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학살 암매장 유골, 발굴해도 갈 곳이 없다

기록하는 사람 2009. 7. 13.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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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유해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중·하순경 국민보도연맹원과 진주형무소 재소자 1200여 명이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 암매장된 지 59년만의 일이다. 

김해 봉하마을에서 고(故) 노무현 대통령 49재 안장식이 진행되고 있던 지난 10일이었다.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법륜골 감나무밭 일대에서 유해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는 경남대박물관 발굴팀(책임연구원 이상길 교수)이 이날 오전 매장추정지를 약 10cm 정도 파들어가자 곧바로 앙상한 유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드러난 3~4구의 유해 옆에서 M1 소총의 탄피도 발견됐다.

※관련 글 : 내가 학살현장 유골 사진촬영을 포기한 까닭

이곳은 현재의 토지소유주가 지난 80년대 초 감나무 과수원 용도로 땅을 매입할 때부터 학살 암매장터가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암매장 터 부분은 나무를 심지 않고 공터로 남겨두었다.



유족들에 따르면 당초 이곳은 학살된 시신을 매장한 후 흙을 덮어 불룩한 상태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침식되면서 편편하게 변했다고 한다.

70~100구 정도 암매장돼 있을 것

이상길 교수와 진주지역 유족들은 목격자의 증언과 구전 등을 토대로 가로 세로 각 15m 정도의 면적에 약 70~100구 정도의 유해가 암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팀은 11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장맛비로 인해 일단 발굴작업을 중단한 채 현장을 방수포로 덮어둔 상태다.


이처럼 국가권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된 유해가 발굴됐다는 소식을 들은 진주유족회 임원들이 11일 정오 무렵 속속 현장에 도착했다. 김태근 고문과 강병현 회장을 비롯한 10여 명의 임원들은 59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앙상한 유해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때마침 하늘도 슬픈 듯 이슬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유해발굴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 안치방안을 놓고 임원회의를 하고 있는 진주유족회 간부들.


유족들은 눈물을 훔친 후 발굴팀의 천막에 쪼그리고 앉아 즉석에서 임원회의를 열었다. 가장 중요한 안건은 발굴된 유해를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문제는 경남에 민간인학살 유해를 안치할 시설이 없다는 것이다. 유해발굴 용역을 발주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충북대에 설치해놓고 있는 임시안치시설로 옮겨간다는 방침이다.

구천 떠돌던 원혼, 또다시 타향 객지로 보낼 수야

하지만 이날 유족들은 "59년 동안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해 구천을 떠돌던 원혼들을 이제야 찾았는데, 또다시 타향 객지로 보낼 순 없다"고 입을 모았다. 게다가 충북대 안치시설 역시 2011년 진실화해위원회와 계약기간이 끝나면 다시 새로운 곳을 찾아야 할 처지다. 그곳도 영원히 잠들 곳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경남에 추모공원을 겸한 유해안치시설을 조성해 그곳에 모시는 것이다. 같은 국가범죄에 의한 불법학살이지만 특별법이 먼저 제정된 거창과 함양·산청학살사건의 경우 이미 위령공원이 조성돼 있다. 그러나 그 외의 민간인학살사건 희생자 유해는 이처럼 발굴이 되어도 갈 곳이 없는 처지다. 심지어 지난 2004년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에서 발굴된 163구의 유해도 안치할 곳이 없어 우선 경남대 예술관 밑 공터의 컨테이너 속 플라스틱 상자에 보관돼 있는 실정이다.

발굴 현장은 장맛비로 인해 방수포로 덮어 놓았다. 가운데 볼록한 곳에서 3구의 두개골과 각종 유골이 나왔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만 해도 상황이 이렇게 암담하지만은 않았다. 대통령과 정부도 이 문제 해결에 비교적 적극적이었고, 국회에서도 발굴된 유해 안치를 위한 특별법 제정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과거사 관련 기구를 통폐합하겠다는 정부의 시도는 주춤한 상태지만, 내년 4월로 만료되는 진실화해위 활동기간이 연장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게 되면 아직 절반도 못한 진실규명 작업 자체가 사실상 중단된다.


그래서 유족들은 더욱 애가 탄다. 게다가 경남의 자치단체장들은 예전에도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현 정부 출범 이후 더 소극적이 됐다. 지난 5월 15일 학살 후 처음으로 열린 진주 합동위령제에 정영석 진주시장은 총무국장을 대신 보내 추도사를 낭독하게 했을뿐 술 한 잔 따라올리지 않았다. 유해발굴 개토제에도 역시 총무국장을 대신 보냈다.

김태호 경남도지사도 마찬가지다. 보다 못한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2월 마산·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서에서 이례적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마산 진전면 여양리에서 발굴된 유해 등 유해안치장소 설치등에 대한 지원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권고사항을 명기했다.

행정안전부 권고사항처리기획단 관계자도 "진실규명이 된 사건의 유족회에 위령제 비용 정도는 우리가 지원하고 있지만, 땅이나 시설 설치 등 사업은 해당 지자체의 협조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과거사정리기본법에도 지방자치단체의 의무와 역할이 명시돼 있지만 경남도는 짐짓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자치단체 나서 추모공원 조성해야

유족들은 이런 암담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경남도와 진주시 등 자치단체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발굴현장에 모인 진주유족회 임원들은 "마산 여양리에서 발굴된 163구의 유해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유해도 다른 지역으로 떠돌게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를 위해 진주시 명석면 일대에 추모공원 조성을 자치단체에 요청하기로 했다.

유족들은 경남도와 진주시가 나서 추모공원을 겸한 안치시설을 조성해줄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유족들은 또 지난 5월 합동위령제와 별도로 이곳에서 발굴된 원혼들을 달래기 위한 진혼제도 오는 9월 9일 지내기로 했다. 진혼제 이전에는 참배객들을 위해 발굴현장에 분향소도 설치할 예정이다. 유족회 김태근 고문은 "우선 공문을 통해 정영석 진주시장에게 발굴현장 참배를 다시한번 호소해보겠다"고 말했다. 진주시 관내에서 억울하게 집단희생된 시민의 유해가 나왔는데, 시장이 참배조차 외면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강병현 진주유족회장은 "경남도와 진주시가 끝까지 유족들의 호소를 외면한다면 발굴된 유골을 안고 도청과 시청에 찾아가 농성을 하자는 이야기도 있다"고 말했다.

발굴을 지휘하고 있는 이상길 교수도 "거창 신원면이나 제주 4·3위령공원처럼 크게 할 필요는 없지만, 가까운 곳에 소박한 위령탑과 유해안치시설을 갖춘 추모공원을 조성해 유족들이 참배라도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가장 바람직한 해결방안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자치단체가 주민통합과 화해 차원에서 적극 나서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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