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드문 고산습지 사자평
사람들은 습지라 하면 버드나무 가지가 하늘하늘 늘어진 늪이나 저수지를 먼저 떠올린다. 아니면 넓게 펼쳐지는 바닷가 갯벌을 생각하거나다. 널리 알려진 주남저수지나 우포늪, 순천만이 그렇다. 좀 더하면 논이나 둠벙, 강도 습지에 포함된다.
습지는 평지가 아닌 산꼭대기에도 있다. 밀양 재약산 정상 수미봉 동남쪽 비탈 해발 700~800m에 너르게 탁 트인 사자평이 대표적이다. 대략 58만㎡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산지습지로, 2006년과 2018년에 각각 습지보호지역과 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됐다.
살고 있는 생명체도 다양하다. 삵·담비·하늘다람쥐와 은줄팔랑나비·꼬마잠자리·비단벌레 같은 희귀 야생 동물과 곤충들은 물론 물매화·용담·삿갓사초·미나리아재비·꿩의다리·쥐오줌풀·실패랭이·송이풀·소리쟁이·짚신풀 등 다른 데서는 보기 어려운 야생화도 적지 않다.
사자평을 대표하는 습지식물로는 물억새가 으뜸이다. 수미봉이 올려다보이는 기슭에서 건너편까지 넓게 무리 지어 넘실거리는 가을 억새는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 모든 것이 깊은 산중답지 않게 가운데 언제나 믈을 머금고 있기에 가능한 풍경이다.
억새 다음으로 꼽히는 습지식물은 진퍼리새다. 줄기는 우묵하게 무리 지어 자라고 뿌리는 수염처럼 풍성하게 뻗어나 땅속으로 들어간다. 억새밭과 나무숲 땅바닥에서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움켜쥔 채 물을 머금어 축축한 상태가 지속되도록 해 준다. 그러니까 진퍼리새는 사자평이 습지생태를 유지하는 데 일등공신인 셈이다.
바람에 물결치는 물억새를 배경으로 드문드문 자리잡은 버드나무는 한껏 운치를 만들어낸다. 저습지에 많은 버드나무가 이처럼 깊은 산중에 있는 것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일이다. 버드나무와 더불어 드물지 않게 보이는 오리나무도 물기를 좋아하는 습지지표식물 가운데 하나다.
재약산과 사자평을 찾는 사람들은 사자평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의 근원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그저 멋진 풍경을 누리면 그만이다. 억새도 관리하는 곳이 습지보호지역이면 낙동강유역환경청이고 그밖에 지역은 밀양시청으로 제각각인 것도 마찬가지다. 두 구간 사이로 난 탐방로를 걸으며 자연이 건네주는 풍성한 즐길거리를 마음껏 누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깊고 굵게 파였던 사자평
2000년대 접어들면서 사자평 습지는 한바탕 지각변동을 겪게 된다. 2002년 태풍 루사와 2003년 태풍 매미에 이어 2006년 태풍 에위니아가 뿌린 집중호우가 결정타였다. 전체 길이가 4km 정도 되는 구간에서 너비 15~30m, 깊이 5~10m 규모로 바위와 토사가 파여나갔다. 지금으로 치면 억새밭을 가로지르는 탐방로 아래 지하에 해당된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만들어진 군사작전도로를 용도가 다한 뒤에도 그대로 내버려둔 탓이었다. 그 탓에 2000년대 초반까지 민간인들이 지프를 끌고 와서 누비고 다니면서 ‘오프로드’를 즐길 수 있었다. 그 바람에 도로에는 풀이나 나무가 자라지 못했으며 빗물이 스며들면서 물러지기 시작했다. 그 위로 비가 퍼부었으니 허물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렇게 가운데가 뭉텅 빠져나간 뒤에는 산마루에서 흘러들던 빗물이 머물지 못하고 산아래로 바로 빠져나갔다. 빗물이 그대로 흘러나가면 습지는 당연히 메마르게 마련이다.
