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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세상

장지연은 왜 친일지식인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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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은, 변절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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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호는 위암.

1864년 태어나 1921년 세상을 떠난 장지연이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사 명단에 들어갔습니다. 장지연을 두고 항일에서 친일로 변절했다고 보는 이들이 많은 편이지만, 사상 측면에서 보면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뀌었다고 보는 근거는 바로 1905년 을사늑약을 비판하는 장지연의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황성신문>에 실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렇게 일본에 맞섰지만 나중에 경술국치를 겪고 합방이 되니 일제 통치에 협력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지연은 처음부터 ‘친일’이었습니다. 장지연이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에 빠져 있었음은 그동안 우리 역사학계가 밝혀놓은 뚜렷한 사실입니다. 러일전쟁이 한창인 때인 1904년 장지연은 5월 6일치 <황성신문> 2면 논설에서 ‘백인종에 맞서려면 황인종은 일본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일본과 러시아의 치열한 전쟁이 참담해서 세계의 겁살운과 동포의 액운이 되고 있다.”, “북경에 달려가 청나라 조정의 뜻을 (중립에서) 돌려 동양 정세를 부지하고 황색 종족을 보전하려고 한다.” “우리가 연합 대동해 평화를 유지하면 반드시 황색인종 수억 사람이 모조리 은혜와 복됨을 맞이하게 하며 동양의 크고 작은 여러 나라에게는 안녕을 지키게 해 줄 것이다.”

"이토 후작, 왜 우리를 속였느냐!"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당하자 사흘 뒤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는데, 일본(정확하게는 이토 히로부미)이 약속을 어긴 데 대한 비판 측면이 강하답니다. 주요 내용은 ‘동양 삼국 안녕 주선’과 ‘독립 방략 권장’ 약속을 왜 깼느냐, 입니다. 전문(全文)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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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이토 후작이 한국에 오니 어리석은 우리 국민이 말하기를,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한 인물이라 오늘날 반드시 우리나라의 독립을 굳게 세울 방략을 권하리라 하여 관민이 크게 환영하였더니, 세상에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디로 제출되었는가. 조약은 비단 우리 대한뿐 아니라 동양삼국의 분열조짐을 만들어 내는데 후작의 처음 의도가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해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줄 이토 후작 스스로도 잘 알 것이다.
슬프도다. 개돼지만도 못한 정부의 대신들이 영리를 바라고 위협에 겁먹어 놀랍게도 매국의 도적을 지어 4000년 강토와 500년 사직을 바치고 2000만 국민을 노예로 만드니 저들 외부대신 박제순과 여러 대신은 깊이 책망할 가치도 없다.
명색이 참정대신으로 정부의 수석인 대신은,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궁색하게 면하여 명예를 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가. 청음 김상헌의 서류를 찢는 통곡도 동계 정온의 할복도 못하고 살아서 세상에 서니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상 폐하와 2000만 동포를 대하리요.
분하도다! 우리 2000만,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기자 이래 4000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그러니까 식민 지배 강화를 위한 조치인 ‘외교권 박탈’이나 ‘통감부 설치’ 같은 을사늑약의 주요 내용에 대한 비판이 없습니다. 반면 이토가 약속을 어긴 데 대한 통박이 앞서 있습니다. 물론, ‘시일야방성대곡’에 이른바 ‘역사적 의의’가 없다고 하려는 뜻은 없습니다만.

박노자는 <우승열패의 신화> 361쪽에서 “안중근, 장지연, 이준, 이승만, 윤치호 등 인종론 입장에서 일본 승리를 기뻐하면서도 ‘인종적 단결’보다 대한제국의 현실적 ‘국권’을 더 중시하는 지식인들은 을사조약 강제 소식에 충격을 받아 인종론 사고를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못하면서도……약속을 ‘배신’한 일본과 이토를 혐오하는 반일로 전환한다.”고 했습니다.

이 일로 1906년 2월까지 64일 동안 감옥 생활을 해 놓고도 장지연은 그해 7월 7일치 <황성신문>에서 논설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함께 독립을 유지하며 서로 지팡이가 되니 일본 또한 영원히 보전된다.”고 한.중.일 삼국 동맹을 긍정하는 논리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사람은 장지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안중근도 그랬고 나중에 무장독립투쟁에 나선 신채호와 박은식 같은 인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끝은 같지 않았습니다.

장지연은 대한자강회를 조직했다가 해산되자 러시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1908년 망명을 떠납니다. 망명 생활 또한 뜻처럼 되지 않자 1909년 10월 진주로 와서 우리나라 최초 지역일간지 <경남일보> 주필을 맡습니다. 그러다가 경술국치를 당한 다음 매천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싣습니다.

1915년부터 다시 친일 기사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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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으면 그럭저럭 좋았으련만, 장지연은 1915년 새해 첫날부터 일제 식민 통치를 아름답게 꾸미는 글을 발표합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그해 1월 1일치로 실린 글이 그렇습니다.

제목은 ‘조선 풍속의 변천’입니다. 장지연은 여기서 “조선총독부가 시정 5주년 기념으로 물산공진회를 마련했는데 이는 조선총독부가 혁구쇄신(革舊刷新)하여 쓸모없는 것을 없애고 농공실업을 장려하여 진보한 성적을 모두 수집하여 진열한 것이다.”고 칭찬합니다.

