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고은 시집 '만인보'에 역사적 오류가 있다

기록하는 사람 2009. 4. 1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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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마산은 흔히 3·15의거와 4·19혁명이라 부르는 1960년 3·4월혁명 49주년 기념행사가 한창입니다.

어제(11일)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모습으로 떠오른 날이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는 오전에 시신인양지에서 열사의 고향이자 모교인 남원 금지중학교 교사와 학생, 그리고 열사가 입학식도 치르지 못하고 희생된 마산상고(현 용마고)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49주기 추모식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김주열 열사에 대한 학술토론회를 열었는데요. 여기서 얼마전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과 제가 번갈아 포스팅했던 친일헌병보 출신으로 대한민국 경찰이 되어 김주열 열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박종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고은 시인. (창비 홈페이지)

(정운현의 첫번째 글 : 친일헌병들은 애국지사를 어떻게 '고문'했나)
(김주완의 두번째 글 : 친일헌병 박종표는 김주열 살해한 원흉이었다)
(정운현의 세번째 글 : '만인보(萬人譜)'가 기록한 박종표와 김주열 ; 만인보 박종표 편 전문을 보시려면 이걸 클릭하세요.)

당시 정운현 전 국장과 저는 고은 시인의 실명 연작시집인 < 만인보 >의 '박종표' 편을 소개하기도 했고, 박종표가 처음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사실도 찾아냈지만, 그 이후 그의 행적을 알지 못해 포스팅을 미뤄놨던 게 있었습니다.

바로 고은 < 만인보 > '박종표' 편에 중대한 역사적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마지막 연의 '대구교도소 형장 / 일제시대 이승만 시대의 끝이 그의 끝이었다'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명확히 박종표가 대구교도소 형장에서 사형됐다는 표현은 없지만, 누구라도 그가 사형됐구나 하고 받아들일만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박종표는 사형된 게 아니었습니다. 민주당이 집권했던 장면 정부 때 사형 선고를 받았던 박종표는 이듬해인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하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됩니다. 박정희가 살려준 셈이지요.

그리고 어제 토론회에서 경남지역사포럼 대표이자 < 3·15의거사 > 편찬위원장이었던 홍중조 선생이 "15년 전까지 부산 서면에서 (박종표)가 식당을 하면서 살아있었고, 마산의 경찰 출신 인사들이 찾아가 축하해주기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말과 신문기사가 사실이라면 고은 시인의 < 만인보 > 박종표 편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면 그냥 일반적인 시가 아니라 역사적 인물들의 실명을 실제 역사와 함께 풀어낸 시이기 때문에, 자칫 먼 후세에는 이 시로 인해 역사를 오인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 만인보 >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고은 시인의 작업이라고 합니다. 완결된 시가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면 완결되기 전에 이런 오류는 고쳐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1961년 12월 15일 박종표의 무기징역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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