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63년 전 '실패한 민중항쟁'을 아시나요?

기록하는 사람 2009. 2. 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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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너무 엄혹하다. 마치 박정희 시대나 이승만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실제 현 정권은 이승만을 다시 국부(國父)로 추앙하고 그의 분단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칭하며 반대세력을 싹쓸이하고픈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승만의 친위조직이었던 국민회와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땃벌떼와 백골단, 민중자결단과 같은 반공우익집단들이 '뉴라이트'로 이름만 바꿔 다시 발호하고 있는 것도 그 때를 연상케 한다.

이럴 때일수록 현대사를 되돌아보면서 역사에서 지혜와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한국 우익집단과 토호세력의 뿌리' 를 약 50회에 걸쳐 추적해보려 한다.

3.15와 4.19 이전에 마산에도 대규모 민중항쟁이 있었다

1946년 10월 7일 마산을 비롯한 경남 일대에는 미 군정을 상대로 대규모 민중봉기가 발생한다. 마산에서만 최소 6000여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약 12~17명이 죽었으며, 150여명이 미군과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다. 인근 창원군에서도 5명이 죽고 2명이 부상했으며, 24명이 체포됐다.

진주에서도 미군의 발포로 시위군중 5~6명이 죽고, 10여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00여명이 체포되는 등 도내 18개 시·군에서 최소 7만3900명, 최대 6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조선중앙연감, 1949) 사망자의 숫자나 시위의 규모만 보면 3·15마산의거나 10·18부마민주항쟁보다 더 큰 사건이다.

특히 1946년 10월봉기는 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경남·부산과 대구·경북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생했으며, 그 성격도 무장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남도사>나 <마산시사> 등 지역의 공식적인 역사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는 이상한 사건이다.

1985년판 <마산시사>를 보자. 먼저 '역사편'에는 아예 이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다만 '정치편'에서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리 길지 않은 부분이라 전문을 옮긴다.

"한민회를 비롯한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 학연 등 우익세력과, 남로당을 비롯한 전평, 전농, 민청, 부녀총동맹, 문연 등 좌익세력 사이에는 신탁통치문제 이후 격렬한 대립과 투쟁이 계속되었다. 더구나 좌익 계열은 우익 세력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각 기관의 요인 암살과 파괴 분열선동에 혈안이 되어 사회혼란을 조성했다. 이리하여 1946년 10월 7일엔 마산폭동사건을 일으켰고, 다음해인 1947년 2·7 및 7·27총파업 등으로 민족분열과 갈등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사태의 중요성을 간파한 미 군정청은 마침내 좌익 단체간부 체포령을 내렸다. 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끼쳤던 좌익계열은 이로서 모두 표면에서 사라져 버렸다." (인용문 중 '1947년 2·7'은 '1948년 2·7투쟁'의 오기인 듯-김주완 주)

이걸로 끝이다. 한국현대사의 엄청난 사건이었던 10월봉기를 이렇게 간단한 몇 구절로 평가까지 끝내버린 것이다.

마산시사의 의도적 은폐

1997년에 새로 나온 <마산시사>도 '요인암살' '파괴 분열선동에 혈안' '사회혼란 조성' '민족분열과 갈등 조성' 등 자극적이고 주관적인 문구가 빠지긴 했으나 여전히 '마산폭동사건'의 배경과 원인, 전개과정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1999년 발간된 <마산개항백년사>의 '마산소사'에도 10월봉기는 물론 해방공간의 각종 사회운동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물론 당시의 10월봉기에 대해 좌파는 '인민항쟁', 우파는 '폭동'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하고 있는 등 민감한 부분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엄격한 역사적 '평가'는 역사학자에게 미루더라도 엄연히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기록'만 하는 데도 이렇게 인색한 이유가 뭘까.

