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쯤 낯선 번호가 휴대전화에 떴다. 받아보니 택배 기사란다.

"김주완 씨 맞지예?"
"예, 그런데요."
"택배 배달할 게 있는데, 지금 집에 누가 계십니까?"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최근 인터넷으로 물건을 구매한 일도 없었다.

"배달할 물건이 뭐죠?"
"아 네, 주류라고 되어 있는데 술 종류인 것 같네요."
"보내는 사람이 누구죠?"
"○○그룹에서 보내는 건데요. 지금 집에 아무도 없습니까?"
"그게 아니라, 죄송하지만 그거 좀 반송시켜주세요."
"네? 왜요?"
"아, 그거 제가 받고 싶지 않거든요. 다시 보낸 사람 쪽으로 반송할 수 있죠?"
"예, 되긴 됩니다만…. 여기 적혀있는 xxx-xxxx 전화번호가 ○○그룹 맞나요?"
"예 맞을 겁니다. 거기로 다시 보내주세요."
"그럼 배송료는 착불로 할까요?"
"예 그러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작년 설에 받았던 한 기업체의 선물.

나는 신문기자다. 벌써 추석 명절 시즌이 되었나 보다. 아직 20여 일이나 남아 있는데, ○○그룹은 참 일찍도 시작한 것 같다. 지난 설이나 작년 명절에도 똑같은 일을 여러번 반복해야 했다.

오늘처럼 택배기사가 배송 전 나에게 전화라도 해줄 경우 보낸 사람에게 바로 반송시킬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그냥 경비실에 맡겨놨을 때는 참 난감하다. 다시 택배기사를 불러 배송시키기도 번거로운 일이다.


그럴 경우 회사로 가져가 기자협회에 '처리'를 위탁한다. 기자협회는 나처럼 기자회원들이 불가피하게 받은 명절 선물을 '아름다운 가게'나 사회복지시설에 기탁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기자협회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도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다. 보낸 기업체나 관공서의 입장에서는 기자들이 그냥 순순히 받아먹은 걸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 신문사는 촌지나 선물 안 받는다고 하더니, 보내니까 받긴 하네."

오늘 나에게 술을 보내려고 했던 그 기업체는 나와 아무런 연고가 없다. 거기 임직원 중에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도 없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내 직업이 기자이므로 '업무상' 아는 관계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경제부나 사회부처럼 그 기업을 취재할 일도 없는 부서의 데스크다. 그럼에도 그 기업체는 내 휴대전화 번호는 물론 내가 사는 집 주소까지 알고 선물을 보내려 했다.

기자의 전화번호쯤이야 반쯤 공개된 것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내 주소는 어떻게 알아냈을까? 누가 가르쳐줬을까? 참 대단한 기업이다.

관공서나 기업체로부터 받은 선물을 아름다운 가게에 기탁한 후 받은 영수증.


어쨌든 나는 그런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선물을 받을 이유가 없다. 보내는 입장에선 분명히 '잘 봐 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면식도 없는 내게 이런 걸 보낼 까닭이 없다. 1억이나 2억 원 정도 된다면 모르겠지만 고작해봤자 10만 원 안팎의 선물이 내 삶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괜히 받아서 불편한 마음과 신경쓰일 일이 10만 원보다 더 크다.


내가 기자로서 일한 대가는 나를 고용한 신문사에서 받으면 된다. 설사 과거에 내가 썼던 기사 중에 그 기업이나 관공서에 도움이 된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건 신문기자로서 한 일이지 내 개인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내가 하는 업무와 관련하여 굳이 감사 표시를 하고 싶다면, 우리 회사에 하면 된다. 신문사에 감사표시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광고'를 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처럼 불편한 선물보다 훨씬 고마워할 것이고, 일반 국민에게 기업 이미지도 좋아질 것이다. 광고료가 선물 비용보다 비싸다면, 신문 한 부라도 더 구독해주면 좋겠다. 양주 한 병 값이면 1년 구독료는 족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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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기록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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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람있는풍경 2009.09.11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시한번...>어이구 그 성깔은!!! ...ㅋㅋㅋ..나 같으면? 이렇게 난데없이 습격당하는 도덕을 지킬수 있을까...아니 지켰을까....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뎅!!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기록하는 사람 2009.09.11 16: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맙습니다. 본문에도 써놓았듯이 사실 받아놓고 찜찜하고 부담스러운 기분이, 받아서 덕 되는 것보다 더 크더군요.
      몇 억 준다고 하면 고민을 좀 해보겠는데...ㅋㅋ