장지연은 여태 <매일신보>가 여러 차례 초청했으나 1914년 10월에 ‘기신보사(寄申報社=신보사에 준다)’라는 글을 써서 거절하기까지 했다고만 알려져 있었으나 바로 두 달 뒤에 이렇게 <매일신보>에 글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좀 가볍게 이르면, 변덕이 심해 보입니다.

장지연은 이어 같은해 4월 21일치 <매일신보> 만필소어(17)-신구학(기)에서 “(아시아를 제패한 전술로 보더라도) 일본을 동양의 독일이라 일컬어도 지나치지 않다.”, 1916년 9월 16일치 만록-지리관계(5)에서 “(일본은) 동양의 패왕이다.”라 했습니다.

1917년 6월 8일치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동상(동쪽 위에 있는 일본)으로 이왕(순종) 전하를 보내며-에서 “(순종의 일본 방문으로) 내선 인민이 친목으로 사귀어 장애를 풀어 없애고 일체 간격이 없다.”, “일선(日鮮)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 하고 찬양했습니다.

이밖에도 연세대 사학과 교수 김도형이 2000년 6월 발표한 논문 ‘장지연의 변법론과 그 변화’(<한국사 연구> 109집)에 따르면, 장지연은 ‘황인종과 백인종’ 전쟁에 대해 <매일신보> 1915년 7월 3일치(‘구주(歐洲) 전쟁의 기인’)와 1918년 3월 19일치(‘황백인종전’)에서 말했습니다. 또 <매일신보> 1916년 6월 8일치 ‘시사소언’에서도 “일본이 마땅히 아시아의 맹주가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장지연이 못 빠져 나온 인종주의.사회진화론

박노자는 장지연을 다른 개신 유학자와 대조합니다. <우승열패의 신화> 400쪽에는 “결국 이(개신 유학자) 그룹은 정치적으로 분열했다. ‘황인종과 백인종 사이의 인종전쟁’이라는 구도에 매료된 장지연은 윤치호와 마찬가지로 일본 식민 당국에 협력하는 데 동의했다. 그렇지만 박은식은 신채호와 마찬가지로 중국 망명을 택하여 망명 독립투쟁의 핵심 인물이 되었으며,”라 했습니다.

장지연은 무덤이 마산에 있습니다. 장지연의 친일 행적은, 2003년 3월 이전에는 적어도 대중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해 3월 1일과 6일과 8일치로 <경남도민일보>가 세 차례에 걸쳐 보도함으로써 널리 알려졌습니다. 물론 조중동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는 매체들은 그 때도 제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만.

당시 기사와 메모를 모으고 그 뒤에 생긴 자료들까지 챙겨서 한 번 정리를 해 봤습니다. 이렇게 하고 보니 어느 정도는 ‘빛’과 ‘그림자’가 같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2005년에는 두 차례 토론회에 나가기도 했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이 명백한 친일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빛’이 너무 세었고 또 뜨거웠나 봅니다.

저는 장지연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장지연은 자기 한 몸 잘 살기 위해 친일한 여느 친일인사들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실제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그이는 무어랄까 결국 신념이 잘못돼 인생을 조졌습니다. 1921년 술에 찌들어 숨을 거둘 때까지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당시 시대 흐름이 그랬던 탓도 클 것입니다.

결국 책임은 모조리 개인에게 돌아가고 맙니다. 둘러싼 조건은 그야말로 조건일 뿐입니다. 장지연은 왜 박은식이나 신채호처럼 변신하지 못했거나 또는 안했을까요? 무장독립투쟁까지 나아간 박은식이나 신채호도, 친일로 일관한 장지연과 마찬가지로 양반 출신 개신 유학자인데 말입니다.

장지연 주필이 1910년 10월 10일치 <경남일보>에 실었다는 매천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가져와 봤습니다. 당시 장지연도 당연히 비감(悲感)에 흠뻑 젖었을 것입니다. 장지연의 삶을 보면서, 매천 황현이 목숨을 끊으며 지었다는 이 시의 표현대로, 식자인(識字人) 노릇이 쉽지 않음을 한 번 더 절감합니다.(전체는 네 편인데 첫째와 셋째만 옮깁니다. 다른 둘은 마음에 들지 않아 뺐습니다.)

난리를 겪다 보니 머리 온통 허예졌네
몇 번이나 목숨 끊으려도 이루지 못했으나
오늘에는 반드시 이루어야 하고 보니
가물대는 촛불이 아득히 하늘에 비치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한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가을 등불에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세상에 글 아는 이 노릇 어렵고 어렵구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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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암 촘스키 지음 | 황소걸음 펴냄
지식인의 책무는 무엇인가? 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글은 냉전 종식이후, 그리고 동티모르 사건을 빗대어 지식인의 이중적인 잣대를 비판하며 '지식인의 책무'가 무엇인지 역설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신문의 기사를 비판의 근거로 삼는다. 그것만큼 중요한 중요한 증거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언급하는 지식인은 기자만이 아닌 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평론가, 이른바 전문가들까지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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