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미국의 속살

김훤주 2009. 9. 20. 08:05
반응형

김종철이 쓴 <오바마의 미국, MB의 대한민국>을 읽으니 제가 모르고 있었던 미국의 모습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혼자 알고 있기가 아까웠습니다.

다른 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 제가 좀 부끄럽게 되겠습니다만. 생각할 거리를 주는 대목도 있고요, 그냥 '아 재미 있구나' 하고 넘어갈 구석도 있는 것 같습니다.


1. 그리 대단하지는 않은 백인 남성의 힘

백인은 유권자의 38%만을 차지하는, 이 나라에서 줄어들고 있는 소수 그룹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래(1964년 압도적 승리를 거둔 린든 존슨을 제외하고) 대통령직을 차지한 민주당원은 모두 백인 남성의 표 없이도 선거에서 이겼다.

민주당은 백인 여성, 흑인 남성 및 여성 그리고 히스패닉 남성 및 여성들의 압도적 다수가 그들을 찍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었다.(22쪽)

2.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조차 한 적 없는 콜럼버스

콜럼버스는 …… 1492년 8월 3일 출항하여 10월 12일, 현재 바하마 제도의 와틀링 섬으로 추정되는 곳에 상륙했다. 콜럼버스가 상륙한 바하마 제도나 쿠바는 미국의 동남족 끝에 있는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그런데 왜 대다수 미국인들은 그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을까? 미국은 콜럼버스가 바하마 제도에 상륙한 날인 10월 12일에서 가장 가까운 월요일을 해마다 공휴일로 정하고 거창한 행사들을 벌인다. 우스꽝스럽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희극 아닌가?(30쪽)

3. 미국 흑인 비율은 역사적으로 보면 낮은 편

영국이 (18세기) 한 세기 동안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수출'한 노예가 '적어도 600만 명'이었다니 다른 유럽 국가들의 '선적'까지 계산하면 그 수는 훨씬 커질 것이다. 그리고 1865년 남북전쟁의 결과로 노예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흑인들이 미국 땅으로 팔려갔을까?

지난 2006년 10월 17일 미국 인구는 3억 명을 넘어섰다. 2005년 통계를 보면 미국인 중 흑인의 비율이 11.9%였으므로, 3억 명 중 3570만여 명이 흑인인 셈이다. 그런데 1963년부터 영국이 한 세기 가까이 팔아넘긴 노예 600만여 명과 그 이후 미국으로 강제 이송된 흑인들이 300년 동안 정상적으로 결혼해서 자손을 늘려갔다면 인구가 겨우 3500만 명 정도였을까? 흑인들이 백인에 비해 자식을 더 많이 낳는 추세를 감안하면 지금 미국의 흑인 인구는 1억 명을 넘겼어야 정상이 아닐까?

우리는 여기서 엄청난 수의 흑인들이 비참한 노예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자유를 찾아 달아나다 백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북아메리카 본토의 내전이나 해외에서 벌어진 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한 흑인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41~42쪽)

4.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엄청난 노예 소유주

버지니아에서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조지 워싱턴 1732~99)는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토지측량관이 되어 6년 동안 일하고, 21살 때 프랑스-인디언 전쟁에 참여했다. 1759년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와 결혼한 워싱턴은 아내가 부모한테 상속받은 노예 3000여 명과 땅 1만7000에이커를 재산으로 갖게 되었고, 자기 자산인 땅까지 합치면 2만2000에이커를 소유한 버지니아 최대의 부자였다.

그는 1789년부터 1797년까지 8년 동안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물러났다.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 많은 사람들이 종신 대통령으로 남아달라고 간청했으나 그는 '더 연임하면 장기집권을 위한 무서운 정치싸움이 벌어질 것'이라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워싱턴이 그렇게 말하고 물러난 것은 사실이지만, 대통령이 된 뒤 연방정부 관리 전체의 수가 그가 소유한 노예의 수보다 적은 것이 '연임 사절'의 원인이었다는 설이 나중에 제기되었다.