2008년에 복구를 할 때 빗물이 습지에 스며들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골짜기처럼 파여 나간 부분을 메우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바닥을 직선화하고 위에 바위를 까는, 사방(砂防)사업 차원에서 접근한 엉터리였다. 물이 빠르게 빠져나가도록 하는 데만 열을 올린 결과 습지는 더욱 메말라갔다.
그러나 다행으로 그 뒤 바로잡는 과정을 거쳤다. 2012년 연구 용역을 거쳐 2015년까지 생태복원사업을 벌였다. 깊숙하게 파인 데를 메우고 그 위에 억새를 심는 등 제대로 된 작업이었다. 덕분에 지하수위는 높아졌고 물기를 좋아하는 습지지표식물도 꽤 늘어났다. 그러고 보면 자연을 훼손하는 것도 복구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몫인 셈이다.
동그마니 정겨운 고사리분교
지금은 흔적만 남았지만 사자평에 사람이 살았던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화전민 마을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지는 않았고 대신 부쳐 먹는 논밭이나 키우는 가축, 숯 따위를 굽는 가마터 등을 중심으로 드문드문 흩어져 살았다.
들머리에 있는 고사리분교(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터를 보면서 요즘 사람들은 ‘깊은 산중에 학교가 있었다니!’ 하면서 신기하게 여기기 십상이다. 처음에는 화전민이 살던 흙집을 쓰다가 나중에 콘크리트 교실을 새로 지었는데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교적비만 남았다.
1997년 세운 빗돌에는 ‘1966년 1월 29일 개교하여 졸업생 36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폐교되었음’이라 적혀 있다. 31년 동안 졸업생이 36명이라면 해마다 평균 1명 남짓 졸업한 셈이 된다.
학교가 문을 연 1966년은 간월산·신불산·영축산·운문산 등 주변 산악지대에 흩어져 살던 화전민을 사자평으로 끌어모으던 시절이다. 정부로서는 한데 모아야 관리하기 편했을 테고 그런 자리로는 물이 넉넉한 사자평이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면서 마련하게 된 이 조그만 분교는 그 구심 노릇을 단단히 했을 것이다.
운동장 자리는 맨땅이 드러나 있고 교실 자리는 억새가 우거져 있는데 둘 다 손바닥만 하다. 교실은 축대 위에 있고 운동장은 아래에 있다. 운동장 왼쪽으로 단풍나무가 두 그루 둥글게 어우러져 있고 아래에는 편히 앉을 수 있도록 넓적바위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전교생이 모여 야외수업을 하고도 남았을 공간이다.
화전민들은 농사도 지었지만 키우던 가축을 잡아 등산객들에게 고기를 팔기도 했다. 그런 일상은 1990년대까지만 이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자평의 소유주가 표충사였기 때문이다. ‘살생’을 금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97년 마지막 화전민이 보따리를 쌌고 고사리분교는 그 한 해 전에 문을 닫았다.
억새밭의 사람살이 자취
유난스럽게 살펴보지 않더라도 사자평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다. 고사리분교를 지나 탐방로에 들어서면 억새밭이 펼쳐진다. 화전민들이 떠난 뒤 그들이 농사짓던 묵정 논밭에 자란 억새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일구었던 언덕과 두둑도 그대로다
둥글게 돌 울타리가 쳐진 한가운데에 오두마니 서 있는 돌배나무는 저 홀로 멋진 모습이다. 누가 일부러 둘러 주었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원래 가마터였던 자리에 사람들이 떠난 뒤 나무가 뿌리내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계속 걷다 보면 돌이나 흙으로 쌓은 축대도 여럿 만날 수 있다. 조금 높으면 집터 울타리일 것이고 바닥과 비슷하면 묵정 논밭의 두렁일 것이다.