좌익이 주도한 사건이라지만 봉기의 배경이 △친일파 잔존과 재기용에 대한 반발 △미 군정의 실정 규탄 △가혹한 식량 공출과 식량 부족 △전재민과 실업자의 생활난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좌익에 대한 테러 및 탄압 △미소공위 결렬로 통일정부수립 기대에 대한 좌절 등이었고,(현대 한국을 뒤흔든 60대 사건, 동아일보사, 1988) 여기에 대다수의 시민이 동참했다는 이유로 인해 애써 사실 자체를 은폐하고 싶은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10월봉기를 계기로 우익단체와 경찰의 대대적인 '좌익사냥'이 본격화했고, 이런 좌익탄압의 바탕 위에 자신의 입지를 세운 기득권 세력이 아직도 이 지역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도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가로막고 있는 요인은 아닐까.

<마산시사>의 이같은 묵살 또는 은폐에도 불구하고 10월봉기는 지역의 몇몇 개인적 기록물과 생존자의 증언, 당시 언론보도, 그리고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던 미 40사단 관계자료 및 보고서, 박헌영이 펴낸 <10월 인민항쟁>, 학자들의 연구논문 등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재조명 필요한 지역현대사

또 경남매일신문이 1974년 3월부터 1976년 11월까지 약 3년간 연재한 '사건 30년' 기획시리즈에서 '10월폭동'이란 제목으로 한번 다룬 바 있고, 왕수완씨가 경남신문에 연재한 '마산유사'에서도 역시 이 사건을 한번 다루고 넘어갔다. 이와 함께 1952년 초대 마산시의원을 지낸 박계진씨가 쓴 <합포의 야화> 2집에도 '국민회 피습사건'으로 10월봉기를 일부 다루고 있다.

마산과 경남 일대의 10월봉기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자료로는 경남대 심지연 교수가 쓴 <10월 인민항쟁 연구>와 경북대 강사로 있는 허종씨가 석사학위 논문으로 쓴 '해방직후 경남지방의 민족국가 수립운동과 10월항쟁'(1997)이 있고, 신종대씨의 논문 '해방직후 부산·경남지방의 변혁운동', 박철규씨의 '해방직후 마산지역의 사회운동'등이 있다. 또 경상대 장상환 교수가 지난 1995년 발표한 '해방직후 진주지역의 정치변동'을 통해서도 진주지역의 10월봉기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자료 중 언론에서 언급한 10월봉기는 모두 '폭동'으로 표현돼 있으며, 그 배경이나 원인에 대해 '공산 좌익세력의 선동'이라고만 돼 있을 뿐 수십만 명의 민중이 궐기한 진짜 배경을 진지하게 접근한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동아일보가 펴낸 책에서도 "한마디로 말해 해방 후 미 군정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독립국가 건설을 비롯한 사회적 변혁에 대한 민중의 기대가 좌절되고, 혹심한 식량난과 생활난에 의한 불만이 미 군정과 지방의 관리를 공격의 대상으로 폭발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폭동'이냐, '인민항쟁'이냐를 떠나 해방 후 경남에서 발생한 최대규모의 민중봉기였다는 것만으로도 이를 다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

마산 10월 봉기의 발생

1946년 10월 7일 오전 9시 마산시청 앞 도로. 부녀자들을 선두에 세운 수천명의 시위대가 몰려들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쌀을 배급하라."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라."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

조선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마산민주주의청년동맹(민청)과 마산노동조합협의회(전평), 마산농민조합(전농), 부녀동맹 마산지부 등 민주주의민족전선 마산시위원회(민전·위원장 이필근) 참가단체의 주도로 마산의 10월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민전에는 마산지역 30여개 좌익계 단체가 참가하고 있었으며, 핵심단체인 민청의 회원은 200여명, 전평 9923명, 부녀동맹 200여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파가 계속 늘어나자 미 군정 관리가 시위대 앞에 나타났다.

"여러분, 쌀을 준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여러분을 현혹시키기 위해 퍼뜨린 헛소문일 뿐입니다. 즉각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무슨 소리냐. 일제 때보다 더 먹고 살기가 힘들다. 왜 관리들에게만 쌀을 주고 민중들에게는 주지 않는 거냐. 우린 굶어죽으라는 거냐."

