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우익단체의 기본이념은 '기회주의'였다

기록하는 사람 2009. 1. 30.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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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너무 엄혹하다. 마치 박정희 시대나 이승만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실제 현 정권은 이승만을 다시 국부(國父)로 추앙하고 그의 분단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칭하며 반대세력을 싹쓸이하고픈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승만의 친위조직이었던 국민회와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땃벌떼와 백골단, 민중자결단과 같은 반공우익집단들이 '뉴라이트'로 이름만 바꿔 다시 발호하고 있는 것도 그 때를 연상케 한다.

이럴 때일수록 현대사를 되돌아보면서 역사에서 지혜와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한국 우익집단과 토호세력의 뿌리' 를 약 50회에 걸쳐 추적해보려 한다. 이 글은 그 네 번째로  우익세력의 본질을 알아 본다.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4)해방 직후 지역 우익단체의 뿌리

해방 후 경남지역 우익단체의 뿌리는 1945년 9월말 마산에서 결성된 '한민회(위원장 민영학)'에서 찾을 수 있다.

한민회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9월 16일 서울에서 송진우·김성수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민주당(한민당)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다만 마산의 한민회가 당(黨)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은 것은 그 결성시기로 보아 지부로 인정받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알려진 대로 한민당은 일제하의 지주·예속자본가·친일관료 및 언론인·해외유학파 등이 중심이 돼 결성한 정당이다.(강만길 외, 한국현대사회운동사전, 열음사, 1988)

이 당은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하며 주도권을 장악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의 서울 입성(9월 7일) 직후 창당됐으며, 일제때 친일관료였던 경력을 내세워 재빨리 미 군정에 빌붙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행태를 보였다. 그 결과 김성수·송진우·김용무·김용순·강병순 등은 미 군정의 행정고문으로 임명됐고, 대법원장(김용무)·경무부장(조병옥)·수도청장(장택상) 등 요직을 자파세력이 차지함으로써 또다시 기득권 세력으로 부활하게 된다.

마산에서도 한민회는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명도석)의 좌파성향을 비난하며 주로 일제때 부회의원 등을 지낸 친일파를 중심으로 결성됐고, 미군이 진주하자 위원장 민영학은 군정 고문, 문화부장 이일래는 미군 특무대(CIC)의 통역관을 맡게 되는 등 열렬한 친미주의자가 된다.

일본의 편에서 '대동아 공영'을 외치며 미국을 극렬히 비난하던 이들이 친일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미군이 들어오자 태도를 돌변, 가장 먼저 친미파가 된 것이다.

한민회는 10월 23일 이승만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앙회)가 결성되자 같은 달 28일 마산 인민위원회(위원장 김명규)와 함께 조선독립촉진 마산협의회(위원장 이정찬) 결성에 참여한다. 이후 서울에서 한민당과 이승만이 제휴하고 46년 2월 28일 독촉중앙회가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 중앙회를 흡수, 독립촉성국민회(국민회·총재 이승만)를 창설하자 마산의 한민회도 국민회 마산지부로 조직개편을 단행하게 된다.

마침 이 시기를 전후해 창동에 있던 한민회 사무실이 좌익세력의 습격에 의해 불타는 사건이 발생(왕수완, 마산유사, 경남신문, 86. 9. 25)하자 이들은 아예 사무실도 지금의 남성동파출소 옆 건물로 이전해 국민회 마산지부를 발족시키게 된다.

국민회 마산지부의 조직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없으나 역시 민영학과 손문기가 이 단체를 주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1985년에 발간된 <마산시사>에는 지부장을 손문기라고 적고 있으나, 박계진씨가 73년에 펴낸 <합포의 야화>에는 △초대회장에 민영학 △부회장에 손문기 △총무부장에 조병기 △조직부장에 유석형 △선전부장에 최철용 △사업부장에 강태호 △조사부장에 이일래 △부녀부장에 신말례 등으로 기록돼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손문기는 2대부터 지부장을 맡은 게 아닌가 싶다.

국사편찬위원회 조병기 인물자료.


마산에서 최초의 친미우익단체인 한민회가 결성된 지 며칠 후인 10월 5일 부산극장에서는 경남도내 건준 대의원 242명과 도지부 위원 158명 등 400여명이 모인 가운데 건준 경남대표자회의가 열렸다. 경남 건준의 대표들은 여기서 건준을 인민위원회로 개편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57명의 인사들이 회의장을 퇴장, 5일과 6일 이틀간 별도로 모임을 갖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연합(위원장 김국태)을 결성한다. 이들은 마산의 한민회와 이름은 달랐지만 서울의 한민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고,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맡은 김국태와 김철수 등은 46년 미 군정하의 과도입법위원이 된다. 이들은 한 달 뒤인 11월 21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경남지부(위원장 김재준)를 결성한 데 이어, 12월 5일에는 1362명의 당원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시내에서 한민당 부산시당을 결성하고, 1946년 3월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회장 최석봉 장지원 김한규)와 6월 한민당 경남도지부를 결성하는 등 우익세력의 조직화를 꾀하게 된다.

또한 1946년 8월에는 서울에서 이승만이 발족한 민족통일총본부 경남지방 사무국이 마산(사무국장 최철용)과 진주(사무국장 김주학)이 조직되고, 광복청년단·서북청년단·독립촉성 청년단·대동청년단 등 수많은 청년단체를 잇따라 결성, 좌익소탕의 선봉이 된다.

