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이젠 독재의 증거물이 된 '국민교육헌장'

기록하는 사람 2009. 9. 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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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아침 산책을 나가봤다. 집앞에서 보이는 산을 따라 걷다보니 저절로 산호공원이라는 델 오르게 됐다. 말이 좋아 '공원'이지 규모가 작아 인근 주민들이 아침 운동삼아 오르는 곳일뿐 일부러 놀러 갈만한 곳은 아니다.

인근에 사는 나로서도 참 오랫만에 찾은 곳이다. 산정에 충혼탑이 있는 공원이라서인지 이런 저런 비석과 조형물들이 많다. 마산과 이런 저런 관계가 있는 시인들의 시비도 있다. 그런데 오늘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석물이 하나 있었다. 박정희가 국민을 '황국신민'쯤으로 보고 만들었던 '국민교육헌장'이 빼곡히 검은 돌에 음각되어 있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에서부터 "서기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까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이 '국민교육헌장' 전문을 마지막의 날짜는 물론 '대통령 박정희'까지 좔좔 외워야 했다. 그 때 얼마나 많이 외우고 봉독했던지 지금도 문장이 술술 나올 정도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국민을 훈육의 대상으로 삼고 국가주의를 강요하며, 민주보다는 반공을 앞세우는 박정희의 통치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된 글이다. 심지어 '헌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대통령 박정희' 이름까지 넣어 외우라고 강요했으니 거의 황제의 교지나 칙어와 다름없었다.

마침 엊그제(9월 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에 의한 인권침해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하면서 국민교육헌장에 맞서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교수들을 해직, 투옥시켰던 사건을 포함시켰다.


이 '국민교육헌장'을 새긴 석물을 만든 날짜는 헌장이 발표된 2년 뒤인 1970년 12월 5일이었고, 설립자는 '마산구락부'였다. 당시의 유지들이 모인 단체였을 것이다. 글씨체는 '삼정 이재문'이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들로선 당시 박정희의 통치철학에 충실히 따르겠다는 표시로 세웠을 터였다.

이제 '국민교육헌장'이 구시대 독재의 증거물로 전락한 지금, 이 석물을 세웠던 '마산구락부' 회원들은 산호공원에 남아 있는 이 증거물이 아직도 자랑스러울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교육헌장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 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12.5 대통령 박정희

참고로 인터넷 브리테니커 사전에 있는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소개와 진실화해위원회의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보도자료'(첨부파일)를 덧붙인다.

국민교육헌장 (한국 교육)  [國民敎育憲章] 출처: 브리태니커

박정희 정권의 국가주의적·전체주의적 교육 이념을 담은 헌장.

1968년 12월 5일 공포되었으며 철학자 박종홍(朴鍾鴻) 등이 기초위원으로 참여했다. '반공'과 '민족 중흥'이라는 집권세력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이상으로 삼고 그 실현을 국민교육의 지표로 삼은 까닭에 국민교육헌장은 선포 당시부터 정치적 논란을 빚었다. 국민교육헌장은 곧바로 한국교육의 이념과 동일시되어, 1960년대말~1990년초에 초·중등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은 통째로 헌장 내용을 외워야 했다.

'국민에 대한 국가의 우위'로 요약되는 이 헌장은 천황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고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일제의 '교육칙어'(敎育勅語)를 그대로 본뜬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는데, 이에 대한 공개적인 첫 비판은 유신체제하인 1975년 3월 1일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의해 제기되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국민교육헌장에 맞서 "우리는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고, 압제와 불의를 거부하는 민주국민이다"로 시작하는 '민주국민헌장'을 발표했다.

국민교육헌장의 정치적 성격은 그 비판자들을 '반체제 행위자'로 엄단한 데서 역설적으로 잘 드러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신체제 말기인 1978년 6월 27일 송기숙·명노근·이홍길을 비롯한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발표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었다. 이는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교육의 참 현장인 학원이 인간화되고 민주화되어야 한다"면서 학원민주화와 제적된 학생들의 복교(復校), 민주교육을 질식시키는 국민교육헌장과 유신헌법의 철폐를 요구한 사건으로, 성내운·이효재 교수 등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해직·투옥되었다.

국민교육헌장은 선포된 지 25년 만인 1993년 초등학교 교과서와 정부 공식행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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