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결선투표제 하면 '도착증'이 없어진다

김훤주 2009. 8. 1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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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결선투표제를 하면, 대통령이 다수를 대표할 수 있는데다 갖가지 정치 세력이 연합할 수밖에 없으므로 통합도 되는 한편 독단적 권력 행사도 줄어들 수 있다는 글을 하루 전에 썼습니다.
(관련 글 : MB, 왜 결선투표제는 제안하지 않았을까)

저는 여기서 더 나아가 국민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야 하고 그리하면 우리나라가 '술 권하는 사회'에서 한 발자국이나마 더 멀어지는 보람까지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2002년 대선에서 보기를 찾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별로 눈길을 끌지 못하던 노무현이 무섭게 떠오르고, 유력 후보였던 정몽준이 선거 막판에 노무현 지지를 밝히며 사퇴했다가 다시 물리는 등, 역대 대선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역동적이었기에 보기로 삼았습니다.

1. 아무렇지 않게 소신을 뒤집는 사람들

평소 소신과 다른 모습을 보이거나 앞서 한 말을 나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뒤집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기억하실는지 모르지만, 박태주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민주노총 전문기술노련 위원장을 한 적이 있고, 노무현 당선 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들어가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이는 2002년 10월까지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다가 탈당을 했습니다.

창원 만남의 광장 유세 노무현. 경남도민일보 신문.

월간 <말> 2002년 11월호 인터뷰에서 박태주는 말했습니다. "만에 하나 노무현이 정몽준과 연대를 모색한다면 어찌 하겠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입니다. "노무현 개인이 아니라 노무현의 '개혁성'을 지지하는데, 정몽준과 연대는 개혁성에 위배되므로 미련 없이 갈라설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몽준 단일화 합의 때는 딴판이었습니다. 11월 24일 노무현으로 단일화되기 앞서 박태주는 <한겨레21>에 '노 후보로선 엄청난 리스크'라는 글을 싣고, 단일화하면 안 된다는, 자기가 전에 밝힌 태도를 두고 '음모'일 뿐이라 잘라 말합니다. 이어집니다. "변화와 발전을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두 후보가 담아내었다", "모든 논리와 음모를 일축하는 감동이다."

이상하지 않습니까?(저는 섬뜩하기까지 합니다만.) 앞엣말에 따르면 뒤엣말은 야합입니다. 또 뒤엣말대로라면 앞엣말은 그야말로 '음모'입니다. 그러니 누가 봐도 분명한 정신분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부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전체 사회의 정신분열이라 해야 할까요?

2. 남의 정당 후보를 강요하는 진보정당 당원

창원병원 앞 네거리 권영길. 경남도민일보 사진.

12월 17일 밤 정몽준이 노무현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적어도 겉보기로는 보조를 맞춰오던 정몽준이 자기 표를 믿고 선거운동 마지막 날에 친 '장난질'입니다. 덕분에 많은 이들이 괴로워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던 제 둘레에도 그런 사람은 많았습니다.

"원래 생각대로 투표할 것이냐 아니면 위기에 빠진 노무현을 구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어떤 이는 그대로 권영길을 찍었습니다. 다른 이는 부부가 권영길과 노무현으로 표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집안 식구가 통째로 권영길에서 노무현으로 바꾼 이도 없지 않았습니다. 단판에 당락이 결정되니까 이런 자충수가 나옵니다.

심지어, 민주노동당의 핵심 당원이면서, 노동조합운동에서 지역뿐 아니라 전국 차원에서 지도력을 행사했던 어떤 인물은, 자기가 아는 유력 당원 여럿에게 전화를 걸어 "권영길 대신 노무현을 찍어라"고 을러대듯이 요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해당(害黨) 행위일 뿐 아니라 자기자신의 정치적 존재 이유를 바로 부정하는 정치적 자살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3. 자해·가학 통해 도착된 쾌감 강요하는 현행 대선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하면 이런 사회 전체 차원의 정신분열증 확산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정몽준의 '장난질'은 아예 생길 수도 없습니다. 민주노동당 당원이면서도, 이회창의 당선을 막아야 한다며 노무현 지지를 같은 민주노동당의 다른 당원들에게 요구하는 자해공갈단이 사라질 것입니다.(이런 일은 진보신당에서도 생길 수 있습니다만, 2002년에는 진보신당이 없었기에 이렇게만 씁니다.)

1차 투표에서 유권자들은 저마다 평소 소신에 따라 투표를 하면 그만입니다. 여기서 과반 득표 후보가 나오면 바로 당선이 확정되겠지요. 그렇지 않은 경우 1등과 2등이 가려지고 예선 탈락 명단이 확인되면, 1등·2등과 나머지 정치 세력의 합종연횡에 따라 자기 책임 아래 2차 결선투표에 참여하면 됩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투표 전날 그토록 많은 이를 밤새 고민하게 만든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 같은 '생쑈'는 발 붙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에 앞서, 박태주로 하여금 '한 입으로 두 말 하게' 만든, '정책·지향이 뚜렷하게 차이나는' 후보들의 단일화에는 후보 본인을 포함해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평소 소신과 다른 후보를 골라 잡아야 하는 고통도 줄어들고, 자기가 아는 다른 이들에게 그런 고통을 강요하는(또는 강요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가학(加虐)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 가학과 고통 속에서 쾌감을 느끼는 도착증도 사라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투표를 앞두고 이런 '같잖은' 고민에 빠져 '죽도록' 술을 마시는 사회 현상만큼은 분명히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 결선투표 제도 도입을 반대할 세력이 한나라당말고 하나 더 있었군요. 그것은 바로, 술 만드는 공장이랑 술 파는 가게가 되겠네요. 하하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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