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초순 제가 몸담고 있는 언론노조가 단체협약을 두고 사용자 집단과 교섭을 벌이다가 조정신청을 하는 바람에 경남지방노동위원회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 가서 무슨 책자를 뒤적이다가 조정위원 명단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아니, 조그맣지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노조 쪽 조정위원 가운데 눈에 익은 이름을 봤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민주노총이 아닌 한국노총에서 추천을 했습니다. “어째 이 사람이 아직도…….”
그 사람 이름을 보고 제가 그렇게 놀란 까닭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3년 전인 95년 5월에도 노조 위원장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창원공단 중소 규모 노조였는데, 그 공장은 임금도 아주 적고 작업환경도 너무 나빠 사흘 들이로 그만두는 사람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었습니다.(지금도 그런지는 확인 못했지만)
한국노총 상징
그 때도 그 사람은 이미 세 번째 노조 위원장을 하고 있었는데, 저하고 얼굴을 익힌 것도 그 사업장 나쁜 작업 조건 때문이었습니다.저는 그 때 어떤 자리에서 그 사람이 노조 위원장으로 있던 사업장이 시끄러운 소리랑 페인트 가루를 많이 내어 노동자뿐 아니라 이웃 주민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치니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고 자리도 마치고 나서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이었습니다. 와서는 “왜 남의 공장을 두고 이야기하느냐?”고, 제게 따졌습니다. 위협하는 투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속으로 ‘참 이상하네, 오히려 노조 위원장이 사용자에게 남 먼저 제기했어야 할 문제일 뿐인데.’ 여겼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지노위 다녀 온 뒤 창원공단 다른 노조 간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물었지요. “아무개 알아요? 95년에 이미 세 번째 위원장 하던 사람인데 지금도 같은 위원장이던데…….”
“아 알지요! 어쩌다 한 번씩 만나기도 해요. 그래 ‘나는 어용이라 민주노조 하는 사람들 부럽다.’, 이렇게까지 말한 적도 있어요.” 했습니다. 이어 “이제 다른 할 게 없지.” 덧붙였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20년 노조 위원장만 했으니 생산 현장에 돌아가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습니까? 짐작건대 회사 총무부 업무를 대행하는 위원장일 테니 목에 힘도 많이 들어가 있을 테고요.
그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20년 동안 노조 위원장만 했을까요? 조합원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했을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을 먼저 위한다는 생각으로 했을까요?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리 하고 말았을까요? 또는, 회사(=사용자)의 편리한 노무 관리 도구가 돼 주고 그것이 노조 위원장 할 일이다, 여기고 했을까요?
그러다가 몇 가지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그 사람이 하고 싶어서 20년 동안 위원장을 했을까, 아니면 다른 할 사람이 없어서 등 떼밀려 했을까?
그리고, 그 사람이 저토록 오래 위원장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사람에 맞설만한 다른 인물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회사가 밀어주고 지켜주고 했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그 사람을 20년 동안이나 위원장으로 두고 있는 그 공장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곧 이어서, 그 공장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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