독립전쟁으로 세운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이 엄청나게 많은 노예의 소유주였다는 사실은 그 이후 미국에서 전개될 역사를 예고하는 주요한 지표였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아메리카의 비극'이 단시일에 쉽게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근거나 다름없었다.(49~50쪽)

5. 킹 목사 도청을 명령한 케네디 대통령

혁신적인 정책을 실행한 케네디도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받던 마틴 루터 킹을 포함한 수많은 개인들을 도청하라고 연방수사국FBI에 명령했다(이런 도청은 나중에 마틴 루터 킹에게 치명적 타격으로 나타난다).

린든 존슨(케네디의 후임 대통령)은 1967년 '새해 의회 연설'에서 과거(케네디 행정부 시절)의 염탐질과 도청에 관해서 언급했다. 비록 존슨도 킹을 계속 도청했지만.(59~60쪽)

1963년에 법무부 장관 로버트 케네디의 서면 지시를 받은 FBI는 킹 목사의 전화를 도청하기 시작한다. 당시 FBI 국장 에드가 후버는 공산주의자들이 민권운동에 침투할까봐 그랬다고 주장했으나 그런 증거가 나타나지 않자, 그후 5년 동안 킹을 그 운동의 주도적 위치에서 몰아내려고 도청 테이프를 '활용'한다.(79~80쪽)

6.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논문 표절

1990년 11월 9일, <월스트리트 저널>이 '킹 연구자들, 실망스럽게도 골치 아픈 패턴을 발견하다'라는 기사를 내보내자 <보스톤 글로브>와 <뉴욕타임스>를 포함한 신문들이 비슷한 내용을 보도했다.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부인 코레타 스콧 여사가 킹 박사의 논문들을 스탠포드대학교에 기증했는데, 1980년대 말에 그 논문들을 분류해서 목록을 작성하던 프로젝트 담당자들이 킹의 보스턴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인 <폴 틸리히와 넬슨 위먼의 신 개념 비교>가 보스턴대에서 3년 전에 다른 학생(잭 부저)이 제출한 학위논문에 담긴 많은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킹 논문 프로젝트'에서 킹의 초년기 삶에 관한 연구를 지도한 랠프 E. 루커에 따르면, '대승불교의 주된 특성과 법리'라는 킹의 논문은 거의 전적으로 제2의 전거에서 베낀 것이었다. …… 캐나다의 브리티시콜럼비아 대학교는 킹이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남의 저작을 대학 시절 논몬에 도용한 것을 가장 심각한 표절의 예시로 들었다.(82~83쪽)

7. 영국과 달리 미국에는 훌리건이 없는 까닭은? 

얼마 전 미국에 오래 산 교민한테 들은 진담 반 농담 반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세계에서 스포츠 경기장이 가장 뜨거운 나라가 미국인데, 그 나라에는 왜 영국의 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훌리건 같은 패거리들이 없는지 이해가 가느냐"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야구나 농구, 미식축구나 아이스하키 경기장에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뒤지는 데 '열을 받아서' 상대팀 응원단에 시비를 걸다가 주먹을 휘둘러 이라도 한두 대 부러뜨리면 적게는 수천 말러에서 많게는 1만 달러도 넘게 들여 치료를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건강보험제도가 잘 되어 있는 영국에서는 그런 부담이 적어서 훌리건들이 설친다는 뜻일 것이다.(120쪽)

8.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이 미국총기협회 회장

다큐멘터리(2002년 제작한 <보울링 포 콜럼바인>)의 감독과 주연을 겸한 마이클 무어가 미국총기협회(NRA) 회장인 유명한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1924~2008)의 집 앞에서 '깜짝 인터뷰'를 한 것이다.

