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국가가 입 막아놓고 이제와서 시효소멸?

기록하는 사람 2009. 2. 1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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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학살 시효소멸 주장은 2차 부관참시

"우리는 용서하고 싶다. 그러나 누구를 용서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아공에서 자신의 딸을 학살당한 한 아버지가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증언석상에서 했다는 말이다.

아마도 한국 역사상, 아니 한민족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인간적이고 반인권, 반문명적인 국가범죄라면 아마도 한국전쟁 당시와 전후의 '민간인학살' 사건일 것이다. 여기서 민간인학살이란 '합법적인 재판절차 없이 국가공권력에 의해 비무장 민간인이 대량으로 불법 처형된 사건'을 말한다.

어제(10일)와 오늘(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민간인학살과 관련한 두 건의 판결이 있었다. 하나는 울산보도연맹 유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이었고, 또 하나는 경북 문경 석달동 민간인학살 유족들이 낸 소송이었다.

법원은 울산보도연맹에 대해선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문경 사건에 대해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두 소송에서 공히 쟁점이 된 것은 시효 소멸 문제였다.

1961년 유족들에 대한 검찰 공소장.

나는 두 재판에서 피고인 대한민국이 시효 소멸을 주장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국가가 나서서 모든 증거를 인멸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감옥에 집어넣어 침묵을 강요해놓고는, 이제 와서 "왜 일찍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냐"며 시효 소멸 운운하는 작태가 비겁하고 비열함을 넘어 후안무치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가?

국가가 증거인멸하고, 침묵 강요하더니…

학계와 유족들은 8 .15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전후에 이르기까지 집단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가 무려 100만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치의 유태인학살과 일제의 관동대학살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엄청난 학살사건이 반세기가 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쳐질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물론 그것은 국가가 조직적으로 이 사건은 은폐해 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이 사건을 발설하거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에게 용공분자(容共分子)라는 올가미를 씌워 아예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이 때문에 유족들은 내 부모나 형제자매가 언제, 어떻게, 왜 죽었는지도 알고자 하는 최소한의 권리도 박탈당한 채 벙어리 냉가슴 앓듯 50여년을 살아왔다.

물론 반세기동안 단 한번도 유족들에 의한 진상규명 요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학살의 최고 책임자인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유족들의 통한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산과 통영, 김해, 밀양, 동래 등 경남도내에서도 속속 유족회가 결성되었고, 대구와 경주, 경산에 이어 서울에서 전국유족회까지 결성돼 진상규명운동에 나서게 된다. 또한 국회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양민학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조사활동을 벌인 결과 '양민학살 사건 처리 특별조치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건의안을 내놓기에 이른다.

그러나 박정희 등 일부 정치군인들에 의한 1961년 5.16쿠데타는 이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돌리는 것은 물론 유족들의 기나긴 침묵을 강요하게 된다. 유족회 간부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혁명재판에 회부하는 것도 모자라, 모든 활동기록을 압수하고 합동묘를 파헤치고 묘비까지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이른바 부관참시였다.

이 때문에 아쉽게도 당시 이들 단체가 남긴 활동기록이나 학살 증거물들은 거의 전해지는 게 없다. 당시 국가가 모두 압수해가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의 공소장과 판결문, 그리고 재판부에 증거물로 제출된 목록만 전해지고 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집회계 △수첩 △선언문 △규약 △돌꽃(경북유족회 기관지-필자 주) △위령제 발기취지문 및 준비위원 명단 △위령제 실시 삐라 △이복녕(경북유족회 원호부장)의 추도사 △묘비건립을 위한 활동 △발굴일지 △묘비건립기금 찬조청원서 △유골수집철 △묘비건립취지문 △묘비건립 광고 임원명단 △조사명부 △사진 △회원가입원 및 명단 △고발장 △충무시피학살자유족회 결성대회 일지 △대회보고 △추도식 경과보고 △추도사 △동래지구 피학살자유족회 결성 회의록 △경남지구 피학살자유족연합회 결성대회 회의록 △경과보고서 △임원명단 △취지문·선언문 △공문 △1·2차 임원회의록 △여론환기 의뢰서 △임원명단 △취지문·선언문 △묘비건립취지서 △임시의장단 회의록 △안내장 △규약 △신문호소 △결의문 △회가 △고발성명서 △경주시위 일지 △경주 위령제 순서 △위령제 광고 △시굴식 일지.