 "친일파 관료와 경찰을 즉각 해임하라."
"배고파서 못살겠다. 차라리 정권을 우리에게 넘겨라."

이 때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것이다. 순식간에 선두에 있던 서너 명이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시위대는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남성파출소와 우익단체 국민회 습격

비슷한 시간 남성동 제일은행 앞 길. 이곳에도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한 여성의 선동연설을 듣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나서도 달라진 게 뭐가 있습니까.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미군에 아첨하여 경찰과 행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앉아서 인민의 정치적 자유를 빼앗고 있으며, 가혹한 식량공출과 차별적인 식량배급으로 농민과 도시인민은 아사 직전에 있습니다."

"옳소. 시청으로 갑시다."

1946년 마산 10월봉기 때 시위대의 습격을 받은 남성동파출소와 그 옆의 국민회 건물.


시위대는 그길로 남성동 파출소 옆 선창길을 따라 시청으로 향했다. 그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지서를 쳐부숴라. 친일경찰을 몰아내자."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갑자기 발길을 돌려 함성을 지르며 남성파출소를 습격, 경찰관을 몰아내고 무기를 빼앗아 공포를 쏘아댔다. 이들은 다시 "우익 반동분자들을 처단하자"고 외치며 파출소 옆에 있는 우익단체인 국민회 사무실로 몰려갔다.

당시 국민회 사무실에는 위원장인 손문기씨와 이순상·유석형·최철용·강태호·안승규·황영수 등 간부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하고 있던 중 시위대의 기습을 받아 옥상으로 도망쳤다. 시위대 속에 숨어있던 조병기씨(총무부장)는 제일은행 뒷집인 서순정씨(재정부장)의 집 창고로 황급히 숨었다.

시위 군중들은 인근 건물과 소방서 불종대를 통해 국민회 옥상에 진입, 이들 간부들을 폭행했다. 최철용·유석형씨는 시위대를 피해 환기통으로 뛰어내렸으나 시위대에 붙잡혀 각목과 쇠갈퀴 등으로 무수한 폭행을 당했다. 또 서순정씨는 시위대가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시위대가 파출소를 습격한지 20여분이 지나 미군과 기동경찰이 출동했다. 이들은 기관포와 소총을 마구 발사하며 시위대와 총격전을 벌인 끝에 11시쯤 완전 진압됐다.

한편 구 환금장유와 중산철공소 노동자들로 구성된 신마산 일대의 시위대는 지금의 보훈지청과 경남대 사이에 있는 마산감찰대(옛 보안대 자리)를 습격했다. 이곳에서 투석전을 벌이던 시위대 역시 오후 2시께 미군과 경찰, 국방경비대의 발포로 여러 명의 사망자를 낸 후 해산했다. 저녁 8시25분에도 흩어졌던 시위대 500여명이 미적십자 여성요원 숙소에 투석을 하기도 했으나 역시 미군이 출동하자 해산했다.

좌익지도자 대거 피검·월북

이날 시위로 마산에서는 12명의 시민과 경찰 1명이 사망하고, 150여명의 군중이 체포됐다. 또 봉기를 주도한 혐의로 당시 민전 마산시위원회 선전부장이던 이상조를 비롯한 김용찬·김환·유근완·이병도·김윤기 등이 체포됐으며, 민전 위원장이던 이필근을 비롯한 김명규·박양수 등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일의 마산봉기는 인근 창원군에도 영향을 미쳐 9일과 11일 사이에 역시 봉기가 일어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소는 알 수 없으나 9일 오후 8시쯤 200여명의 군중이 지서를 공격, 점거에는 실패하고 체포됐으며, 11일 웅천면에서도 400여명의 군중이 시위를 전개,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으며, 24명이 체포된 것으로 미군정 보고서는 전하고 있다.

