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누가 김주열과 그 어머니를 모욕하는가?

기록하는 사람 2009. 4. 1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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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회장 백남해·남원대표 박영철)가 발끈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가 발행하는 월간지 <희망세상> 3월호에 실린 기사 때문이다.

르포작가 김순천씨가 쓴 '촛불항쟁을 닮은 시민혁명의 첫 효시 마산 3·15의거 현장을 찾아서'라는 글의 한 구절이 문제였다. 이 글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에 대해 "이모할머니 댁에서 시위를 구경하러 나왔다가 변을 당했던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 표현을 따져보면 김주열 열사가 불의에 항거하여 시위를 벌이다 희생당한 게 아니라는 말로 해석된다. 문제는 "구경하러 나왔다"는 표현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과거 독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는 희생자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일부러 강조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의거' 또는 '혁명'으로 역사적 평가가 끝난 일에 대해 이런 표현을 썼다는 것은 죽음의 의미를 폄하하는 의도로 보일 수밖에 없다.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

김주열 열사를 둘러싼 불협화음

게다가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가 주목하는 것은 그 르포작가가 취재를 위해 마산에서 3·15관련단체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 후 나온 글이란 사실이다. 추모사업회는 특히 마산의 3·15의거 관련단체에 있는 한 인사가 노골적으로 김주열 열사에 대한 폄하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추모사업회가 들었다는 발언내용은 이랬다.

"김주열이 무슨 열사냐? 턱도 없이 그 애를 무슨 열사 열사 하느냐, 김주열이는 그날 밤 데모 구경 나와서 파자마 바람에 최루탄 맞아 죽었다."

물론 이 발언도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열사가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떠올랐을 때 옷차림은 파자마가 아닌 검은 바지와 셔츠 차림이었고, 마치 권투하는 자세로 두 팔을 든 채 오른쪽 주먹을 쥐고 있었다.

김주열의 시신을 바다에 유기한 경찰이 일부러 옷을 갈아입힐 이유도 만무하고, 그럴 겨를도 없었다. 총탄도 아닌 최루탄이 눈과 머리를 관통할 정도로 정통으로 명중했다는 것도 그가 시위대의 최선두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줄 증거가 될지언정, 후미에서 구경하던 중이었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김주열의 가족과 친지 등 그를 둘러싼 배경도 그렇다. 그의 형 광열도 적극적으로 의거에 참여한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정치의식이 상당한 인물이었다. 권 여사가 아들을 잃은 후 한 달 뒤 마산시민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보자.

"자식 주열이가 죽은 지 거의 한달 동안이나 걱정해주신 끝에 지난 4월 11일 다시 마산에서 의거를 일으켜 나라를 바로 서게 해주신 여러분에게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바입니다. 자식 하나 바쳐서 민주주의를 찾는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남은 삼형제 다 바친들 아까울 게 있겠습니까?"

정말 무서운 말이고 위대한 말이 아닌가? 요즘 같은 세상에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어머니가 얼마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권찬주 여사는 '한국 민주주의의 어머니'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분이다.

1960년 국회조사단 앞에서 행방불명된 아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한국 민주주의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권 여사는 특히 경찰이 야밤에 김주열의 시체를 빼돌려 남원에 데려온 후 시체인수증에 도장을 찍으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체를 못받겠으니 이기붕의 집에 갖다 주라."

이어지는 권 여사의 편지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은 시체가 마산에 넘어가면 또 데모가 나고 막 부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면 좋다. 시체가 넘어오면 남원서도 서울 가는 길이 있으니 열 두 번이라도 갈 수 있다"고 쏘아주었습니다."

김주열이 마산상고에 진학하기 전 서울에 있는 동안 영향을 받았던 5촌 조카의 이야기도 편지에 나온다.

"4·19의거 사건 때 데모 선동자로 잡혀갔던 우리 집안의 손자이며 주열의 5촌 조카가 되는 고대 1년 수철(秀哲)이는 '할머니 주열의 죽음을 원통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런 죽음이라면 나도 당장 죽겠소'라고 위로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수철이는 모진 고문을 당해 집에서 개도 잡아 먹으며 치료 중인데 주열의 시체에 관한 저의 편지를 받고 그는 서울 데모를 선동했던 것입니다."

당시 서울에서 고교진학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김주열에게 마산상고 진학을 권유했던 형 광열 씨의 친구 하용웅(67) 씨도 11일 오후 마산시청 중회의실에서 추모사업회 주최로 열린 '김주열 학술토론회'에 참석해 이렇게 증언했다.

김주열 열사에게 마산상고 진학을 권유했던 하용웅 씨. 그는 김주열의 형 광열 씨와 남원 금지중학교 동기였고, 마산상고를 1960년에 졸업했다.


"서울에서 영향을 받은 고대생 조카뿐 아니라, 마산의 이모할머니도 민주당 지지계열로 상당히 민주적인 의식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주열이가 어머니와 형, (나이많은) 조카는 물론 이모할머니의 그런 정의로운 성격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김주열을 폄하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게 참을 수 없습니다."

열사의 어머니 권 여사의 편지는 이렇게 맺고 있다.