이와 같은 활동기록이 없는 대신 당시 혁명검찰부의 공소장과 판결문을 통해 유족회 활동이 어떻게 이뤄져 왔는지는 짐작해볼 수 있을뿐이다.

1960년 마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마산유족회 결성식. 유족회장으로 선출된 노현섭씨의 일기장에는 "장내는 울음바다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불법으로 가족 잃은 유족, 법으로 감옥행

재판절차를 무시한 불법 처형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그 억울함을 호소할 권리마저도 박탈당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법'과 '재판'에 의해서였다.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하고, 6월 21일에는 현역 군인(장교)이 재판장이 되는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 조직법'을 만든데 이어, 바로 다음날인 22일에는 자신의 집권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과 세력을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었다.

혁명재판소 심판부는 국군 현역장교로 임명되는 재판장 1인과 군법무관 중에서 임명되는 법무사 1인, 그리고 군법무관과 법관, 변호사 각 1인으로 임명되는 심판관 3명 등 총 5명으로 구성됐다. 또 30명으로 구성되는 혁명검찰부 검찰관은 박정희 의장의 승인을 얻어 혁명검찰부장이 임명하도록 했다.

이렇게 구성된 혁명검찰부와 혁명재판소가 민간인학살 유족들에게 적용한 죄목은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 '특수반국가 행위'였다. 이 조항은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의 지위에 있는 자로서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그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1961년 12월 7일 혁명재판소 심판부 제5부(재판장 김용국, 법무사 박용채, 심판관 심훈종, 이택돈, 최문기)는 대구유족회 이원식 회장을 사형에, 전국유족회 노현섭 회장과 권중락.이삼근 경북유족회 총무를 징역 15년에, 문대현 경남유족회장을 징역 10년에 처하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에 나타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상 종합하여 심안하니 북한괴뢰의 동조자였던 보련원 및 국가보안법 기 미결수의 피살은 불법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이라고 할 수 없을진대 애국적이고 조국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염원한 존재였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의 사고나 존재를 애국자연하게 위장선전하거나 과시할 가치는 없다 할 것이다. 공산주의 동조자 혹은 공산주의자였던 그들이 염원하였다면 북한괴뢰가 간접침략의 책략으로 기대하는 조국과 민족의 자주독립방안을 염원하였을 뿐이다.

이 점 선언문 취지서 및 추도사의 작자인 피고인 등이 누구보다도 더 인식하였다고 인정된다. 더구나 남로당원이요, 보련원이었던 동 이원식, 경북유족회 총무로서 혁신정당과 야합하여 실질적 회운영에 의식적으로 주동적인 활동을 한 보현원인 동 권중락, 경남유족회장인 동 문대현, 청구대학 문과 3년을 중퇴하고 민자통 경북연맹 상임위원 민민청연맹원이요 경북유족회 총무였고 전국유족회 사정위원 자격으로 지방조직을 열성적으로 하던 동 이삼근, 노동자 조직 생활에 경험이 풍부하고 경남유족회 및 간첩 소외 신석균과 전국유족회 조직에 주동적인 활약을 하고 동 회 회장이 되고 지금 와서 유족회 성격을 이상하게 느낀다는 동 노현섭 등의 보통상식으로서도 유족회는 성격과 그 활동결과에 대하여 북한괴뢰가 간접침략의 한 방안으로서 기대하는 그들의 동조자의 확대 및 조직강화 그 사상선전에 동조하는 행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음에 피고인 등은 전시 경력 및 활동과 <돌꽃>의 취지문, 선언문, 추도사의 문장요지에 비추어 동 회의 성격과 설시 영향을 숙고한 결과 행동한 것으로 인정되는 등을 종합하여 이를 인정할 수 있으므로 판시사실은 그 증명이 충분하다."

