왜? 친일인사야고 반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7. 드림보이 2008.05.03 16: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지연은 처음부터 친일이었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시일야방성대곡 자체를 그가 쓴 것이 아니라고 보죠...
    즉... 요즘처럼 언론시스템이 자리잡은 시절이 아니기 때문에
    장지연이 편집장으로 있음으로해서 다른 사람(기자일 수도 있고 외부인사일 수도 있음)의 글을 자신의 명의로 내보냈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 시절의 사설들은 상당수가 편집장 이름이나 편집부로 나갔어요.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08.05.03 18: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쯤 쓰다가 다른 사람한테 넘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정확하게 찾아내지는 못하겠습니다만.유근인가 하는, 장지연과 사돈이 되는, 같은 때에 황성신문에 있던 이가 그리 회고한 내용으로 지금 기억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황성신문을 편들었던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23일치 보도에 따르면, 장지연은 "왜 마음대로 신문을 배포해 치안을 방해했느냐."는 일제 순검 물음에 "내가 붓대를 잡은 지 7,8년에 세상 올바른 공론을 주장하다가 오늘 나라가 없어지게 된 관계 사실을 어찌 있는 그대로 말하여 우리 국민에게 알리지 않을 것인가. 볼지어다, <내가 쓴 것이란> 오히려 부족함이 있는 것이나, 소위 치안 방해란 일본 치안의 방해가 있다는 것인가." 대꾸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어쨌든 '시일야방성대곡'이 그의 작품임은 사실인 듯합니다.

  8. 사람이 바뀐 것도 인정하자 2008.05.03 17: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의 일생을 가지고 친일을 논하는 것은 항일업적의 본래 의미 분석에는 부적절해 보인다. 친일이든 항일이든 해당 사안에 대해 논할 일이고 항일운동가의 일생에 친일이 개입된 이유와 의미에 대한 분석은 새로운 각도에서의 조명이지, 항일전력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장지연 선생의 항일은 항일활동이 지속된 기간에 한정해야 한다. 친일 행적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의 항일운동가 장지연은 죽었다. 친일 장지연은 정치적으로 전향한 사람이라 하겠다. 절에 다니다 교회에 다니게 된사람을 끝내 불교인이라 주장할 수 없고, 교회에 다니다 절에 다니게된 사람을 끝내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9. 음.. 2008.05.03 1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상하네요.. 전 올해 나이 31세인데.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때(10년~15년전) 국어시간에 장지연에 대해 배운바에 의하면
    윗글 필자의 내용과 거의 유사한데.
    시작은 항일이었으나 나중에 변절한 사람으로 국어선생님께 배운 기억이 납니다만..
    지금에서야 그런 사실이 학계에서 인정이 된느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아서 다들 모르고 계섰던 것인지.

  10. 지니 2008.05.03 1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글은 어디서 다 구해오나여.?
    진짜 대단해여. 지금껏 학교에서 배워왓던 모든내용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지네여..ㅡ.,ㅡ
    누가 진짜 내용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모르겟써여...
    쓰벌.. 학교 다니는 내내 돈내고 배웟는데....아아아아아아.....!!!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08.05.04 06: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자랑 좀 하자면요. 2003년에 이것 취재할 때, 창원대학교 도서관과 경남대학교 도서관 등지에서 <황성신문>과 <매일신보> 축쇄판을 좀 대충 샅샅이 뒤졌습니다요. ^,.^

      물론 앞서 연구한 이들의 성과가 없었다면, 저처럼 시간에 쫓기는 기자 나부랭이가 그렇게 뒤지는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11. jh 2008.05.03 2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MB 국민저항권으로 몰아내자.........


    ◈국민 저항권이란 ◈
    국가권력이 불법적으로 행사됐을 때, 그 복종을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는 국민들의 분노로 정권을 교체하는것을 말합니다

    아고라 서명 부탁드립니다.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42112


    우리 힘으로 직접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많이 퍼트려 주세요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40221
    ↑현재 87만명 서명한 주소에요! 이곳도 서명해주세요!!!!

  12. 심승수 2008.05.03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이렇게 정리가 되네요 김주완 부장님 김훤주 선배님 잘보고 갑니다.

  13. Favicon of http://foxer.tistory.com foxer 2008.05.03 2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로운 정보로군요.
    시일야 방성대곡같은 글까지 쓴 사람이 어떻게 친일을 할 수 있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알려진 것과는 조금 달랐군요. 잘 읽었습니다

  14. 거북 2008.05.04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국사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것과 틀리지 않네요.
    이래서 교사들의 자질과 역량이 중요한가 봅니다.

  15. 2008.05.04 1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6. Favicon of http://ㅇㄴㅁㄹ.ㅇㄴㄹ 민족주의자 2008.05.04 1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 신선한 내용이군요

    장지연이... 애초부터 친일주의자였다..

    친일 뉴라이트교과서가 나온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적지 않군요...

    지금 이런시점에서도

    좌파위주의 교육이다... 한나라당이 그저 한심스럽습니다.

    자기들이 말하는 실증주의 객관주의 뉴라이트적인게 먼줄알고 떠드는것인지...

    정말 대한민국의 후손들이 걱정되는 시점이네요...

  17. Favicon of http://yahoo.co.kr 장다솜 2008.11.13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조금만 퍼가겠습니다...

  18. 후후 2009.06.15 1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쩌면 DJ 사저 앞에서 일당(?)받고 데모하는 사람들이 행복할 지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가치판단에 대한 능력와 책무에서 자유로우니까여

  19. 미들맨 2009.11.06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지연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의견인듯 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20. 2017.04.03 2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을미의병 격문을 지었던 사람에게 애초부터 친일이었다는건 너무 큰 왜곡이네요
    애국계몽계열이 사회진화론이 경도되었다고해도 그분들 전부 도매금으로 싸잡아서 '처음부터 친일의 싹이 보였던 이들'로 몰아가는 것이야말로 순국선열들에 대한 누가 아닌지요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17.04.30 2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고맙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자는 얘기 정도로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글고 장지연 경우는 아무래도 빛을 많이 받은 반면 그림자에 대한 평가는 별로 없는 편이기는 합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니까, 다양하게 많이 알아보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요^^

  21. 김** 2020.10.13 2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 현동에 장지연 묘있는데 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