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덕수궁에서 망해가는 왕조의 슬픔을 봤다

김훤주 2010. 1. 24. 11:28
반응형

덕수궁에 대한 서울시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원래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저택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서울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1593년 선조가 거처로 썼다. 광해군이 1611년(광해 3)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였으며 1615년 광해군이 재건한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별궁이 됐다."

이어집니다. "경운궁(=덕수궁)은 1897년 출범한 대한제국의 정궁이다. 그러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제가 고종을 쫓아내면서 경운궁은 선(先)황제가 머무는 궁이 됐고 이름도 일제가 덕수궁으로 바꿨다." 덕수는, 정치에서 손떼고 목숨 보전이나 해라 뭐 이런 뜻입지요.

서울에 가면 이 덕수궁(德壽宮)에 자주 들릅니다. 날씨가 그리 춥지 않다면, 시간이 어중간할 때 이리저리 보내기가 참 좋은 곳입니다. 그날도 덕수궁에 들러 둘러보다가 기와지붕 막새 무늬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습니다.

즉조당 일대 설명한 글.

즉조당(卽조堂)과 석어당(昔御堂), 그리고 준명당(浚明堂) 건물에서였습니다. 즉조당은 고종이 1897년부터 1902년 중화전이 들어설 때까지 정전으로 쓴 건물이고 준명당은 황제가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서로 복도로 이어져 있습니다.

석어당은 용도가 적혀 있지는 않은데 2층 건물입니다. 단청을 하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답니다. 이 건물들 셋은 1904년 불이 나는 바람에 한꺼번에 깡그리 타버렸는데 같은 해에 새로 지었답니다.

이상한 점은 이렇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막새기와의 무늬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어떤 규칙이 있나 싶어 여러 모로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무런 규칙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수막새의 무늬도 그렇고, 암막새의 무늬도 그렇습니다.

즉조당 뒤편 기와 무늬. 같습니다.

같은 즉조당 기와 무늬. 다릅니다.


둥근 암막새 무늬도 다르고 커다란 수막새 무늬도 다릅니다. 즉조당.


즉조당과 준명당을 잇는 복도 지붕. 수막새 무늬가 다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무슨 특별한 까닭이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사정이 그것밖에 안 되니까 이렇게 마구잡이로 쓰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가난하니까, 나라 살림이 그렇게밖에 안 되니까 마구잡이로 올린 것 아닐까 싶었지요.

석어당.

수막새 무늬가 같은 듯 다릅니다.


마찬가지 같은 듯 다릅니다.


다릅니다.


1904년 새로 지었다니까, 당시 이름만 황제국이지 실제로는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나라들의 침략 앞에 벌벌 떨고 있는 불쌍한 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궁전을 짓는다 해도 쓸 수 있는 돈이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이고요.

그래서 저는 덕수궁 즉조당과 석어당의 저 막새기와 무늬가 맞지 않은 까닭은 나라가 힘이 약한 데 있다고 내심 결론지었습니다. 통일성 있게 막새 무늬를 가려 쓸 처지가 못됐다는 말씀이지요. 이를 뒷받침하는 물건으로 즉조당과 준명당을 잇는 복도를 받치는 기둥을 꼽았습니다.

이 기둥은, 돌로 바탕을 깐 복도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데 제 구실이 있습니다. 복도 바닥을 이루는 돌덩이가 금이 간 부분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황실이라면 이런 정도 보강 공사는 손쉽게 했을 텐데, 대한제국은 그럴 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가로로 놓인 돌덩이에 금간 자취가 뚜렷합니다.

이렇게 지붕을 보고 다니니까 다른 성과도 얻었습니다. 자세히 봐도 보이지 않는데요, 대한문 지붕에서 색다른 무엇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멀리서 찍으면 안 보입니다. 불꽃 무늬 장식 같기도 한데, 저는 피뢰침이라 여깁니다. 옆에 있는 시커먼 무리는 비둘기 같습니다만.

지붕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런데 불꽃무늬 피뢰침이 있다.



서울 덕수궁에서, 망해가는 왕조의 슬픔을 봤습니다. 망해가는 왕조의 궁전 지붕 기와 무늬에서 백성 지지를 받지 못하고 헛소리만 크게 쳐대는 어리석은 황제의 슬픈 자화상을 봤습니다.

김훤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