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 '음악다방'이 2000년대 '음악주점'으로 부활했다. 마산시 창동 옛 학사주점 골목의 '청석골' 이야기다. 당연히 DJ(Disk-Jockey)도 있고, 'DJ박스'(음악실)도 있다.

종업원이 갖다준 종이쪽지에 레드제플린(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을 적어 넣고 기다렸다. 이윽고 큼직한 헤드폰을 머리에 쓴 DJ가 해설멘트를 하기 시작한다. 지미 페이지, 로버트 플랜트, 존 폴 존스, 존 본햄 등 멤버의 이름과 이 곡이 실린 앨범, 존 본햄의 죽음과 팀 해체에 이르기까지 능숙한 멘트가 끝날 무렵, 귀에 익은 기타선율이 흘러나온다.

청석골의 메인DJ 이영범(52) 씨의 외모는 MBC라디오의 유명한 DJ 이종환 씨의 약간 야윈 모습을 연상케 한다. 목소리의 톤과 특유의 말투도 천상 '음악다방 DJ' 그대로라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바지 뒷주머니에 도끼빗만 없을뿐….

DJ박스 안의 이영범 씨. 얼핏 보면 MBC라디오 인기DJ였던 이종환 씨의 야윈 모습을 닮은 듯 하다.


◇80년대 마산 다운타운의 유명한 DJ =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마산에 정착해 살아온 사실상 토박이다. 고교 시절부터 락(Rock)을 비롯한 다양한 음악에 심취했던 그는 졸업하자마자 다운타운에서 음악다방 보조DJ를 시작했다. 음악다방의 전성기였던 1976년 송학다방과 함께 마산에서 가장 잘나가던 정원다방(남성동파출소 밑)에서였다.

당시 유명한 음악다방은 메인DJ 한 명이 2~3명의 보조DJ를 거느리고 있었다. 보조DJ는 손님이 별로 없는 시간대에 멘트 없이 음악만 틀어주거나 음반 정리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 몇 년간 실력이 쌓이면 메인DJ가 되는 식이었다.

그러나 2년 가까이 어느 정도 실력이 붙을 무렵 군 입대 영장을 받고 말았다. 영장을 받은 날, 그는 밥 딜런(Bob Dylan)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걱정하지 마라, 괜찮을 테니까)라는 곡을 틀어놓고 음악실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는 보조DJ만 해도 유명한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인기를 누렸다. 적지 않은 여성팬들이 사랑을 고백하는 쪽지를 넣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대시해오는 여성도 있었다. 한 버스 안내양은 다방 문 여는 시간을 기다려 불쑥 내복 선물을 건네고 달아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DJ들 사이에선 그런 팬과 사귀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심지어 특정 손님과 좌석에서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그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했다는 것이다. 자칫 좋지 않은 소문이 나면 인기도 물거품이 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메인DJ가 되지 못한 채 입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군생활 중에도 부대 내에서 동아리 밴드를 조직, MC로 활동하기도 했다. 군대에서도 계속 경력을 쌓은 셈이었다.

1980년 전역 후 다시 마산의 다운타운에 복귀, 대진다방과 거북다방, 일성다방, 웅지다방 등 마산의 음악다방 중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 땐 이미 메인DJ로 후배들을 거느리면서 수많은 음악다방 개업을 도와줬다. 새로운 음악다방이 생기면 DJ박스에 오디오와 LP판을 넣어주고 팀을 운영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이영범 DJ. 그는 80년대 중반 생계 때문에 한동안 DJ 활동을 접어야 했다.


인기만큼 돈도 많이 벌었을까?


"다른 직종에 비해 박봉이었어요. 하지만 그 때 얼마나 받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그 정도로 수입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죠. 돈과 상관없이 그냥 음악이 좋아서 했던 일이니까요."


◇음악다방 쇠퇴하자 생계전선으로 = 그러나 80년대 중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그 무렵엔 음악다방도 점점 쇠퇴하는 분위기였다.