우물도 나타나고 샘도 나타난다. 물이 솟는 자리에서 둥글게 땅을 파내고 주변에 돌을 박아 둘렀는데 둠벙이라 할 만하다. 이런 데가 열두 군데가 있다고 한다. 이 덕분에 사자평이 습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사자평에 화전민이 터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표충사의 약수와 사자평
사자평에서 한껏 누린 감흥은 표충사에 이르는 길 위에서도 이어진다. 흥룡폭포와 층층폭포의 색다른 절경은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고, 골짜기를 따라 이어지는 개울물 소리며 건너면 산비탈 수풀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풍경은 마음을 사로잡는다.
길 끝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에는 유명한 약수가 있다. 약수터에는 영정(靈井) 두 글자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영정은 신령스러운 우물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표충사가 있는 자리에 원래는 영정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흔적이기도 하다.
약수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통일신라 흥덕왕 시절, 한센병을 앓던 셋째아들이 여기에 와서 약수를 마시고 몸을 씻었더니 깨끗하게 나았다. 그래서 당시 절의 이름이 죽림정사였는데 이를 임금이 영정사로 바꿔 주었다고 한다. 표충사가 물을 넉넉하게 품은 사자평 습지를 머리에 이고 있기에 이처럼 신령스러운 우물이 생기지 않았을까. 이 글을 보면서 물맛이 어떤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표충사와 사명대사
표충사는 사명대사를 모시는 절간으로 유명하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팔도도총섭으로 활약하면서 승병을 이끌었다. 전란이 끝난 뒤에는 일본에 가서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 사람을 3000명 넘게 구출해 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사명대사의 고향인 밀양에 표충사를 짓고 사명대사를 모시도록 했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다. 그래서 사명대사를 모시는 것도 불교식이 아닌 유교식으로 하게 했다. 덕분에 표충사는 유교를 품은 절간이라는 특징을 갖게 됐다. 사명대사를 유교식으로 모시기 위하여 지은 표충서원과 표충사(祠=사당)가 표충사 한켠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문격인 수충루도 관아의 출입문처럼 2층 누각 모양을 하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이런 사연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냥 절간과 어울리지 않는 낯선 건물로만 여겨질 수도 있겠다.
표충사의 가장 큰 미덕은 간결함이다. 요즘 대부분 절간은 경내에 빼곡하게 들어선 전각들로 눈과 마음이 어지럽다. 가장 많이 비워내야 할 절이 채우는 데 급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재약산을 배경으로 여백의 아름다움과 여유로움이 그대로 느껴지는 표충사는 그래서 더 빛이 난다.
우화루 그리고 솔숲
표충사에 들르게 되면 한 번쯤 눈길을 주어도 좋은 곳이 사천왕문이다. 사천왕이 밟고 선 악귀가 여자다. 불법을 수호한다는 천왕이 여자를 밟고 서 있는 절간은 우리나라에 매우 드물다. 인간은 원래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미혹’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원죄를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들여다보면서 저마다 자유롭게 해석을 해 보아도 재미있을 듯하다.
표충사의 또 하나 명물은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다. 우화(雨花)는 꽃비처럼 쏟아지는 부처님 말씀을 뜻한다. 나름 역사를 자랑하는 절간이라면 다들 멋진 누각을 하나씩 갖추고 있지만 우화루만큼 마음이 편안해지는 공간은 흔치 않다. 두 다리를 펴고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으면 앞쪽 대광전에서 나오는 우렁우렁 스님 불경 소리가 뒤편 개울물 소리와 어우러진다.
표충사의 백미는 잘 갈무리된 솔숲 길이다. 세상에 매임 없이 쑥쑥 자란 소나무들이 내뿜는 기운은 청청하다. 사람도 이처럼 곧고 맑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걷는 데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는 너무 길지 않아 좋고,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움을 남겨둘 수 있어 좋다. 이처럼 오솔길로 해서 솔숲을 거닐어도 괜찮지만 아스팔트도로를 따라 걸어도 좋다. 아름드리 참나무들이 줄줄이 서서 마지막까지 동행해주기 때문이다. 어느 쪽을 골라잡든 마음이 가는 데로 걸으면 그만인 것이다.
※2020년 연말에 경남생태관광협회 요청으로 밀양 재약산과 사자평습지를 알리기 위해 쓴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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