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짜증나는 수능 ‘난이도’ 보도

김훤주 2008. 11. 14.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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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수능 치른 뒤 며칠 동안은, 다름 아닌 ‘짜증의 계절’입니다. 제가 글쟁이가 아니었다면 이런 짜증의 계절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제 아들도 이번에 수능을 치렀지만, 수능을 치르고 나면 신문 방송에서는 꼭 ‘난이도(難易度)’라는 낱말을 줄곧 써댑니다. 쉽고 어려운 정도, 또는 쉽거나 어려운 정도를 뜻합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미디어들은 이 낱말을 거리낌없이 썼습니다. 대충 헤아려 봤는데, 이런 정도 매체들도 ‘난이도’라는 표현을 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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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또는 ‘이’ 때문에 울고 웃는 수험생들. 경남도민일보 사진.

‘난(難)’과 ‘이(易)’는, 그 정도를 한 데 묶어 나타낼 수 있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정도(難度)가 높으면 쉬운 정도(易度)가 낮고, 어려운 정도가 낮으면 쉬운 정도가 높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난도가 높으면서 동시에 이도까지 높을 수는 없습니다.  ‘난’과 ‘이’는 이처럼 반비례하기 때문에 함께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릇되게 한 데 묶어 씁니다. “난이도가 높다.” “난이도가 높아졌다.”

만약 이렇게 그릇되게 쓰는 이들이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것을 탓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그이들더러 그렇게 쓰도록 만드는 환경을 나무라야겠지요.

제가 미디어들의 보도를 보고 짜증을 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보도를 보고 읽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틀리지 않고 옳게 쓰도록 할 의무가 없다고 할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일부 매체는 ‘난도’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해당 매체 모든 기자들이 그리 하지는 않는 것 같고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기자나 부서만 그리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난도라는 표현도 사실은 필요 없습니다. 만약 산출 공식에 따라 소수점 아래까지 따져야 하는 그런 논문이라면 모르지만, 대중 매체는 그냥 그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쉬운 표현 있지 않습니까? 어려운 정도가 더해졌다, 아니면 어려운 정도가 줄었다, 이렇게. 또는 좀 더 어려워졌다, 좀 더 쉬워졌다, 이렇게.

아, 이러고 보니 짜증나는 낱말이 하나 더 떠오르는군요. 바로 ‘출사표(出師表)를 던진다.’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삼국지 제갈공명이 후주 유선에게 올렸던 출사표가 이름나 있지요.

사진 아래에는 ‘제리 로이스터(오른쪽) 감독이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는 설명이 달려 있었습니다.

사전을 보면 출사는 ‘군사를 내어 나감’이라 돼 있고, 출사표는 ‘장수가 출사를 하는 취지를 적어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라 적혀 있습니다. 윗사람에게 드리는 글이지요.

그런데도 신문 방송은 걸핏하면 “출사표를 던졌다.”고 표현합니다. 정말 터무니없습니다. 임금에게 “엤다, 한 번 읽어봐라.”, 이렇게 던져 주는 신하가 어디 있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정확하게 하자면 “출사표를 올렸다.”거나 “출사표를 바쳤다.”고 해야 하고, 최소한 “출사표를 내었다.”고는 해야 시건방지다거나 무식하다는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꼭 ‘던진다.’는 표현을 쓰고 싶거든, ‘출사표’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 됩니다. 대신 쓸 수 있는 낱말도 있거든요. 바로 ‘도전장’입니다. “선배 김주완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하하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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