"가라오케니, 노래방이니 하는 게 들어오면서 음악다방의 인기도 시들해지기 시작했죠. 그즈음 방송국 DJ로 들어갈 기회가 있었지만, 돈을 벌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는 오동동에서 귀빈레코드라는 음반판매점을 열었다. 하지만 이 역시 별 재미를 보진 못했다. LP가 사라지고 테잎과 CD 등이 나오면서 음반시장도 예전과 달랐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았던 다른 DJ들도 제각각 생활전선으로 흩어졌다.


결국 그 역시 음악과 거리가 먼 사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동안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부터 7080문화가 부활하는 조짐이 나타났다. 7080이란 타이틀을 건 라이브카페 붐이 일었고, 7080 콘서트도 줄을 이었다.

"그런 업소에 가봤죠. 그런데 말이 7080이지 밴드가 부르는 노래만 그 시절 노래일뿐 그냥 흥청망청 노는 분위기더군요. 그건 '문화'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냥 유흥일뿐이죠."

이영범 DJ는 별다른 욕심이 없다. 여유롭게 음악을 즐기며 술 한잔 마실 수 있는 세상이 그의 꿈이다.


그는 음악다방을 이 시대의 분위기에 맞도록 접목시키고 싶었다. 마침 여동생 부부와 뜻이 합쳐졌다. 그렇게 하여 작년초 문을 연 주점이 청석골이다. 음악다방과 민속주점, 라이브카페, 그리고 노래방까지 겸한 주점이다. 신청곡을 받아 DJ가 음악을 틀어주는 것은 물론 손님이 노래방 기기와 기타반주에 맞춰 노래를 직접 부를 수도 있다. 이영범 DJ 외에 MC도 있고, 가수도 있고, 기타리스트도 있다. 모두들 80년대에 한가락씩 했던 꾼들이다.


"처음 오는 손님들이 제일 신기해하는 건 역시 DJ박스예요. 20대 젊은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DJ 사진을 찍어 부모에게 휴대폰으로 전송해주기도 하고, 며칠 후 부모님과 함께 오는 경우도 있죠. 음악다방 문화를 끝자락에 조금이라도 접했던 30·40대들이 가장 좋아하고, 50대가 넘는 분들도 많이 오는 편이죠. 창원 동읍이나 대산면에서 매주 오는 단골손님도 있어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전 부모 세대의 문화를 가르쳐주는 어른도 있고, DJ를 통해 남자친구에게 보내는 사연을 대신 읽어달라는 20대 여성도 있단다. 과연 몇 번 가본 청석골은 요즘같은 불황 치고는 손님이 꽤 많은 편이다. 지난 금요일엔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매주 금요일 노래경연대회도 하는데, 지난 24일 밤엔 20대 남성이 대상을 받아 일행의 환호성이 터졌다. 상은 7만 원 상당의 양주였다. 금상과 장려상, 특별상도 있었다.


◇새로운 주점문화 열고 싶어 = 그는 정말 행복해보였다. 음악과 떨어져 있는 동안 그는 DJ로서 음악지식을 어떻게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을까?


"나도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음반을 꺼내 보니 신기하게도 옛 기억이 하나하나 살아났어요. 물론 정확한 정보를 위해 책을 다시 꺼내보며 공부도 하고 있죠."


곡을 소개하는 그의 영어발음도 예사롭지 않다.


"영어공부를 따로 하진 않았지만, 팝송도 반복해서 듣다보니 자연히 그렇게 발음이 나오더라고요. 반복학습의 효과랄까…. 오랫동안 마이크를 잡지 않았지만, 막상 음악실에 앉아보니 마이크에 대한 톤 감각도 금방 살아나더군요."

요즘 보기드문 LP레코드판. 이것은 그 중에서도 희귀한 10인치 판이다.


청석골은 LP판 3000여 장과 CD 1000여 개, 뮤직비디오 DVD 500개를 보유하고 있다. 7080 음악 외에 요즘 신세대 가수들의 CD도 계속 구입하고, 외국의 귀한 음반은 인터넷으로 구입하기도 한다. 기자는 이곳에서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의 'Another Brick In The Wall'을 신디로퍼(Cyndi Lauper)가 부르는 뮤직비디오를 인상깊게 봤다.


