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9일은 총선투표일만이 아닙니다. 그날은 33년 전 죄없는 한국의 청·장년 남자 8명이 박정희 독재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다는 이유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법살인'을 당했던 날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사건을 조작한 후 75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8명을 하루도 지나지 않은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시켜버렸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국제법학자회의는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의 날로 선포했고, 사건 이후 32년이 지난 작년(2007년) 1월 23일에야 대법원의 재심에서 무죄로 번복되었습니다.
33년 전 사법살인의 최고책임자였던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한나라당 정치인이 되어 있고, 당시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할 때 참여한 판사였던 이회창은 한나라당을 거쳐 자유선진당이라는 새로운 보수정당의 대표가 되어 있습니다.
또 박정희가 이끌던 공화당은 전두환 시절 민정과 노태우 시절 민자당, 김영삼 시절 신한국당을 거쳐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꾼 뒤, 사법사상 암흑의 날인 4월 9일 또다시 '안정'을 외치며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정부는 집권하자 마자 그 무엇이 구려서인지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을 축소 또는 통폐합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과거가 숨겨지는 걸까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4월 9일은 33주년이 되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입니다.
만일 바로 당신의 아버지나 형, 동생이 국가정보기관의 조작으로 엉터리 누명을 쓰고 전격 사형을 당했다면, 당신은 4월 9일을 어떤 심정으로 맞이하시겠습니까?
4월 9일이 단지 총선투표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다시 보는 8명의 사형수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유가족들의 통한(痛恨)
“이제 늙은 데다 혈압이 높고 심장이 약해 기력이 없지만 진상규명을 이루기 전에는 죽을 수 없습니다.”
신동숙(72) 할머니는 기자와 전화에서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녀는 75년 4월 9일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도예종 씨(24년생·당시 51세·삼화건설 회장)의 부인이다. 대구에 살고 있는 그녀는 교사출신이었으나 남편이 사형당한 후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전국을 쫓아다니느라 유일한 재산이던 한옥마저 팔고 지금은 전셋집에 혼자 살고 있다.
4월9일은 도예종 씨 등 당시 진보인사 8명이 박정희 정권의 ‘사법살인’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26년이 되는 날이다.
신할머니는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아직도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있고, 남편의 누명을 벗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답답한 건 우리 국민들”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다들 박정희가 잘했다고 하는데 너무 답답합니다. 비단 인혁당 사건만이 아니더라도 장준하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되더라도 그 사람만은 대통령이 돼선 안될 사람이었잖아요. 민족의 반역자 아닙니까.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을 때려잡던 왜놈 장교였고, 여순사건을 지가 일으켜 놓고 동지들을 밀고해 자기만 살아나온 사람 아닙니까. 그런 박정희기념관을 정부 돈으로 짓는다는 걸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요.”
신할머니는 이제 인혁당 사건뿐 아니라 인권문제와 관련된 일이라면 모두 자기 일처럼 여겨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전국으로 뛰어 다닌다. 지난해 10월 22일 경남 거창에서 열린 거창양민학살사건 위령제에서 그녀를 만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8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 덕대리 대암마을 고 김용원(35년생·당시 40세·경기여고 교사) 씨의 묘소에서 만난 김씨의 아들 민환(36·회사원) 씨는 “그때 나는 11살이었는데,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사건의 내용을 알게 됐다”면서 “그 동안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죄인처럼 살아온 날들이 회한스럽다”고 울먹였다.
그는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우리 3남매를 키우기 위해 안해 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고생을 하셨다”면서 “심지어 내가 다니던 학교 앞에서도 좌판을 하셨고, 우리 집 주위에는 항상 사복경찰이 서성거렸다”고 말했다.
민환 씨의 어머니 유승옥(64) 여사는 추모제가 진행되는 내내 울음을 그치지 않아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알려진 대로 세칭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74년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에 의해 민청학련의 배후조직으로 지목돼 도예종 씨 등 8명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바로 다음날 새벽 전격적으로 사형집행됐던 사건이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이철·장영달 국회의원 등과 구속돼 실형을 살았던 이상익(48) 씨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민청학련 사건을 국가변란사건으로 조작하려다 이 사건 관련자들이 모두 20대 학생들이어서 설득력과 명분이 약하다는 이유로 있지도 않은 조직을 날조해 당시 진보인사들에게 누명을 씌운 사법살인사건”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당시 함께 활동하던 동지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경희대 민주동문회 등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고, 최근에는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옥사한 장석구 씨를 조사 대상으로 선정해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또 유가족들은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들과 함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접수할 예정이어서 역시 처리결과가 주목된다.
