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63년 전 왜곡된 신문보도가 낳은 비극

기록하는 사람 2009. 2. 3.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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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찬탁-반탁 운동의 진실은?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 1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톱으로 실렸다. 중요한 내용이므로 제목과 본문 일부를 소개한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반탁.

외상회담 논의

조선독립 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至急報)]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회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 가고 있다. 즉 번즈 미국무장관은 출발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떤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분명하나…(후략)"

이 기사는 즉각 한반도를 반탁운동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이는 또한 첨예한 좌우대결을 일으켜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을 고착화하는 계기가 된다. 신문기사 하나가 그 나라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사를 보도한 동아일보는 그로부터 43년 후 자사의 당시 기사가 잘못됐음을 스스로 지적(?)하는 내용을 자매지에 게재한다. 월간 <신동아> 1988년 1월호 별책부록 '현대한국을 뒤흔든 60대 사건…해방에서 제5공화국까지'를 통해 당시 잘못 해석된 신탁통치안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한 것이다.

"그 시대 한국 정치인들이 그(삼상회담 합의내용) 구체적 내용에 대한 정보와 이해없이 맹목적으로, 그리고 극히 감정적으로 대처하였다는 반성을 아무리 하여도 충분치 않을 것 같다."

잘못 해석된 신탁통치안

이 책에 실린 고려대 이호재 교수의 '모스크바 3상회의와 신탁통치안'이란 글에는 '신탁통치 부분에만 신경 쓴 게 큰 실책''협상실패로 분단 고착' 등 소제목과 함께 "당시 한국사람들은 대개 3상 회담 합의내용 중 일부인 신탁통치 부분에만 관심을 집중시켜 반대를 했지, 더 중요한 부분인 임시통일정부 수립 부분에 관한 것에는 크게 주의를 하지 않았다"며 당시 신탁통치안이 엉뚱하게 왜곡됐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모스크바 합의의 진짜 내용에 대해 "그 성격면에서 △국내적으로는 좌·우 연립정부 △국제적으로는 미·소 양국의 이해를 절충한 중립적 통일정부, 그리고 △어느 한 나라의 강대국 지배가 아니고 4강대국이 서로 견제할 수 있는 4개국 공동지배하에 있을 가능성을 가진 통일방안으로 개발될 수 있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당시 잘못된 반탁운동만 없었다면 '좌·우 연립 형태의 통일정부'가 수립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문제연구소가 펴내는 계간지 <역사비평> 1989년 겨울호는 신동아의 고백형(?) '역사바로잡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1945년 당시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기사가 '미국측의 음모'에 놀아난 것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당초 미국의 루즈벨트는 1943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주장해 왔고, 그 기간도 최소한 20~30년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이는 카이로선언이나 테헤란회담, 얄타회담 등에서 루즈벨트의 발언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이같은 주장이 모스크바 회담에서 부정되고, 한반도에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최고 5년간 4개국이 '원조·협조(후견)'하는 방식(삼상결정 전문 중)으로 결정되자 미국이 이를 의도적으로 왜곡, 국내신문에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언론플레이였나

반탁.

찬탁.

찬탁.

이에 따라 <역사비평>은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대해 적어도 세 가지의 왜곡을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것은 반소논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왜곡이라는 것이다.

둘째로는 모스크바 삼상회담의 내용을 신탁통치안으로 국한시켜 보도함으로써, 조선임시정부 수립이라는 핵심내용을 의도적으로 빠뜨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삼상 결정의 전문을 읽어보면 '신탁통치'라는 용어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조선 임시정부와 협의 후 5년 이내의 기한으로 하는 조선에 대한 4개국 후견의 협정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영·중·소 제국 정부의 공동심의를 받아야 한다"고 함으로써, 조선임시정부와 이 문제를 반드시 협의토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삼상 결정은 어느 한 강대국의 일방적인 지배를 견제하기 위한 절충안이었음에도 불구, 신탁통치안을 식민지화와 다름없다는 식으로 보도해 조선인들에게 왜곡된 인식을 심어줬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같은 동아일보의 보도는 좌·우를 막론하고 전국을 반탁운동으로 들끓게 만들었다.

지역에서도 반탁운동의 불길

경남에서도 '삼상 결정=신탁통치=식민지'로 이해한 정당·사회단체들은 즉각 반탁운동을 조직화한다. 1945년 12월 29일 오후 5시 경남기자회는 신탁통치 배격운동의 구체적 전개방법을 토의하고, "민족의 자유를 유린하는 신탁통치를 사투를 걸고 배격한다"는 결의문을 채택, 서울과 평양에 주재하고 있는 미·소 양군 사령관에게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찬탁.

또 이튿날인 30일 오전 11시에는 부산 민주중보사 2층에서 조공 경남위원회, 인민당 부산지부, 도·시 인민위원회, 노동조합평의회, 해방운동자구원회, 청년동맹, 농민조합 경남도연맹, 건준 경남연합회, 건준 부산위원회, 독촉 경남위원회 등 좌·우의 각 정당과 단체 대표 200여명이 참석, '신탁통치 배격 인민대회 준비회'를 결성했다. 이 조직은 의장에 김철수(우·건준 경남연합회 부위원장), 부의장 윤일(좌·경남 인민위원장)을 선출했다.

각 시·군에서도 새해(1946년) 들어 탁치 배격운동이 본격화했는데, 남해와 밀양(1월 1일), 진주(1월 3일), 고성·통영·의령(1월 4일), 창원(1월 5일) 등으로 확산됐다.

마산에서는 1월 4일 탁치배격 시민대회를 열였는데, 대회 위원장은 건준 위원장을 지낸 허당 명도석이 맡았으며, 인민위원장인 김명규가 대회취지 연설을 하고, 한민회 선전부장 최철용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진주에서는 이보다 하루 앞선 3일 오후 2시 진주중학교 교정에서 탁치 철폐대회가 열렸다.

좌·우 살육·테러…비극의 전주곡

이처럼 좌·우익이 합세한 반탁운동은 1월 5일을 기점으로 찬·반이 갈리기 시작한다. 12월 30일 모스크바 삼상회담의 정확한 결정내용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고, 서울의 좌익이 "삼상 결정에 따른 조선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우리의 자주적인 힘으로 미·소 점령군을 철퇴시켜야 한다"는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하게 된 것이다.

이런 논의의 결과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1월 2일 이후 삼상 결정 총체적 지지를 선언했고, 경남 조공도 성명서를 통해 "삼상회의 결정이 조선에 민주주의적 임시정부를 수립케 하여 미·소가 이에 협조하면서 완전한 자주적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부산의 19개 정당과 사회단체는 6일 '삼상 결정 검토회'를 개최, 삼상 결정을 지지하는 것이 조선 독립의 첩경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삼상 결정 전문 가운데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수립이 우선이며, 찬탁·반탁문제는 민족의 주체적인 노력에 달려있다고 본 것이다.

이때부터 우익은 좌익의 달라진 태도를 민족반역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마산에서는 1월 22일 노동조합 등 30개 단체가 '반파쇼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삼상 결정 지지를 조직적으로 확산시키기 시작하는 데, 이 당시 최초로 마산 인민위원회의 간판과 창고의 물건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이후 백색테러의 전주곡이 됨과 동시에 좌익과 우익이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서곡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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