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장지연 11

왜곡 보도 조선일보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조선일보가 정부의 서훈 취소 결정을 두고 갖은 비겁한 짓을 해댔습니다. 이명박 정부더러 무능하다거나 좌파적이라거나 무식하다거나 하는 소리를 퍼부어댔습니다. 저는 그런 소리를 그냥 소리로만 여기는데요, 그것은 원래 그이들 속성이 그렇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어떤 주장을 하든 사실은 사실대로 적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하는데, 조선일보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조선일보(월간 조선 포함)는 이번에 평기자와 논설위원과 고문까지 나서서 장지연의 친일 글들은 숨기고 장지연이 친일을 그다지 심하게 하지 않았다고 주장만 해댔습니다. 김정우라는 평기자와 김태익이라는 논설위원과 김대중이라는 고문이 장본인입니다. 그이들이 어떻게 했는지는 조선일보는 평기자가 고문을 쥐고 흔든다(http://2kim.id..

조선일보는 평기자가 고문을 쥐고 흔든다

틀린 사실이 많았던 김대중 칼럼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의 4월 19일치 칼럼 '장지연상을 반납해야 하나?'에는 잘못이 많습니다.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장지연 건국훈장 서훈 취소가 부당하다는데요, 사실 관계가 정확하지 않다는 잘못이 가장 큽니다. 그이는 장지연 서훈 취소가 "한·일 병탄 후 지방에 내려가 현실에 부응하는 몇 편의 글을 썼다"는 데 있다면서 "서훈 취소를 의결한 김황식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이 ……장지연이 지방언론에 썼다는 다른 글이 얼마나 '매국적'인지 읽어본 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이의 글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논리 구사는 마음대로 하지만 사실 관계까지 흐뜨리지는 않는 인사로 알았는데, 이번 글은 전혀 그렇지 않고 잘못된 사실이 바탕..

김태익이라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의 경우

언론(인)이란 말과 글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사람)이고 분명하지 않거나 혼동 또는 혼돈돼 있는 사실을 뚜렷하게 나누고 가지런하게 질서를 잡는 일(사람)입니다. 물론 그런 일(사람)을 조선일보에서 기대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차치하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김태익이라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4월 12일치 조선일보에 쓴 글 '보훈처 서훈심사위가 궁금하다'는 장지연(1864~1921)에 대한 건국훈장 서훈 취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이는 정부의 서훈 취소를 두고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내세운 '장지연은 친일파'란 주장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셈"이라고 했습니다. 또 김태익이라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같은 글에서 "장지연은 말년에 일제의 식민통치를 두둔하는 글을 몇 편 쓰기도 했..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의 경우

장지연 서훈 취소가 부당하다고?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이 '위암 장지연상'을 받은 적이 있는가 봅니다. 그이가 2011년 4월 19일치 조선일보에 '장지연상을 반납해야 하나?'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여기서 그이는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장지연에게 주어졌던 건국공로훈장을 박탈한 데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이는 그 글에서 "(장지연이 1905년 썼다는) '시일야방성대곡'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메어져 온다"면서 "장지연 선생이 한·일병탄 후 지방에 내려가 현실에 부응하는 몇 편의 글을 썼다는 것이 '친일'의 근거가 됐다고들 하는데 나는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 한 편만으로도 그 분은 당대에 남을 항일지사였고 민족언론인이었음을 …… 증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장지연 서훈 취소가 부당하다는 말인데, 그이가..

그래도 장지연은 '일선 융화 빛난다'고 했다

2010년 12월 제가 블로그에 '서훈 취소된 장지연, 그는 죄가 없다'(http://2kim.idomin.com/1776)는 글을 하나 썼습니다. 그 글에 올해 4월 18일 밤 '숭양산인'이라는 분이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대로 읽으면 앞뒤 문맥이 조금 맞지 않아 이해하기 쉽지는 않지만, 간단히 뭉뚱그리면 "장지연이 1917년 6월 8일치 조선총독부 기관지 에서 '일선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했다"는 대목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따옴표까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좀 어지럽기는 하지만 '숭양산인'이라는 분이 쓰신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1917년 6월 8일치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에서 "내선 인민이 친목으로 사귀어 장애를 풀어 없애고 일체 간격이 없으니" "일선(日鮮) 융화의 서광이 ..

