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8월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이 전격 사퇴했다. 그의 아버지 신상묵의 친일 행적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박종표(朴鍾杓)에 대한 반민특별검찰부의 제2차 '피의자신문조서'(사진=정운현 블로그 http://blog.ohmynews.com/jeongwh59) 총4권으로 나온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도서출판 선인)
당시 언론은 마치 숨겨져 있던 대단한 비밀이 새롭게 밝혀진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신상묵의 친일행적은 정부 수립 직후 설립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던 친일헌병보 박종표의 조사 및 재판기록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즉 국가의 공식 기록에 이미 다 나와 있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대단한 것처럼 인구에 회자될 수 있었던 것은 '반민특위의 조사 및 재판 기록'을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1993년 도서출판 다락방에서 총 17권 분량으로 <반민특위 재판기록> 영인본을 묶어냈지만, 워낙 방대한데다 문서가 온통 한자로 되어 있고, 그것도 초서로 휘갈겨 쓴 글이어서 일반인이 어렵게 입수했다 하더라도 제대로 읽기조차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차에 마침내 그 어려운 기록을 한글로 쉽게 풀어 쓴 책이 총 4권으로 묶여 나왔다. 친일문제 전문연구자인 정운현 씨가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도서출판 선인, 4권 1세트 8만 원)을 펴낸 것이다. 이 책은 당시 특위가 취급한 688명의 친일파 중 재판을 받은 78명, 그 중에서도 비교적 자료가 잘 남아 있는 64명에 대한 재판기록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체로 풀어썼다.
한국 근현대사와 친일문제에 특별한 관심이 있거나, 내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제법 떵떵거리고 살았다는 사람들이라면 필수적으로 구입해 봐야 할 책이다. 신기남 전 의장의 아버지 신상묵처럼 64명의 이름에 없다고 해서 안심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종표의 조사기록에 신상묵이 나오듯, 전혀 엉뚱한 다른 친일파나 증인의 입에서 내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편역자인 정운현 씨의 허락을 얻어 64명의 친일파 중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던 8명의 친일행적을 요약해 소개한다.
책은 이름 가나다 순으로 서술돼 있으나, 특히 마산 3·15의거 때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를 최루탄으로 처참하게 살해하고 시신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수장시킨 원흉 박종표(당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의 친일행각부터 소개한다. 그는 신기남 의장의 아버지 신상묵 헌병군조와 함께 숱한 독립운동가를 체포, 고문, 투옥했던 악질 헌병보였다.
◇박종표 = 일본명 아라이(新井), 부산헌병대 2등 헌병보(병장), 헌병군조인 신상묵과 함께 독립운동가 황학명, 조영관, 서운수, 신동균, 박용달, 추교진, 김우준, 이창석 등 을 체포, 고문, 투옥시켰고, 부산부 세무과 직원사건에서 김대근을 고문 치사시켰다. 또 그들에게 고문을 받은 최용찬은 후유증으로 병사했다. 이 외에도 부산부두미곡사건, 양태의 사건, 김상수 사건, 김영민 사건, 손유호 사건, 부산학생사건, 무궁당 사건 등 무수한 애국청년 투사를 박해함으로써, 판명된 현저한 피해자만 50명에 달랬다. 3.15의거 당시 발포사건으로 재판을 받을 당시의 경찰관들. 맨 오른쪽이 일본 헌병 출신 박종표.
신상묵, 박종표의 고문 수법은 방화용 수조에 수 차례 처넣는가 하면 얼음물을 뿌리고 부채질 하기, 3일간 급식과 취침을 중단한 후 목검으로 난타·난축하기 등이었다. 증인으로 출석한 신동균은 당시 신상묵과 박종표의 고문을 이렇게 증언했다.
"신상묵과 박종표가 구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튿날 오후까지 잠도 재우지 않고 먹이지도 않으며 대검으로 나를 구타하고는 유치장에 처넣었습니다. 제3회부터는 매일같이 고문을 하였습니다. 방식은 방화용 수조의 얼음 위에 정좌케 하고는 얼음물을 퍼붓고 목검으로 난타한 다음 얼음 속에 전신을 처넣었다가 매일 5회 가량 연속으로 부채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구타는 물론 심지어 머리를 난타하기도 하고, 또 머리 위에 얼음을 얹는 등 갖은 방법으로 고문을 하였습니다. 박종표는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1분만에 옷을 벗고 입도록 강요하였으며 고문시에는 두드러지게 악독하였습니다. 고문으로 실신, 졸도한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또 다른 증인은 이렇게 진술했다.
"뜨거운 화로를 머리 위에 들고 있게 하고, 두레박 줄에 묶어 깊은 우물 속에 담구거나 이른 아침에 방화용 수조의 꽁꽁 언 물을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깬 후 결박한 채로 얼음물에 앉히고는 머리부터 빙수를 내리붓고 거꾸로 매달아 전신을 얼음물에 처박곤 했습니다."