'콜럼바인'(총기 난사로 13명이 죽고 24명이 다치는 사건이 일어난 고등학교 이름)처럼 미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이 터졌는데도 협회가 총기 보유 자유권만을 계속 주장하고 제한에는 반대할 것이냐고 무어가 끈질기게 추궁하자 헤스턴은 당황하다가 끝내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 이 영화의 비판자들은 "치매에 걸린 데다 전립선암 증세를 보이던 그를 그렇게까지 괴롭혀야 했느냐"고 비난했지만, 어쨌든 NRA의 현직 회장이던 헤스턴의 대답은 설득력이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벤허>와 <십계> 같은 영화를 보고 그렇게 좋아하던 찰턴 헤스턴이 왜 총기협회 회장으로 '미국에서 손꼽히는 로비스트 집단'의 대표 노릇을 했는지, 궁금하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128~129쪽)

9. 개신교 신자들은 미국에서도 보수 집단

2004년 대선은 부시의 연임을 위해 다시 총동원 태세에 들어간 보수세력과 존 케리를 후보로 내세운 민주당 지지자들의 대결이었다./ 2003년 3월 20일에 이라크를 침공하기 시작해서 확전 일로로 걸어간 부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렸으나 이번에도 기독교 보수파의 열성적인 지지에 힘입어 재선에 성공했다. CNN의 출구조사에 따르면 '매주 교회에 가는 개신교 신자'의 68%가 부시에게 투표한 반면 31%가 존 케리에게 표를 준 것으로 나타났다.(146쪽)

2008년 11월 대선 결과를 분석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바마가 흑인 표의 95%를 차지한 것은 그렇다 치고, 여성 표의 56%를 가져간 것도 예상된 일이었다.

그런데 두드러진 현상은 레이건과 부시 부자가 공화당 후보로 나서서 당선된 1980, 1984, 1988, 2000, 2004년에 민주당 후보들이 차지했던 기독교 신자들의 표에 비해 오바마의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신교의 표 45%(매케인은 54%), 천주교의 표 54%를 받았다. 유태교 표에서는 오바마가 78 대 21로 매케인을 압도했다. (148~149쪽)

10. 매카시와 친구였던 케네디 대통령

매카시즘의 광풍은 꼬박 4년 동안(1950~54) 미국사회를 '빨갱이 공포심red complex'로 몰아넣는다. …… 당시 천주교에서 유력한 집안은 조지프 케네디 1세(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가문이었다. 케네디는 매카시와 가까운 친구가 되어 별장에 자주 초대하는가 하면 상당액 정치자금까지 준다. 매카시는 그의 3남인 로버트 케네디의 영세 때 대부를 맡고 나중에는 '정치적 선배'로서 상원에서 함께 일한다.

존 F. 케네디는 상원의원 시절 매카시의 광적인 선동을 보고도 매카시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는 왜 그러느냐는 질문을 받아 이렇게 대답한다. "빌어먹을! 매사추세츠주 유권자의 절반이 매카시를 영웅으로 보니까요."

매카시는 1953년에 '정부활동조사위원회' 책임자가 되어 육군 안의 '공산주의자들'을 색풀하려고 나서지만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한다. 공격에 나선 육군은 1954년 초에 그를 고발하고, 그는 4월에 위원장 자리를 물러난다. 그는 1957년 5월에 간염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알콜중독이 원인이라는 설이 널리 퍼졌다.(167쪽)

이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만, 사실 별 내용이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그래서, 그래서 어떻다는 얘기냐? 이렇게 따지셔도 제가 별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뭐,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냥, 그렇다는 사실 정도를 알아 놓기는 해야 하지 않겠어염?"

실제로는 잘 모르면서도 마치 잘 아는 것처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는 어떤 덩어리 전체의 질감이라든지 구체적 숨결 따위를 모를 때 그런 오만을 떨기가 더 쉬운 것 같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단순하지 않은 속살을 엿보게 해주는, 나무로 치자면 잘린 그루터기 나이테 같은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훤주

오바마의 미국, MB의 대한민국 - 10점
김종철 지음/시대의창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