서훈 취소된 장지연, 그는 죄가 없다

한 때 대한민국 언론인의 사표(師表)였던 장지연(1864~1921)은 그 친일 행적이 2003년 3월 1일자 자매지 을 통해 처음 공개됐습니다. 학계에서는 장지연 친일 관련 조사와 연구가 전부터 있었지만 대중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 6개월남짓만인 지난 달 국가보훈처가 장지연에게 주어졌던 서훈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에 1915~17년 썼던 그이의 글 가운데는 친일로 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제법 있습니다. 1917년 6월 8일치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에서 "내선 인민이 친목으로 사귀어 장애를 풀어 없애고 일체 간격이 없으니" "일선(日鮮)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한 대목이 있습니다. '내선'은 '내지(內地=일본)'와 '조선'을 뜻하..

리영희 선생을 생각하며 장지연을 떠올리다

오늘 아침 눈을 뜬 후 가장 먼저 접한 기사는 '리영희 선생 타계'였습니다. 회사에 출근하니 후배기자가 대뜸 이렇게 묻더군요. "국장님 세대에게 리영희 선생은 어떤 분인가요?"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에겐 사상의 은사였지. 그분의 남북 군사력 비교 논문을 통해 남북관계를 알게 됐고, 중국과 베트남의 진실은 물론 한국에 살고 있는 이북 5도민들이 왜 극우반공주의자일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됐으며, 이리역 폭발사고와 핵무기를 비교한 글을 통해 반전반핵 사상을 갖게 해주신 분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저렇게 돌아가실 때까지 끝까지 소신을 지키며 일관된 삶을 살아오신 분이 드물다는 점에서 시대의 표상이라 할 수 있지. 당장 우리 지역만 해도 젊을 때 데모깨나 했다는 사람들 중에서 나이 들고 난 뒤 자..

장지연 친일명단 제외? 착각하지 마라

대통령 직속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가 경남일보 초대주필을 지낸 장지연(張志淵·1864~1921)을 최근 조사대상자에서 제외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8월 29일 연합뉴스에 먼저 보도됐고, 이어 경남일보도 31일자 1면에 장지연 초상화와 함께 보도했다. 마침 경남도민일보에도 진주의 추경화 씨가 장지연의 조사대상 제외를 환영한다는 취지의 독자투고를 해왔다. 그는 이 글에서 '중단되었던 기념사업도 다시 시작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지연의 친일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모여 추모 및 기념사업을 하는 데 대해서는 누가 뭐라고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업을 하기 위해 정부나 자치단체에 손을 벌리는 것은 납세자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국가기구인 반민규명..

신문의 날에 민주열사 묘역을 참배하다

오늘은 '신문의 날'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이 1896년 창간된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을 기념하여 신문의 책임과 언론자유를 생각하는 날로 정한 게 신문의 날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문은 유례없는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인터넷을 비롯한 매체의 다양화도 요인 중 하나이긴 하지만, 신문 위기의 핵심은 바로 '신뢰의 위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신문 113년을 맞는 오늘, '아니면 말고'식 보도의 대표격이었던 가 이종걸 의원을 가리켜 "대정부 질문에서 전혀 근거없는 내용을 '아니면 말고'식으로 물어, 특정인의 명예에 심각한 타격" 운운하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소위 조중동은 전국 곳곳에서 불법 경품을 뿌려 여론시장을 교란시키고 있으며, 재벌과..

장지연은 왜 친일지식인이 되었나

장지연은, 변절한 적이 없다 1864년 태어나 1921년 세상을 떠난 장지연이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사 명단에 들어갔습니다. 장지연을 두고 항일에서 친일로 변절했다고 보는 이들이 많은 편이지만, 사상 측면에서 보면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뀌었다고 보는 근거는 바로 1905년 을사늑약을 비판하는 장지연의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에 실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렇게 일본에 맞섰지만 나중에 경술국치를 겪고 합방이 되니 일제 통치에 협력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지연은 처음부터 ‘친일’이었습니다. 장지연이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에 빠져 있었음은 그동안 우리 역사학계가 밝혀놓은 뚜렷한 사실입니다. 러일전쟁이 한창인 때인 1904년 장지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