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국문학자가 밝혀낸 역사의 불편한 진실

기록하는 사람 2009. 9. 5.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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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까지 기자노릇을 해오면서 가장 답답하게 여겼던 일이 '민간인학살' 문제였다.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사건을 두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분개하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경악할 줄 아는 한국사람들이, 그리 멀지도 않은 시기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 100만 민간인학살 만행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선 무심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역사에 대한 무지 탓으로 봐야 할까, 내 치부를 보지 않으려는 비겁한 외면일까, 그것도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공포체험과 그 트라우마로 인한 의도적 망각일까.

신경득 교수의 돈 안되는 연구 <조선 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

지난 7월 경남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에서 발굴된 학살 암매장 유골.


아직도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피학살자의 자식들이 '좌익으로 몰린 아버지'에 대한 가역반응으로 과도한 반공의식을 드러내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친일과 친미·반공·학살의 과거를 감추고 합리화하려는 수구반동세력이 그러는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진보와 개혁을 외치고, 진실과 정의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도 이 문제를 파헤치고 해결하는데 무관심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시민단체는 '레드컴플렉스'를 자극할까 두렵다며 외면했고, 일부 운동단체는 한때 반미운동의 소재로 써먹다가 약발이 떨어지자 멀어져갔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조중동은 초지일관 침묵을 지키고, 그 외 서울지역 일간지 중에도 제대로 파헤치거나 물고 늘어지는 매체는 없다. 한때 미국 AP통신의 노근리사건 보도를 계기로 이게 좀 뜬다 싶었는지 일부 신문사에서 '발굴보도'니 '탐사보도'니 낯뜨거운 자화자찬식 명패를 붙여 기사 몇 개 내보낸 뒤, 특종상 한 번 받고나니 그 후론 다시 모르쇠다.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 중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이 문제에 대한 연구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동안 민간인학살을 다룬 논문이나 저서는 대부분 역사학자가 아닌 사회학자의 몫이었다. 역사학자가 다루기엔 너무 민감한 당대의 문제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구비 지원을 받기가 여의치 않은 '돈 안되는 주제'이기 때문일까? 나는 후자에 더 큰 혐의를 두고 있다.

이런 사람이나 단체들의 태도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것이다. 각자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용할 궁리만 있을 뿐 진정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인간적인 분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2002년 국문학자인 신경득 교수가 쓴 <조선 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살림터, 2002)이 나왔다. '돈 안되는 연구'를 한 것이다. 신 교수는 서문에서 "전쟁 초기 한국군을 지휘했던 군인·관료·정치인 등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좌절과 분노를 느꼈다. 회고록이 대개 그러하듯이 그들의 진술은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자기자랑과 자기합리화를 하는 데 급급하였다. (…) 그들이 한때나마 이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허탈감과 무력감이 나를 엄습하였다."고 술회했다.

신 교수의 좌절과 분노는 그 어떤 역사학자나 사회학자도 들춰보지 않았던 전쟁 초기 북측에서 발행한 신문·잡지들을 찾아 읽게 만들었고, 그 결과물이 이 책으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신 교수는 그 책을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무참하게 학살당한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이며 "빨갱이로 부를까 두려워 숨죽여 살아온 유가족을 위한 대자보"라고 했다.

그랬다. 이 책은 충격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는 현실로 볼 때 위험한 내용도 적지 않다. 그러나 신 교수는 그냥 단순히 <로동신문>과 <해방일보>, <조선인민보>, <민주조선>, <문학예술>에 실린 민간인학살 기사들을 소개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동안 남쪽에서 나온 모든 기사와 논문, 저서에서 나온 팩트와 교차확인을 거쳐 다시 학자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국사회에서 민간인학살의 전모를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인민군이 자행한 우익인사 학살도 제대로 정리된 기록이 없다. 한국의 기득권층은 인민군의 만행을 밝혀내는 것조차 싫어한다. 그것이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동전의 뒷면에 있는 국군과 경찰, 미군의 만행이 함께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신 교수의 이 책은 자칫 파묻혀 버릴 뻔했던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학살의 북한측 기록을 햇빛 아래로 꺼낸 중요한 저술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나온 지 3년째 되던 2005년 비로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 공포됐고, 이 법에 의해 2006년부터 국가 차원의 조사와 진실규명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신 교수가 쓴 이 책이 진실규명 작업에 중요한 참고서가 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지난 6월 5일 정년퇴임을 앞두고 고별강연을 한 신경득 교수.


신 교수는 책의 마무리에서 이렇게 썼다.

"역사는 산 자의 것이기도 하지만, 죽은 자의 것이기도 하다.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기도 하지만, 진 자의 것이기도 하다. 나는 억울한 사람이 적은 나라가 아니라 억울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고 싶다."

인간에 대한 신 교수의 순진무구한 애정이 녹아 있는 말이다. 나는 이 땅의 모든 학자와 기자들이 이 말을 기록하는 사람의 기본자세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자다운 학자, 스승다운 스승을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에서 이런 스승을 모셨다는 게 자랑스럽다.

조선 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 - 10점
신경득 지음/살림터

※이 글은 <아침나라 신경득 선생님 정년퇴임 기념문집 한민족문학의 길 찾기>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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