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62살이 되어서야 처음 불러보는 '아버지'

기록하는 사람 2009. 6. 2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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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킨 정치군인들에 의해 강제해산됐던 '민간인학살 마산유족회'가 어제(20일) 48년만에 재창립대회를 열었다.

어제 창립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노치수(62) 유족회장은 1950년 당시 우리 나이로 세살바기 아기였다. 그 때 아버지 노상도 씨를 잃고 평생 '아비없는 자식'으로 살아왔던 그는 62세 노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학살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다. "언젠가 꼭 쓰고 싶은 글이었는데, 이제야 썼으니 신문에 실을 수 있으면 싣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버려도 된다"는 문자메시지와 함께….

당연히 신문에 게재하고, 이 블로그에도 올려 많은 분들과 그의 아픔을 함께 하고자 한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아버지! 아버지를 얼마나 불러 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모릅니다.

마산유족회장으로 선출된 노치수 씨.

아버지! 만삭의 동생을 밴 30대 중반의 어머니와 제가 두 살, 1950년 7월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마을 선착장에서 마산에서 오는 배를 기다리던 지서 순경에 의해 지서로 불려가신 이후로 돌아오시지 않으셨기에 다른 애들은 자기 아버지와 장난을 치거나,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와 손잡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전 그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제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가끔 "왜 난 아버지가 없지? 아버지는 어디 가시고 안 계시지?"라고 의문이 생겨 어머니께 물어보기라도 하면 "니 아버지 저 멀리 돈 벌로 갔다!"라고 하시며 먼 하늘만 쳐다보시곤 하셨지만 세월이 많이 흐르고 저가 제법 커서 어쩌다 다시 물어보면 어머니께선 "니 애비 뭐 할랐고 찾노? 야! 이놈의 자식아! 니 애비 이야기는 두 번 다시 묻지 마라!" 하시며 성난 얼굴로 말씀하시는 게 눈에 선하기도 합니다.

아버지! 일제시대 때 촌에서 부산까지 가셔 중학교에 다니시다 독립만세를 부르다 학교에서 쫓겨나 결국 일본까지 가서 중학교를 마쳤다면서요.

또한, 대학을 다니시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외치다 일본 순사한테 몇 번이나 잡혀갔다는 얘기도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왜? 아버지께서 대한민국의 국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한테 불려가 어머니가 애타게 기다리다 84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못 오신 이유를 몰랐고,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신이 아닌 이상 누구나 한번 쯤 잘못 길을 갈 수 있고 또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 잘 못 가고 잘 못 한 행동에 대해 한번 죗값을 받고, 뉘우치면 끝나는 것을……. 그런데 왜 다시 불려가…… 지금까지…….

아버지! 저가 클 때는 보도연맹이란 것이 그저 나쁜 사람들이 모인 나쁜 단체인가보다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성장한 후론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이승만 정권이 선도하기 위해 만든 단체로 정부에서 만들어 그런 사람들을 용서하고 지도하려고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한 때의 잘 못을 용서해 주고 좋을 것이라 해 많은 사람이 가입하고, 심지어 각 면 단위 할당제 때문에 마지못해 가입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6·25사변이 터지자 보도연맹에 가입한 모두를 잡아갔습니다. 그들이 잘못이 있다면 법치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약식 재판을 했으며, 그것도 부족해 어느 산골짜기에 끌고 가 무자비하게 죽여 구덩이에 묻고, 심지어 쇠사슬에 묶인 채 죽여 바다에 던져 수장시켰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고, 그래서 아버지께서 영영 돌아오시지 못한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독립만세를 부르다 일제에 많은 고초를 당하셨는데도 그런 것은 참작도 않고 죽임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가신 것도 몰랐고 어디에 묻힌 것도 몰랐으니 살아남은 가족들은 정말로 통탄한 일 아니었습니까?

이 글을 쓴 노치수 씨는 20일 마산유족회장으로 선출됐다. 마산유족회는 오는 10월 26일 합동위령제를 지낼 예정이다.


그러나 아버지! 이제는 밝혀졌습니다.


정부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아버지와 같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많은 사람이 잘못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법치국가에서 공소내용도 없고, 어떤 혐의로 기소되었는지, 죄가 있다면 형사 소송법에 따른 법적 절차도 없이 잡아갔다 죽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쟁 중 계엄사령관의 조치였다지만 장소도 명시되지 않은 군법회의에 부쳐 무자비하게 처형한 것은 헌법이 명시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에도 위반한 것이고 계엄사령관의 승인과 집행명령이 없는 상태에서 죄인 아닌 죄인을 마구잡이식으로 잡아 학살한 사건은 한국 역사의 치욕이요, 정치적 학살사건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이제 정말 잘 못 된 학살이라는 것을 59년 만에 그 진실이 밝혀졌기에 살아남은 자식들과 후손들이 늦게나마 아버지처럼 돌아가신 여러 영령을 위해 유족회를 만들었고, 올 10월경에는 합동 위령제라도 지낼까 합니다.

아버지! 영혼이 있으시다면 저희가 위령제를 지낼 때 여러 영령과 함께 오셔서 저희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요!

아- 아버지! 얼마나 불러보고픈 이름이었는지 모릅니다.

만 두 살 때 헤어진 아들 노치수 올림.

관련 글 : 아버지와 숙부의 한을 풀겠다는 한 60대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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