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3·15 시민항쟁과 관변문인의 어정쩡한 동거

기록하는 사람 2009. 3. 1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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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3·15의거 49주년이 되는군요. 의거 기념일을 앞두고 그동안 애매모호한 정체성으로 의심을 받아온 '3·15의거기념사업회'가 < 3·15의거보 >라는 격월간 회보를 창간하고, 첫 사설에서 모처럼 분명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바로 마산에서 지겹도록 논란을 빚고 있는 '노산 이은상'과 '노산 문학관' 명칭에 대한 기념사업회의 입장인데요. 마산 출신의 시조시인 이은상은 독재자 이승만의 충실한 하수인이었고, 박정희와 전두환에게도 빌붙어 영화를 누린 '독재 부역 문인'의 대표격인 사람입니다. 그는 또한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3·15의거를 노골적으로 모욕하고 폄하한 반민중적 문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산의 뜻있는 인사들은 오래전부터 시민의 세금으로 건립하려던 '노산문학관'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였고, 반대로 이은상과 비슷한 '관변 문인'의 길을 걸어온 '문인협회'쪽 사람들은 '노산문학관' 찬성운동을 벌여왔습니다.

3.15의거 기념사업회가 49주년을 맞아 발행한 '3.15의거보' 창간호.


이은상 비판하면서 '작은 이은상'이 써준 축시 게재?

결국 마산시는 애초 '노산문학관'으로 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마산문학관'으로 이름을 바꿔 개관했는데요. 최근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 '건국절' 운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마산의 문인이라는 작자들도 덩달아 다시 '노산문학관' 개명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3·15의거기념사업회는 마산문인협회와 공동으로 '3·15의거 기념백일장'을 개최하는가 하면, 이은상 옹호에 앞장서고 있는 관변문인들을 백일장 심사위원으로 위촉하는 등 흐리멍텅한 행동으로 비난을 사왔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이 청탁해 받은 기고문에 그런 행태를 지적하는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필자에겐 아무런 설명도 없이 게재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게재 거부당한 글 확인 : 민주항쟁 팔아먹는 비겁한 글쟁이들)

그런  3·15의거기념사업회가 '노산문학관'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는 사설을 실었으니, 칭찬해야 마땅하긴 하지만 뭔가 개운치 못한 점도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창간호 1면에 실린 '축시'의 작자가 바로 '살아있는 작은 이은상'이라 할만한 이광석 시인이네요. 그는 이은상 옹호론자이기도 하면서, 1987년 6월항쟁 이전에는 시민들의 시위에 대해 "좌경용공분자들에게 발호의 기회를 제공…궁극적으로 북괴를 이롭게 할 것"이라며 용공 공세를 펼친 어용언론인 출신의 이광석이었습니다. (관련기사 확인 : 지역언론의 눈물겨운 정권옹호)

2면 사설에서 이은상을 호되게 비판하면서, 1면에는 이은상을 옹호하는 이의 축사를 받아 쓰는 3·15의거기념사업회의 이중성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광석이 쓴 축시. 그는 "이제는 우리 모두가 하나로 아우르는 포용의 용광로가 되자"고 주장한다.


어쨌든 < 3·15의거보 >의 창간호 사설 '
<노산> 문학관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증거물로 남겨둡니다.


참으로 지겹다.
마산문학관을 노산문학관으로 개명하자는 일부 문인들의 움직임 말이다.
상생과 화합이니 문화 브랜드 창조니 하는 레토릭의 함정에 빠져 상식을 포기하는 일이 왜 지금까지 횡행하는지 이해할 수도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마산의 브랜드 가치가 이은상으로 말미암아 더욱 고양될 수 있다면 굳이 노산이라는 명칭을 거부할 생각이 없다. 문제는 이미 해묵은 논리가 된 노산문학관 개명 필요성을 역설하는 목소리가 뜬금없이 들려오면서 마산의 도시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고, 그로 인해 그로텍스크하기까지 한 장면이 끊임없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다! 불합리와 불법이 빚어낸 불상사다!"라고 이은상은 외쳤다. 그가 성웅 이순신이라 칭한 이승만을 욕보이는 마산시민들에게 충분히 내지를 법한 일성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은상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냉정한 평가 후에 마산문학관 한편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합당한 도리다. 마산시민들은 최대의 예의를 차렸고, 마산문학관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런데 적반하장 노산문학관으로 이름을 바꾸자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나아가 3.15와 가고파를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려는 천박함은 보고 있기 곤혹스럽다.

'3.15 원혼을 달래기 위한 이은상(가고파) 공연(음악회, 무용공연)'이라는 심각한 모순 어법이 창궐하고, '3.15 정신 계승하여 경제발전 이룩하자!'라는 촌극까지 발생하고 있다.

일부 글 쓰는 사람들의 안일한 사고를 탓할 수밖에 없다. 공허한 수사와 기계적 결합에 몰두한 나머지, 문인의 제1조건이라 할 수 있는 성찰, 상식, 인간에 대한 예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3.15의거를 모욕한 시인이 어떻게 3.15 원혼을 달랠 수 있단 말인가? 진정한 화해와 용서는 어물쩍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상생과 화합 좋다. 마산의 브랜드 가치 고양 역시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는 브랜드를 만들어 무엇 할 것이며, 노산문학관을 찾아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마산을 찾아온들 떳떳할 수 있겠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3.15와 이은상이 동반하려면 '가고파'에 대한 사회 문화적 접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고, 반성 역시 뒤따라야 한다. 이은상이 '가고파'라는 절창을 통해 묘사했던 마산 앞바다는, 이은상이 시대의 영웅이라 떠받들었던 박정희와 전두환에 의해 오염되고 파묻혔다.

성찰하고 되물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혹여라도 마산문학관 위탁운영권에 욕심을 내고, 그에 대한 정당성 확보 차원에 이은상을 들먹이는 것이라면 3.15는 말할 것도 없고 이은상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더는 노산문학관 운운으로 3.15에 대한 명예훼손을 자행하지 않았으면 한다. 마산이 울고 있다. (< 3·15의거보 > 창간호 2면, 2009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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