한편 이들이 희생된 지 26주기가 되는 4월 9일 오후 7시 명동성당에서 이돈명 변호사와 강만길 선생 등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가 열렸다.
이에 앞서 8일에는 대구와 함안 김용원 씨 묘소에서 유가족과 당시의 동지들이 모인 가운데 각각 추모제가 열리기도 했다.
8명의 진보인사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75년 4월 9일을 왜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부르는지, 사건이 어떻게 조작됐는지 등은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사건 내용을 상세히 알고 싶다면 천주교 인권위원회 홈페이지(http://www.cathrights.or.kr) 사이트에 들어가면 관련자료를 볼 수 있다.
당시 사형된 8명의 인적사항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용원=1935년 경남 함안군 군북면 덕대리 대암마을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서울대 민통련 대의원(4·19 이후 서울대 학생민통련 참가), 64년 동양중고 교사, 소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연행돼 조사받고 나옴, 74년 4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당시 경기여고 교사), 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도예종=24년 12월 25일 경북 경주시 서악 출생. 대구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4·19 이전 청구대학교(현 영남대) 경제학 강사. 60년 5월 영주 교육감 당선. 60년 10월 민주민족청년동맹 가입, 경북간사장. 61년 4월 민자통 중앙상무집행위원회조직부책 한미경제협정반대, 일본경제인입국반대, 2대악법반대 등에 주도적 활동. 64년 7월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대법원 반공법위반으로 징역 3년 선고. 67년 8월 25일 석방. <영남일보> 영천지사장 → 72년 2월 삼화건설 회장. 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 현대공원에 안장.
△서도원=1923년 3월 28일 경남 창녕군 대합면 신당리 출생,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4·19 이전 청구대학교(현 영남대학) 학생주임·정치학 강의, 4·19 이후 민주민족청년동맹위원장, 5·16 이후 혁명재판에서 7년 언도(2년 7개월 복역), 67년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구속(무죄판결), 74년 4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당시 침술사), 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75년 4월 9일 사형 집행, 경남 창녕 선산에 안장.
△송상진=28년 9월 18일 대구시 동구 백암동 출생. 대구사범 대구대 경제학과 졸업. 4·19 이후 교원 노조 활동 및 민주민족청년동맹 총무국장. 57년 대구 덕화중학교 교사. 60년 4월 19일 민민청 경북도위원회 사무국장. 64년 7월 소위 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연행, 무혐의 석방. 74년 4월 인민혁명당 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당시 양봉업. 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현대공원에 안장.
△여정남=45년 5월 대구시 남일동 출생. 경북고,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입학, 경북대 학생회장. 64년 6월 3일 한일회담반대투쟁 주도 학생운동으로 3번 제적, 군입대. 69년 복학. 71년 정진희 필화사건으로 구속. 72년 11월 10일 유신반대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현대공원에 안장.
△우홍선=31년 출생. 6·25 당시 고교생으로 학도의용군 참전. 58년 육군대위 예편. 4·19 이후 통일민주 청년동맹 중앙위원장 역임. 5·16 이후 수배. 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1년형, 집행유예 2년. 한국골든 스템프사 상무. 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75년 4월 9일 사형집행.
△이수병=1936년 12월 경남 의령군 부림면 출생, 부산사범·경희대학교 졸업, 4·19 이후 경희대학교 학생민족통일연맹 위원장, 5·16 이후 구속, 혁명재판에서 15년형 선고, 7년 복역, 74년 4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당시 삼락 일어학원 강사), 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75년 4월 9일 사형집행, 경남 의령군 신반리에 안장.
△하재완=1931년 1월 10일 경남 창녕군 이방면 안리 출생, 단국대학교 졸업, 50년 입대, 57년 중사 제대, 양조장 경영, 4·19 이후 민주자주통일협의회 경상북도 협의회 부위원장, 74년 4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당시 건축업), 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74년 4월 9일 사형집행(대구 칠곡 현대공원에 안장)
또 이들 8명 외에 사형당하진 않았지만 유진곤(37년생) 씨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8년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으나 옥중생활 후유증으로 숨졌다. 그는 53년 부산사범대에 입학, 이수병 씨 등과 함께 사회과학이론연구회 ‘암장’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56년 졸업 후 울산 신암국교에서 교사생활을 거쳐 64년 김해연구소에 재직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74년 5월 1일 느닷없이 들이닥친 수사관들에게 연행돼 인혁당 재건위 연루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또 장석구(27년생) 씨는 <평화신문>과 <대구일보> <민족일보> <대구매일신문> 기자 출신으로 구속돼 75년 10월 옥사했다.
※원문출처 = http://www.masan315.org/ (김주완의 마창역사공부방)'지역에서 본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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