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서 투표를 하지 않으면 기권(棄權)이 됩니다. 투표는 했으나 누구를 찍었는지 뚜렷하지 못할 때는 무효(無效)가 됩니다.
기권.무효는 아무 의미도 없다
기권이나 무효는, 어떤 조직 또는 세력이 나서서 보이콧(boycott)을 주도하는 경우 중요한 의미를 띨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정치적 의미도 없기가 십상입니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제게 선거권이 주어진 1983년 이후로, 비합법 신분인 때를 제외하고는 투표를 하지 않은 적이 한 차례도 없음을 밝혀 놓습니다.
‘1인 1표’라는 평등 선거를 실현하기 위해, 재산에 따라 선거권을 제한하던 봉건 귀족과 부르주아지에 맞서, 피 흘리며 싸워온 세계 노동자와 민중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투표하기 싫을 때가 있다
그런데 정말 투표하기 싫을 때가 있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친 다음 있었던 그 해 12월의 13대 대통령 선거가 대표적입니다.
민중후보 백기완이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후보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한 뒤 저는 정말 투표하기 싫었습니다. 왜냐, 찍고 싶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직의 방침은, 백기완이 그만 뒀으니 김대중을 찍어라, 였습니다.
어떤 이는 이미 투표용지에 백기완 이름이 인쇄돼 있었다는 사정을 빌려 백기완을 찍기도 했고-그러니까 무효지요-어떤 이는 울며 겨자 먹기로 조직 방침을 따르기도 했습니다.
억지 무효표는 보람 없는 짓이다
가장 아래에다 '16 지지정당 없음'을 넣자는 얘기.
광역의원이나 국회의원 선거도 마찬가지인데, 권영길이 나온 창원 을 선거구가 아니어서, 이번에 진보신당 후보가 없었다면 어디 찍어야 할지를 몰랐을 것입니다. 이럴 때 저는 대체로 무효표를 만듭니다.
저는 무효 비율이 얼마인지 점검해 본 적도 많습니다. 지지할 후보가 없어 무효표로 만든 사람도 없지는 않을 텐데, 그런 자취가 크게 나면 의미가 있을 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제 기대대로 무효 비율이 의미가 있을 만큼 높은 적은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저는 정치에 관심이 있고 투표할 마음이 있으면서도 투표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기권보다는 나을 테니까 무효표라도 만들어야지 하다가도, 그래 봐야 아무 표시도 안 나는데 무슨 보람이 있어, 하는 사람이 적지만 없지는 않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물론 투표를 하지 않는 대다수는 정치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정치가 자기하고 별로 관련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겠지요. 이들은 적어도 저로서는 어떻게 할 수단이 없습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불특정 다수여서, 아무리 욕을 퍼부은들 욕하는 이의 자기만족 말고는 아무 성과도 없을 것입니다.
'지지 후보 없음' 난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정치에 관심이 있고 또 선거에 참여할 뜻까지 있기는 하지만, 지지후보(또는 정당)가 없어서 투표하기를 저어하는 이들을 투표소로 끌어내려면 무엇이 필요하겠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실현할 수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 투표용지에다 후보 또는 정당 이름만 적어놓는 데서 나아가, ‘지지 후보(정당) 없음’ 난을 하나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하는 발상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되면, 마땅히 지지할 대상이 없는 사람도 투표는 하러 갈 것이고, 그래서 지금처럼 기권으로 뭉뚱거려지지는 않을 것이고, 저처럼 때에 따라 무효표를 만들던 사람들도 ‘지지 후보 없음’에 투표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투표한 숫자는 곧바로 집계돼 정치에 곧바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했는 데에도 투표하지 않는 사람은, 진짜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투표할 수 없는 부류와, 아예 정치와는 담쌓고 있는 무리만 남을 것입니다. 구슬과 돌이 한데 뒤섞여 나뒹굴지 않게 됩니다. 돌은 돌대로 구슬은 구슬대로 변별이 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투표하지 않은 돌들을 따로 모았다가 정도에 맞게 처벌을 해도 충분히 될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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