마산의 광복청년단과 대동청년단·대한청년단 등은 역시 한민회 간부였던 유석형과 최철용이 모두 주도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신인가, 기회주의인가

50년만의 정권교체로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가장 재빠르게 변신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전 정권에 빌붙어 온갖 특혜를 누리던 토착 기득권층이었다. 이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바뀐 정권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직접 여당에 입당하거나 최소한 제2건국위원회 같은 외곽단체에라도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보였다. 도민들은 기득권층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저지하거나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그들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당의 선택이며, 일반 서민은 아무런 권한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개혁의 대상이 돼야 할 사람들이 바뀐 정권에서도 여전히 개혁주체 행세를 하며, 지역감정을 앞장서 부추기던 사람들이 김대중 정부 하에서 영·호남 화합의 전도사인양 행세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때도 그랬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다음으로 당황한 사람들은 친일파였다. 오직 일신의 영달을 위해 왜놈의 앞잡이로 나서 각종 일제 통치기구의 감투를 얻어 쓰고 한민족을 탄압한 자들이었다. 일제 때 경방단을 비롯한 각종 친일·관변단체 임원들과 헌병·헌병보, 고등계 경찰, 고위 공무원, 도회의원, 부회의원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해방직후 이들 친일파 대부분은 보복이 두려워 일단 어디론가 숨기도 하지만, 일부는 여전히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등을 기웃거리며 지역유지 행세를 하려 든다. 일제 때 마산에서 부회의원을 지냈거나 친일파로 분류되던 손형업, 서기홍, 이유만, 안장수 등 세도가들이 해방되던 날 동성동 민영학의 집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건준 결성에 참여한 것으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부회의원을 지냈다고 모두 친일파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부회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졌다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왕수완, 마산유사 42, 경남신문) 특히 민영학과 손형업 등이 의원으로 있던 일제 말기의 부회는 일제가 추천한 사람만이 입후보할 수 있었고, 일단 추천된 사람은 득표수에 관계없이 모두 당선됐기 때문에 사실상 일제가 내세운 앞잡이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9월 7일 미 점령군이 서울에 입성한 후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좌익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자 이를 간파한 이들 친일파들은 재빨리 건준에서 탈퇴, 친미·우익단체인 한민회(위원장 민영학)를 결성한다. "권력에 기생하던 사람은 세상이 바뀌어도 역시 권력층에 빌붙게 마련"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케 해주는 대목이다.

이즈음 해방직후 도망갔던 일제 경찰관들도 다시 나타난다. 이들은 미 군정의 비호 아래 해방된 조국의 경찰관으로 모두 복귀한다.

일제 고등계 형사 노릇을 하던 전진원이라는 자는 1945년 9월 미 군정의 마산경찰서 경무주임으로 복귀하며, 이후 초대 마산경찰서장과 제3지구(마산) 감찰관이 된다. 역시 해방까지 마산서에서 경찰관을 지냈던 임종성은 해방후 창녕경찰서장 자리를 얻게 되며, 통영경찰서장 손영달, 하동경찰서장 손무용, 군정 경남경찰청장 장자관 등도 모두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박철규, 해방직후 마산지역의 사회운동) 실제로 당시 전국의 경찰간부 1157명 가운데 82%인 949명이 일제 경찰출신이었으며, 치안감청장과 국장, 총경 등 고위직도 모두 친일 경찰이 차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아일보 1922년 10월 5일자 서기홍 판사임용.

해방되던 날 민영학의 집에 함께 모인 서기홍은 일제 때 판사를 지낸 사람인데, 미 군정이 시작되자 데일리 마산군정사령관의 재판고문을 맡았다.(왕수완, 마산유사 25, 경남신문)

1945년 9월 16일 부산에 들어온 미 군정은 파면당한 일본인 도지사 노부하라를 군정도지사의 보좌역으로 임명하고, 일제하의 관료와 경찰, 실업가 등을 도청 중요부서의 간부로 임명했다.

10월 24일에는 일제하의 고위관료 출신을 각 지방 군수로 임명하고, 12월에는 23명의 지역유지들을 군정 도지사의 고문으로 임명했는데, 부산의 김동산·김칠성, 마산의 명도석 등 3명을 제외하면 모두 극우인사들이었다.(마크게인, 해방과 미 군정, 까치) 특히 진주출신 정상진은 정미소와 약주양조장, 제재소와 엄청난 농지를 가진 3천석 지주로 일제말기에 항공기를 헌납해 일제로부터 공로자 대우를 받은 친일파였다.(장상환, 해방직후 진주지역의 정치변동, 경남사학)

한민회 위원장 민영학이 마산 군정사령관 데일리의 고문을 맡고, 문화부장 이일래가 미군 특무대(CIC)의 통역을 맡았다는 사실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1946년 12월에 개원한 미 군정 과도입법의원도 부위원장 손문기가 맡게 된다. 역시 한민회 총무부장이었던 조병기는 국민회와 자유당에서도 계속 총무부장을 맡게되는 등 17년동안 '마산 우익운동의 중추적 인물'(박계진, 합포의 야화)로 활약하게 된다.

한민회와 국민회에서 각각 조직부장과 선전부장을 했던 류석형과 최철용은 이후 광복청년단·서북청년단·독립촉성 청년단 등을 개편 대한청년단을 만들었다. 단장은 류석형이 맡았고, 부단장에 조철제·노병덕, 총무 김유진, 조직 서석진, 선전 손기현, 감찰 서점용, 조사 및 훈련 박기수 등이었다.

이처럼 일제에 빌붙어 사리사욕을 취하던 사람들은 해방 후 모두 친미·반공주의자가 됐고, 이 대열에 서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좌익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월북 또는 초야에 뭍혀 버렸던 것이다. 물론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변절해 극우로 돌아선 사람들도 없지 않다.

이로 보아 한국의 친미 우익세력은 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직이라기 보다, 기회주의 세력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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