이런 악질 일본 헌병보였던 박종표와 그의 상관 신상묵은 1949년 8월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와해공작에 힘입어 무죄를 선고받고 나와 다시 대한민국 경찰관으로 임용된다. 그 후 신상묵은 빨치산 토벌에 나서 서남지구전투사령관을 역임하고 제주도 경찰국장까지 지냈다. 박종표는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이 되어 3·15의거 때 김주열 살해 및 시신유기의 원흉이 된다.
◇김상홍 = 1922년 당시 한국인으로서 드물게 경상남도 학무과 시학(장학관)에 임명되어 8년간 근무하고, 1929년 거창군 서무주임, 1938년에는 관선 경남 도의원에 당선했다. 그는 일정에 적극 협력하여 일어 상용을 주장함은 물론 신사참배를 일선에서 독려하고 불응자에 대해서는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특히 소위 일본신붕(집안에 신을 모신 곳) 설치를 일반 시민에게 강요하고 자신은 조석으로 이를 배례하며, 자녀 결혼 시에 신전 결혼을 솔선 이행해 훈 8등 공로훈장을 받았다.
◇노기주 = 일제 경찰로 재직 중 주로 사법사무를 취급하고, 경찰관 교습소 교관 직위에 있으면서 일본인들의 조선말 해득을 위해 조선어법상해라는 책을 저작하고, 경남도 수송·보안과장 재직시 경남 밀양, 진주 등지를 출장하여 지방유지 회합석상에서 황민화, 전쟁필승을 강조하였다.
◇노영환 = 창녕공립보통학교 4년을 졸업하고 경남 창녕군 고암면장에 임명되어 18년간 근무하였으며, 이후 경남도 민선 평의원, 창녕 금융조합장에 각각 당선된 자이다.
고암면장 재직시 일왕의 동생으로부터 은제 화병을 수상했고, 조선총독부의 유일한 자문기관인 중추원 지방참의에 임명되어 3년간 일제의 자문에 응했으며, 경남도 도회의원에 당선되어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했다.
◇손영목 = 밀양군 밀양읍 교동에서 출생하여 사립 진성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관리로 20여 년간 근무했다. 한일합병 후 경상남도 서기와 고성군수, 동래군수, 울산군수, 총독부 중추원 통역관 겸 서기관, 강원도 참여관, 경남 참여관, 강원도지사, 전북도지사 등을 역임했으며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미군정 지사로 이임했다.
손영목이 일제 협력 사실을 시인했다고 보도하고 있는 한 신문기사.
◇오명진 = 1919년 기미독립운동 당시 출판법 위반죄로 일제 징역 8개월 복역 경험도 있지만, 이후 친일파로 변절했다.
산청군에서 도회 의원으로 당선돼 8년간 재임하는 동안 산청군 경방단장, 산청군 국민총력연맹 간부, 산청지원병 후원회 회장, 산청보국대 상담역, 진주세무소 소득세사정위원회 위원, 산청군 금융조합장, 산청군 농회 부회장, 산청면 협의원, 진주지구 조선주주조합장, 산청내화도기주식회사 사장(해군 지정공장-송탄유제조품 대행업), 산청양조장 경영, 산청고공품 대행점 등 산청군에서 왜정시 소위 공직이란 공직은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그 권력을 악용하여 일본인 경찰서장 등과 결탁하여 산청 지방민이 아니면 상상못할 행세를 감행한 자로서 열기한 공직의 성격을 검토하여 보면 구체적 범죄사실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민족에 해를 가한 실정을 십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6개의 구체적 범죄사실 기록)
해방 후에도 오명진은 국민회, 청년단체, 민보단 등 애국단체(사실은 우익관변단체-기자 주)에 이름을 걸고 지방민에게 기부금 강요, 불법 감금 기타 이권에 다시 일제 때 양민을 괴롭히던 수단 방법을 연장시켜 양민으로 하여금 정부시책에 대하여 신뢰감을 상실케 하는 반역행위를 자행하다가 반민법이 공포된 후 도주하여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49년 당시 남대문로에 있던 반민특위 청사. 이후 이 건물은 국민은행 건물로 사용돼 왔다.(사진 = 보림재 http://blog.ohmynews.com/jeongwh59)
◇장자관 = 울산 출신으로 왜경을 거쳐 해방 후 미군정 경상남도 경찰청장에 재임한 자로, 1929년 왜경 양산경찰서 위생계 근무 당시 양산농민조합사건을 담당하고 악독한 고문으로 농조 간부들에게 많은 박해를 가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49년 8월말 이미 반민특위가 와해되던 시기에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이들 외에도 통영에서 일제 경찰과 통영읍회 의원, 경남도회 의원 등을 지낸 허기엽 등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마찬가지로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됐다.
이 책의 편역자 정운현 씨는 "친일세력과 이승만 정권의 반격과 반민특위 와해공작으로 심지어 고문경찰 박종표 등 9명이 형 면제를 받았고, 변절자인 최린, 친일경찰 노덕술 등 8명은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으니, 당시의 무혐의를 무혐의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 - 전4권 - 정운현 엮음/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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