판결문에서 특이한 것은 "보련원 및 국가보안법 기 미결수의 피살은 불법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라는 부분이다. 재판부도 당시의 학살사건이 재판을 거치지 않은 불법처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북한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 갖고 유죄를 인정한 것이다. 이 판결보다 앞선 11월 6일 동래유족회에 대한 혁명재판소의 판결문은 좀더 구체적이다.

노현섭씨(맨 왼쪽)와 일본 중앙대 동창생들. 당시 노현섭씨는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상태였다.


"6·25동란시에 대한민국 군·경찰에 의해 작전상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익분자가 아니라는 근거없는 망언과 재판절차없는 사형집행이 부당하다는, 당시의 전국(戰國)을 망각한 편견에 사로잡혀…군관민의 이간을 책동하면 결국 반공체제가 균열되어 간접침략을 획책하는 북한괴뢰집단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도…국가의 안위 따위는 일절 불원하는 비국민적 사상의 불온분자이므로 피고인 김세룡, 동 송철순에게 각 징역 5년에 처한다."

학살된 민간인들을 가리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이라고 할 수 없을진대 애국적이고 조국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염원한 존재였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는 표현도 궁색하기 짝이 없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이라고 할 수 없는' 국민이라면 재판도 없이 그냥 쏴 죽여도 좋단 말인가. 이와 관련,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4개월 전 국회 속기록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법무, 내무부차관도 인정한 보도연맹 조직의 문제

1950년 2월 11일 국회는 정부가 조직한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의 문제점에 대해 국회의원들이 법무부와 내무부 차관을 출석시켜 추궁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장경근 내무부차관과 김갑수 법무부차관은 보도연맹 가입대상이 분명히 '전향 또는 자수한 좌익'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질의·답변과정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국가에서 신분을 보장해준다'고 했던 사실도 밝혀졌다. 그리고 그들은 주로 반공강연회나 미전향 좌익세력 색출에 앞장섰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좌익활동과 아무런 관계없이 할당량을 맞추기 위해 강제가입시킨 사람도 대거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내무부차관의 답변을 들어보자.

"그 보도연맹에 가입한 중에 아마 안들 사람도, 보도를 필요가 없는 사람도 섞여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차차 검토해서…처음부터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위선 전부 포섭해놓고 그 중에서 필요없는 사람은 나가달라고 하고, 필요있는 사람중에는 어떤 인물을 거기에 적합한 어떤 보도를 하는 것, 적절한 방법으로 그것을 분류해 가지고 그런 방법으로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법무부차관의 답변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노동자나 농민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멋모르고 농민조합 등에 가담했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마음 속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선 선량한 사람이라도 1차 보도연맹에 가입을 시켜서 거기에서 일정한 절차를 거친 후에 다시 보도연맹을 탈퇴시킬 생각으로 있습니다."

정부 책임자의 이런 답변이 있고 나서 4개월 만에 6·25가 터졌고, 미처 옥석을 가릴 틈도 없이 대대적인 학살이 이뤄졌던 것이다. 따라서 학살당한 보도연맹원 가운데 일부 위장전향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좌익과 무관한 양민이거나 과거의 좌익단체와 결별하고 전향한 사람들이었다는 결론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5.16혁명재판부는 학살당한 보도연맹원들을 '재판없이 살해해도 문제없는 사람들'이란 전제 아래 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유죄'를 판결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보면 당시 이승만 정권과 그 이후의 쿠데타 정권은 민간인학살을 조직적으로 은폐했을 뿐 아니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의 입까지 철저히 틀어막았다.

이처럼 대한민국 정부와 사법부는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외면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강요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유족들이 낸 소송에 대해 '시효 소멸' 운운하는 뻔뻔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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