이렇게 주점을 운영하려면 아무래도 비용이 많이 들 것으로 보였다.


"사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라면 이렇게 장사해선 안 되죠. 인건비도 많이 들고 투자도 계속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또 손님들도 즐거워하니 덩달아 우리도 기분좋고…. 큰 돈은 못벌어도 적자 내는 정도만 아니라면 계속할 겁니다."


당초 그의 인터뷰 콘셉트는 '이 시대의 마지막 7080 DJ'였다. 그러나 그는 '21세기의 새로운 주점문화를 여는 DJ'이고 싶어 했다.


"사실 우리나라엔 제대로 된 음주문화가 없잖아요. 그냥 떠들면서 마시고, 마지막엔 노래방에 가서 소리 꽥꽥 지르고…. 그러지 말고 좀 여유를 갖고 음악도 즐기면서 느긋하게 마실 수 있는 그런 문화가 확산되면 좋겠습니다."


나도 그의 이런 소박한 바람이 확산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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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기록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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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jsapark.tistory.com/ 탐진강 2009.07.27 1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80년대 음악다방이 생각납니다.
    고교 시절에 죽도리였다는...;;

  2. Favicon of http://leebok.tistory.com leebok 2009.07.27 1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례되는 말이지만, 아직 DJ하시는 분이 계셨네요.
    문화를 말씀하시는데 찡하더이다. 맞아요. 그리워 하는 건 바로 그 문화인거죠.

    잘 보고 갑니다.

  3. Favicon of http://baekjein.tistory.com/ 맹아 2009.07.27 1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등학교 다닐때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논산에도 프라미스, 비목등 음악다방이 몇군데 있었네요...참 그리고
    대전시청에서 있었던 강의 잘 들었습니다.
    건강하세요

  4. Favicon of http://blog.daum.net/mylovemay/?t__nil_login=myblog 실비단안개 2009.07.27 13: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정원다방이 아직 있을까요?
    어쩌다 마산에 가면 어디가 어딘지를 모르겠더군요.

    예전엔, 학문당, 정원다방, 동서화랑, 시민극장 - 이쪽으로 자주 다녔었는데...
    그때의 우리 친구들은 잘 사는지 - ^^

  5. Favicon of http://madeinttl.tistory.com 토끼와곰 2009.07.27 15: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80년대엔 국딩이라 이런 DJ문화를 제대로 체험해보진 못했지만 어렴풋하게 기억은 납니다.
    서울에서도 아직 LP만을 고집하는 음악카페가 있더군요. 동대문의 음악의 숲, 80년대 팝만 LP로 틀어주는 홍대의 Studio 80`s 확실히 음악의 깊이는 지금 음악들이 따라올 수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6. 2009.07.27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보라매 2009.07.28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이거 내가 하고싶은 거였는데...
    한국에서 다니던 직장에서 중고생들을 위한 음악 감상실 운영할때 생각나네요.
    그땐 저도 멋진 DJ였습니다. 인기도 있고. 하하하... 내나이 30세때였나?...
    벌써 거의 20년이 다 되어오네요...
    제가 직접 못해도 반가운 내용입니다.

  8. Favicon of http://blog.daum.net/e-party 나사랑(이재호) 2009.07.28 1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 음악다방이라...
    마산 창동을 금방이라도 찾아 가고픈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번 주가 휴가니 한번 찾아가 볼거나요?
    그런데 비주류가 그곳에 가면 좀 뻘쭘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ㅋ

  9. Favicon of http://blog.daum.net/cameratalks 카메라톡스 2009.07.28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가끔 이종환아저씨의 라디오방송을 듣는데
    예전이나 목소리가 달라진게 하나도 없어 좋더군요.

    40대에 들어선지 옛 추억으로 먹고사는것 같습니다.

  10. 호랭이 2009.11.25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산에도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곳이 있다니 너무 반갑습니다..
    언제 한번찾아 가봐야 겠습니다..
    저는 부산 기장에서 비슷한 형태로 운영하는 음악세상 이라는 곳에서
    DJ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