  2. 울라 2009.09.11 15: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주완님처럼 양심있는 기자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요즘 기자들은 기사를 기사로 쓰는 것인지 칼럼을 쓰는 것인지 광고를 쓰는 것인지 모를 때가 많거든요.
    글발이 모자른 건지, 돈 받고 쓰는 건지, 아님 불편한 선물을 받아서 인지 참 양심없는 기자들의 기사들을 접할때가 많지요.
    김주완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자란 직업에 충실하다면 더이상 불편한 기사들을 보지않게 되겠지요.
    김주완님 홧팅입니다 ^^

  3. 임현철 2009.09.11 15: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끈끈한 고집이 매력인 김주완 기자님!
    그 선물 복지기관에 보내는 것도 좋겠네요.

  4. 탐진강 2009.09.11 16: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대단한 김주완 기자님이네요.
    아직도 명절 마다 선물을 주는 재벌들이나 대기업이 많나 봅니다.
    언론에 예전에 촌지나 고가 선물의 악습이 많다고 하던데요.
    언론이 제대로 바로서야 할텐데 말입니다.

  5. Favicon of http://jmail.tistory.com/ j편지 2009.09.11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완전 좋은 말이네요^^ 양주 살 돈으로 차라리 신문구독해 주는게 좋다...ㅋㅋ 짱입니다~~

  6. 먼 독자 2009.09.11 17: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 정말 마음에 쏙 듭니다. 눈팅만 하다가 댓글 한 자 적기 쑥스럽습니다만 그래도 기어이...^^
    단지 선물 돌리는 기업행태에 제동을 거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대안(?)을 담담히 적어놓으신 게 마음의 저 깊숙한 한 곳을 건드립니다.
    블로그를 구독하면서 자주 받는 느낌인데..... 두 분의 올곧은 모습 적잖이 멋지십니다. 건투를 빌어요.

  7. Favicon of http://. 헐헐 2009.09.11 17: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거..김기자님은 몇억 준대도 틀림없이 안 받을 분이구만..암튼 글 잘보고 있습니다. 수고하세욤.

  8. Favicon of http://jiwon1.tistory.com/ sticker 2009.09.11 18: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감 입니다. 주로 보내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김기자님 같은 분이 많앗슴 좋겠습니다.

  9. Favicon of http://archvista.net/ 아크몬드 2009.09.11 1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에 sticker 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멋집니다.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lovessym 크리스탈 2009.09.11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 기업들 김기자님께는 무서워서 선물 못하겠네요.... ㅎㅎㅎ

    셤은 잘 보셨나요~~~~

  11. 2009.09.11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2. Favicon of http://lovetree0602.tistory.com 초록누리 2009.09.12 0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감많이 합니다.
    김기자님 같은 분이 너무 희소해서 탈이지요.
    명절마다 진짜 왜 선물은 보낼까요?
    저도 비슷한 일 있었는데(제가 아니라 남편) 찝찝해서 그렇더라구요..

  13. 보라매 2009.09.12 03: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중에 한국갈 때 술 선물하면 되겠다 했었는데...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대신 한 병 가지고 가서 둘이서 까죠..ㅋㅋㅋ

    아니 셋이군요. 옆의 김모블로거...
    아니 넷이군요. 토론토 블로거...
    아니 다섯이 될수도 있네요.
    여섯, 일곱, 여덟...

    술병도
    두병
    세병
    넷, 다섯,여섯...

    벌써 취합니다.

  14. Favicon of http://bada92.tistory.com 무릉도원 2009.09.12 0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멋지십니다....저같으면 워낙 술을 좋아해서 꿀꺽 했을지도....ㅎㅎ.....
    다가오는 한가위에는 끈끈한 정으로 주고 받는 선물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휴가 잘 보내고 계시죠?.....주말 잘 보내시고요...*^*

  15. 청학골 2012.02.23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액선물은 받지않고 1-2억은 몰라도....라면 고액은 많이 수수한 이력이 있어보이는군요
    글 쓰시느라 수고 많으셨오이다.

  16. Favicon of http://365happiness.tistory.com 마음농부 권영금 2015.09.18 1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권영금입니다.
    팸투어 두 번 함께 했었어요.
    글을 읽으며 정말 맘이 따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