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은 쿠바 혁명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미국서 사는 쿠바 사람 에드문도 데스노에스(79)가 쓴 소설 <저개발의 기억>은 1965년 쿠바에서 출간됐답니다.
에드문도는 미국 뉴욕에 머물다가 피델과 게바라가 혁명에 성공한 뒤 쿠바로 돌아가 혁명 잡지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저개발의 기억>은 67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에드문도는 그 작업에도 참여했고 또 영화 <저개발의 기억>도 아주 아낀답니다.
에드문도는 1979년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에드문도는 자기 작품 가운데 이 소설을 가장 '편애'합니다.
<저개발의 기억>은 재판을 하지 않아 절판돼 있었습니다. 2003년 쿠바 국가 서적위원회에서 새로 펴냈습니다. (망명한 '것'의 책을 공공기관에서 내 주다니, 우리나라식 상상력으로는 그 스토리가 어떻게 되는지조차 짐작하기 어렵습니다만.)
다시 펴낸 책 후기에서 에드문도는 "이 소설이 지니는 유일한 독창성과 가치는 내면성과 주관성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같은 글에서 "스페인어로 쓰여진 소설은 풍성하고 비옥한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불확실함을 다루는 데는 취약하다. 돈키호테는 많으나 햄릿은 거의 없다. 나는 이 둘의 결합을 희망한다"고 했습니다. 소설 주인공을 보면, '이 둘의 결합'이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펴낸 뒤 2005년부터 영어 포르투갈어 독일어 한국어 등으로 번역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에드문도는 "저자와는 달리 주인공은 혁명의 대의에 동참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책이 쿠바에서는 부르주아적이고 분열된 의식으로 읽히도록 의도했다. 소설은 거대하고, 또 의도된 모호함 덩어리다"고 했습니다.
햄릿과 성격이 가깝다는 얘기가 될 텐데, 이 대목에서 저는 문득 최인훈이 쓴 <광장>이 떠올랐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주인공은 이름이 명준인데, 대한민국(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 어느 쪽도 선택을 하지 못하고 중립국을 택했다가 그나마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리고 말지요.
<저개발의 기억)에 나오는 주인공이 그리 하지는 않지만 저는 작품이 주는 느낌이 비슷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도무지 기대하기 어려운 혁명과, 아무래도 믿지 못하겠는 반혁명. 에드문도의 말입니다.
"이제 사십 년이 지났고 구름 속에 가려졌던 성의 모습이 실체를 드러내며 무너져버렸다. 실제인 줄 알았던 성의 모래 조직은 말라버렸고 건물은 붕괴되었다. 꿈을 지탱해주던 것이 증발되어 날아갔다."
뒤집어 말하자면, 에드문도는 이런 붕괴와 증발을 벌써 40년 전에 예견했습니다.
에드문도는 사회주의 리얼리즘도 인정하지 않고 중남미에 특유한 마술적 리얼리즘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맞지 않다는 얘기랍니다. 그이의 글은 짧고 글투는 딱딱합니다. 중남미에 특유한 환상적 문체가 아닙니다. 글이 다루고 글투로 그려진 모습들도 마찬가지로 서정적이지 않고 구체적입니다.
주인공은 혁명에도 반혁명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반혁명은 무지하고 혁명은 무모합니다. 그래서 혁명이든 반혁명이든 쿠바는 저개발을 벗어날 가능성이 없습니다. 주인공은 여기에서 절망합니다. 제가 그리 봤다는 얘기일 뿐, 실제로는 절망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사물들을 서로 연관짓지 못한다. 이것이 저개발의 징후 중 하나이다. 사물들을 서로 연관짓고 경험을 축적해서 발전해 나갈 능력이 없는 것." "모든 것들이 진품처럼 보이는 모조품들이었다. 복제품, 이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몫이다. 우리는 힘 있는 문명국들의 조악한 모방일 뿐이다. 캐리커처, 싸구려 모조품."
여기서 힘 있는 문명국은, 미국뿐 아니라 소련도 포함됩니다.
어쨌든, 유럽과 미국 편향이 극심한 우리 사회 문화 풍토에서, 중남미 소설을 읽는 재미는 남다릅니다. 게다가 중남미에서도 색다르다는 얘기를 듣는 작품일 것입니다. 쿠바 사람의 한 전형이 여기 있습니다.
'중남미 문화·문학 전문'을 자임하는 수르출판사가 정성들여 깔끔하게 만든 책입니다. 저로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행적과 생각에 크게 공명(共鳴)하는 보람을 누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김훤주
저개발의 기억 - 에드문드 데스노에스 지음, 정승희 옮김/수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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