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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본 곳

신돈을 생각하니 노무현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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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도 어찌 보면 고상하지 못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개혁을 하려다 실패한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실패한 까닭이 무엇인지는 저마다 다들 다르게 짚을 것이고요.

노 전 대통령 같은 사람이 고려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신돈이 그렇습니다. 천한 신분 출신으로 최고 권력까지 나아갔으나 결국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 까닭 또한 사람마다 다르게 꼽겠지요.

저는 둘이 실패한 까닭을 별로 다르게 여기지 않습니다. 노무현과 신돈이 비슷하다고 봅니다. 어쩌면 때가 아니었다고 얘기하는 무책임으로 흐를 수도 있겠지만, 가치관과 세계관과 우주관을 같이 하는 자기 세력이 없거나 약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김해 봉하 마을 생가가 있는 경남에는, 고려 말기 개혁을 이끌었던 신돈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절터도 있습니다.

불교가 성하던 고려시대에도 권력 때문에 멀쩡한 절간이 망할 수도 있었음을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창녕 옥천 마을 관룡사 아래 화왕산 기슭에 남아 있는 옥천사(玉泉寺)터입니다.

매표소를 지나 자동차를 타고 관룡사로 죽 올라가다 보면 왼편에 널찍한 주차장이 나옵니다. 여기 맞은편이 바로 그 자리랍니다.

옥천 마을 이름이 먼저인지 아니면 옥천사 절간 이름이 먼저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 둘보다 오히려 골짜기 이름이 아마 먼저 옥천이라 붙어지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입니다.


주차장 맞은편 숲 속을 바라보면 바로 앞에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가 있습니다. 여기로 10m쯤 들어가면 이른바 폐사지(廢寺址)-망한 절터가 나옵니다. 표지판이 없고 소나무 따위가 우거져 있어 절터인지 아닌지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여기 이 절터는 다른 절터하고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감은사지 같은 경우는 고즈넉한 맛이 있다 하고 백제 쪽 절터는 스산함이 있다 합니다. 합천 영암사지는 독특하게 씩씩한 기상을 내뿜습니다.

창녕 옥천사터는 한 마디로 '험악'합니다. 저는 이런 폐사지-망한 절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제대로 놓여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퉁이가 자연스레 닳은 석물도 전혀 없습니다.

군데군데 석물이 뒹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바로 신돈 때문입니다. 가진 이들은 요승(妖僧)이라 했고 없는 이들은 성인(聖人)이라 했다지요.

공민왕 때 임금의 신임을 업고 개혁을 추진한 신돈(?~1371)이 여기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지금 있는 신돈의 이미지는 '삿된 중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진정으로 개혁을 하려 했으나 갈수록 주색을 즐기고 권력을 오로지해 비난받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돈을 처형한 이들의 기록입니다. 족벌입니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쥔 존재들입니다. 신돈 숨통을 끊고 나서 바로 옥천사를 불지르고 망가뜨립니다. 저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신돈이 살던 당시 역사를 보려 합니다. 신돈이 역사에 나타난 때는 1365년입니다. 당시 상황은 아주 복잡했습니다.

원나라와 친한 권문세족과 불교세력은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홍건적의 발호는 무신세력의 등장과 성장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왕권은 졸아 있었습니다.

막 생긴 사대부는 힘이 모자랐습니다. 권문세족과 불교세력에게 백성들은 재산을 빼앗기거나 아니면 노비 신분으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민왕은 왕권을 키우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려면 불교와 권문세족이 약해져야 합니다. 무신세력 또한 견제를 해야 마땅합니다. 이를 위한 공민왕의 선택이 바로 신돈이었습니다. 신돈은 천한 신분에 혈혈단신이기까지 했습니다.

신돈 가까이에는 재산이나 권력이랑 가까운 이가 있을 수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신돈은 사비(寺婢)의 아들로 아버지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천출이었으므로 개혁의 걸림돌이 옆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영향력이 크고 출신 성분이 좋았던 당대의 고승 보우가 신돈을 사승(邪僧)이라 지목했다는데, 이에 비춰보면 불교 내부에서도 핵심이 아닌 주변부였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개혁 추진을 통한 왕권 강화의 적격자로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만들고 스스로 우두머리인 판사(判事)가 됩니다.

귀족이나 불교에서 부당하게 빼앗아간 토지와 억지로 노비가 된 이들을 원래대로 돌리는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땅(田)과 사람(民)을 가려서(辨) 가지런히(整) 하는 특별(都) 부처(監)였던 것입니다.

없는 백성들은 "성인이 나타났다"고 반겼지만 벌족들은 아주 미워했습니다. 개성 정치 무대에 등장한 이듬해인 1366년부터 해마다 신돈을 몰아내려는 계획이 있었다고 합니다.

개혁이 서툴렀던 것일까요, 아니면 공민왕이 신돈에게서 위기를 느꼈던 것일까요. 1370년 공민왕이 정치 일선에 돌아옵니다. 신돈은 곧바로 실각하고 이듬해인 1371년 역모 혐의로 처형을 당합니다.

그리고, 공민왕 또한 1374년 권문세족에게 독살됩니다. 이로써 개혁은 완전 꺾이고 말았으며 고려 왕실 부흥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 돼 버렸습니다.

옥천사는 이처럼 신돈의 실각 때문에 완전 망가졌습니다. 부도나 석등 받침돌, 석탑 있던 자리, 심지어는 주춧돌에조차 정을 내리쳐 깬 자국이 600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 뚜렷합니다.

석등 받침돌. 다른 석물에 견주면 성한 편입니다.


깨어진 석물 조각.


앞에 나란한 돌들이 제가 보기에는 석탑 기단부입니다.


정으로 내리쳐 깨뜨린 자국이 뚜렷합니다.


주춧돌 같습니다.


앞에 말씀드린대로, 석물 가운데 제대로 놓여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석탑 기단석만 제자리를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당시 벌족들의 개혁에 대한 거세찬 저항, 신돈에 대한 잡아먹을 듯한 증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옥천사터만큼 무상한 절터가 없을 것입니다. 나무 사이로 절터를 거닐다 보면 권력도 무상하고 사람살이도 무상합니다. 개혁도 무상하고 욕심도 무상합니다.

절터 위쪽 무덤에도 함부로 갖다쓴 길다란 부재들이 있습니다.


옥천사터 맞은편 주차장이 있는 쪽 옥천 골짜기.


어쨌거나, 신돈을 덧칠해 놓은, 나쁘기만 한 요물이라는 이미지만큼은 이제라도 벗겨야 마땅하겠지 싶습니다.

지금 극우 수구 집단이 악다구니로 규정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이 바로 640년 전 권문세족이 둘러씌운 신돈의 이미지와 무엇이 어떻게 다를지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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