"존경하는 이 나라 어머니 여러분! 그리고 마산시민 여러분의 그 거룩한 뜻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놈들이 그 같이 악독하게 죽였지만 죽인 그 놈들은 벌을 받을 것이요, 내 자식은 신선이 되어 올라갔을 것입니다. 마산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부디 몸 건강하시실 5백리 지리산 고개 너머서도 빌어마지 않겠습니다. 1960년 5월 8일 어머니날에 권찬주 올림"

이런 사실로만 보아도 김주열 열사와 그 어머니는 한국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추앙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또한 전북 남원 출신의 김주열이 경남 마산의 의거에 참여하여 민주열사가 되었다는 것으로 봐도 동서화합의 상징적 인물이 되기에 충분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3·15는 4·19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3·15는 '민주의거'가 아니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용공분자의 난동'으로 매도당했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마산시민은 김주열 열사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1일 열린 김주열 열사 토론회에는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과 홍중조 전 '3.15의거사' 편찬위원장, 남재우 창원대 교수, 남두현 씨, 송순호 마산시의원, 복효근 남원 금지중 교사 등이 각각 발제자와 토론자로 참석했다.


3·15 관련단체의 보이지 않는 알력

그럼에도 왜 하필 마산에서 김주열 열사의 희생을 둘러싼 불협화음이 나오는 것일까?

이는 근본적으로 3·15와 관련된 단체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알력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비슷한 성향의 단체들 간이라도 어느 정도의 경쟁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3·15를 둘러싼 단체들 간의 그것은 이미 '선의의 경쟁' 차원을 넘어선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는 게 문제다.

지난 2001년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가 김주열이 최루탄을 맞고 숨진 자리에 표지석을 설치하고, 그 거리를 '김주열로'로 지정하자고 했을 때, 마산시는 "3·15관련단체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당시 마산시가 밝힌 3·15관련단체는 4·19혁명유족회와 부상자회, 그리고 3·15의거기념사업회였으며, 그 이유는 "희생된 열사가 김주열 한 명뿐이 아닌데, 특정 인물의 이름을 딴 거리와 표지석은 안된다"는 논리였다.

그 이후 3·15의 적(敵)으로 지목된 이은상에 대한 3·15단체의 어정쩡한 입장과 대응도 끊임없는 갈등을 낳았고, 지난해 개관한 3·15아트센터에 유독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사무실만 입주하지 못하게 된 것도 문제였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단체 간의 갈등이 물밑에 존재했을지언정 공개적으로 표면화하진 않았다. 그러나 11일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마산시의회 송순호 의원이 기어이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말았다.

송순호 마산시의원.


"김주열 열사를 폄하하는 소리의 진원지가 다른 곳이 아닌 3·15와 관련된 사람들 또는 단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 아무리 고민해봐도 김주열에 대해 부정하고 싶은 사람은 우리 대한민국에서 아무도 없을 거라고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주열에 대한 폄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3·15를 특정단체가 독점하겠다는 패권적 사고,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3·15기념사업회를 제외한 어떤 단체에서도 3·15와 관련된 기념행사나 아니면 그와 관련된 일을 하려는 것을 그 단체가 용인을 못하는데서 출발하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송 의원은 이어 이렇게 제안했다.

"단체와 조직은 서로 연대하면 되는 것이고, 사업은 상호보완적으로 하면 된다고 봅니다. 진정 3·15기념사업회가 3·15정신을 계승하고 못다한 역사의 전진을 이루려는 의지가 있다면, 3·15기념사업회는 동서화합과 통일조국을 꿈꾸는 김주열추모사업회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게 마땅한 일이라고 봅니다. 추모사업회를 견제하고 폄하하려 하지 말고, 서로 연대하고 교류함으로서 3·15를 진정한 마산시민의 것으로, 국민의 것으로 만드려는 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고 봅니다."

11일 오후 마산시청 6층 중회의실에서 열린 김주열 열사 학술토론회에 참석한 청중.


누가 3·15 정신을 모욕하는가

그러나 그 자리에 3·15의거기념사업회의 직접적인 관계자는 없었다. 따로 연락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단체 사람 중에는 김주열 열사를 폄하하는 이야기를 한 사람이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3·15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인데, 그런 말을 할 리가 있겠느냐. 그리고 우리 단체가 사업이나 행사를 독점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다른 단체의 행사를 방해한 적도 없고, 하지 말하고 한 적도 없다."

마산의 자랑스런 역사인 3·15의거를 둘러싼 단체 간의 갈등을 바라는 시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해가 있다면 풀고, 잘못이 있었다면 사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념사업'이든, '추모사업'이든, 3·15든, 4·11이든, 그 원래목적이 무엇이냐는 초발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체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게 아니라면, 과연 어떤 단체가 3·15와 김주열의 정신을 더 잘 '계승'하고 '실천'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3·15와 그 희생자들을 팔아 권력과 돈을 나눠먹고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이 있다면, 49년 전 마산시민이 그랬듯 역사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아들 삼형제를 다 바쳐도 아깝지 않다는 권찬주 여사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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