이밖에 진주와 통영·의령·동래·하동·창녕·양산·울산·진양·김해·고성·함안·밀양·합천·거창·삼천포 등 도내 대부분의 시·군에서 발생한 10월봉기로 인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처럼 결과만 놓고 보면 이 사건은 '실패한 민중항쟁'이었다. 이 실패가 공산당 진영의 '좌익모험주의' 때문이었든, '미군정의 무자비한 탄압' 때문이든, 어쨌든 실패는 실패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10월봉기는 지금까지 '대구폭동'으로만 기록돼 왔고, 특히 경남 일대에서 벌어진 시위는 거의 은폐돼 왔다.

마산의 10월봉기도 △조선공산당이 치밀한 계획과 선동에 의한 것이며 △선량한 민중에게 쌀을 배급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시위대를 모았고 △부녀자를 대열의 선두에 세웠으며 △국민회를 피습, 우익단체 간부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서순정씨를 살해했다는 점만 강조돼 왔다. 따라서 시청이나 감찰대 앞 시위에 대한 언급은 없이 남성파출소와 국민회 습격사실만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올 뿐 전체적인 봉기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은 별로 없다.

봉기의 근본적인 배경과 원인, 전개과정, 시위군중과 사상자의 숫자 등은 지금도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미군의 정보보고서와 언론보도 등을 토대로 대체적인 내용을 짐작해 볼 뿐이다.

10월봉기의 배경과 원인은?

모든 역사적인 사건이 그렇듯 경남의 10월봉기도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선동으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모스크바 삼상결정에 대한 좌·우익의 대립은 우익세력이 좌익단체를 습격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삼상결정에 대한 인식의 오류는 앞서 살펴본 바 있다.

경남의 좌익이 1946년 1월 들어 찬탁으로 입장을 정하면서 마산에서는 최초로 인민위원회의 간판과 창고의 물품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곧이어 좌익세력이 한민회 사무실을 습격,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역시 1월 9일 부산에서는 우익청년들이 총을 들고 경남도인민위원회와 부산시인민위원회를 습격, 4명의 중경상자를 냈다. 진주의 우익단체가 사천의 청년동맹을 습격하는 일이 일어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2월 4일에는 하동에서 청년동맹과 독촉청년단이 충돌했고, 울산 언양 포항 함안 등에서 우익청년들에 의한 테러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4월 들어 미 군정의 대대적인 좌익탄압이 시작됐다.

질레트 경남 군정장관은 3월 28일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6개월간 정치단체 지도자가 정부의 일을 방해했으나 이제는 강력한 단속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체나 개인이 정부에 적대적인 행사를 할 경우엔 구금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질레트는 또 "군정의 방침을 파괴하고 민중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논설은 중지할 때가 됐다"면서, 군정에 비판적인 신문에 대해서는 발행을 중지시킬 것이라고 밝혀 대대적인 언론탄압을 예고했다.

질레트의 경고에 뒤이어 4월 1일 밀양에서 경찰이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사무실을 급습, 인민위원장 김병환을 비롯한 민전 간부 10여명을 체포했다. 4일에는 고성, 6일에는 마산, 8일에는 함안과 통영, 10일에는 진주에서 좌익단체를 급습, 300여명의 인사들을 검거했다.

9일 부산에서는 도·시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모든 좌익운동조직을 급습, 단체의 서류와 장부를 압수하고 윤일·노백용·김동산·이상도·강영순·서종덕 등 핵심거물 21명을 체포했다.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중보>와 <대중신문>, <인민해방보>, <신한일보> 등 신문사가 서류장부들을 압수당했다. 좌익에 우호적이던 한국인 관료들은 공직에서 해임됐다. 거창과 하동 등 3개 군의 군수가 파면됐고, 160명의 경찰이 해임됐다. 4월 15일 진주에서는 민전 산하 각 단체의 자금 동결령을 발동, 금융기관에 저금한 돈의 지불을 중지하고, 단체의 사무실을 전부 몰수했다. 마산에서도 5월 6일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16개 단체의 예금동결이 단행됐다.

이런 가운데 민중의 생활은 처절했다. 1946년 4월부터 2개월간 경남지방에서는 40여명이 굶어죽었으며, 부산시내 부민·남부민 국민학교의 전교생 2300여명 가운데 결식학생이 1600명에 이른다는 것이 당시 신문보도에 나타나고 있다.

남로당의 선동으로만 볼 수 있을까

진주에서도 식량부족으로 결석하는 중등학생이 매일 수백 명이었으며, 거제도민 70%가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민중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면서 쌀을 요구하는 시위가 도내 곳곳에서 벌어졌다. 1946년 4월 진해에서는 귀환동포들이 "쌀을 달라"며 시위를 벌였으며, 7월 6일 부산에서는 시민 2000여명이 식량배급을 요구하며 시청에 몰려가 유리창을 부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인 끝에 많은 부상자를 내기도 했다.

마산에서도 8월 21일부터 사흘간 시민들이 시청에 몰려가 쌀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28일에도 귀환동포 800여명이 쌀을 요구하며 시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고 15명을 체포했다.

한편 미 군정은 해방초기에 실시한 '미곡 자유판매주의'정책이 미곡의 밀수출과 투기꾼의 매점매석, 미곡가격의 폭등으로 나타나고, 오히려 쌀부족 현상이 심화되자 1946년 1월부터 미곡을 수집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군정의 미곡수집 정책은 시기와 방법에서 완전히 실패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공출가격이 시중가격보다 낮은데다, 식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실시하다 보니 농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발생했다. 그러나 군정은 강제공출을 강행했고, 농민들의 미 군정과 경찰에 대한 불만은 더욱 높아져 갔다.

10월봉기는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9월 부산·마산·진주의 철도 및 체신노동자 총파업을 거쳐 발생한 것이다.

당시 신진당과 조선공산당·한국독립당·인민당·독립노동당·남조선신민당·민족혁명당·사회민주당·청우당 등 주요 정당이 10월 24일 연석회의를 갖고 미 군정 하지 중장에게 전달한 의견서에는 10월봉기의 원인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미소공동위원회 무기휴회와 아울러 통일 임시정부 수립의 희망이 단절되어 조국해방 전도에 대한 절망감에서 오는 격렬한 울분 △경찰 및 각 행정기관, 기타 사업기구 내에 박혀 횡포한 행동을 하는 민족반역자와 친일파 및 군정에 아첨하는 신형 왜놈 등 일제 잔재적 반동분자에 대한 극도의 증오 △무정견한 식량정책에서 나온 가혹한 공출제에 대한 반감과 식량난으로 인해 조선민족 해방 이전의 생활보다 더 불행하고, 정치적 자유도 유명무실하다고 생각게 되고 이 절박한 현상에 대한 반발의식이 극도에 달하여 광범하고 심각한 민중의 봉기에까지 이르게 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지 중장은 10월봉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지령이 없었다면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이나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은 명백하다. 간단히 말해 10월봉기는 공산주의자들이 조종한 것이지 결코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하, 234쪽)

이에 대해 각 정당들의 합동의견서는 다시 이렇게 반박한다.

"각하(하지 중장)는 이 거대한 민중봉기가 전혀 선동만으로 발생됐다고 지적하였으나 5000년 민족의 역사와 문화적 생명력을 가진 조선민족으로서 각자의 판단이 아닌 오직 악질적 선동에만 의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은 조선민족의 긍지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과거 동학당봉기도 3·1운동도 그 당시 집권자들은 이를 전혀 선동에 의한 폭동이라고 잔인한 탄압을 했으나 그것은 조선민족 생명의 정당한 투쟁이었습니다."

이 같은 하지 중장과 우리 정당의 상반된 입장을 보면서 다시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과연 누구의 평가에 의해 10월봉기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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