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5. 백성 피땀 담긴 저수지, 생명을 일군다

김훤주 2019. 2. 1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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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과 오늘날의 인공습지

하천·샘에 기대지 않고

저수지 만들어 물 사용

‘3대 저수지밀양 수산제

원삼국시대 축조로 추정

진주 강주연못은 군사용

고성 대가저수지 수호탑

공사서 숨진 이들 넋 위로


밀양 수산제 돌수문

예나 이제나 농사를 짓는 데 물은 필수다. 밭농사에도 있어야 하지만 논농사에는 더욱더 필요하다. 하천이나 우물 또는 샘에만 기대어서는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인공으로 저수지를 만들어야 했던 까닭이다

그 첫머리에 밀양 수산제가 놓인다. 벽골제(전북 김제의림지(충북 제천)와 더불어 2000년 전에 만든 3대 저수지로 역사책에 이름이 올라 있다.

조선시대 지리책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이미 나온다.

둘레가 20리이다. 세상에 고려 김방경 장군이 농지에 물을 댈 수 있도록 제방을 쌓아 일본 정벌(11274, 21281)에 나서는 고려·몽골연합군의 군량을 갖추었다고 전한다

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마름··마름·귀리가 멀리까지 가득하다

세조 때인 1467년 물길을 트고 수문을 설치하여 국둔전(國屯田)으로 하였다가 뒤에 봉선사(奉先寺:경기도 남양주시)에 내려주었다. 성종 때인 1487년 다시 나라의 둔전이 되었다.”

둔전은 백성들한테 농사를 위하여 개간하게 한 다음 소출 가운데 일부를 바치도록 했던 토지로 국농소(國農所)라고도 했다. 이보다 앞선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길이가 728보인데, 지금은 무너져 있으나 쌓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수산제의 원형은 배후습지였다. 그 범위는 초동면 금포리~하남읍 수산리 일대로 짐작된다. 주변 산지뿐만 아니라 낙동강변 자연제방보다 지대가 낮다

밀양 수산제 수문. 자연암석을 맞뚫어 만들었다.

이처럼 낮은 데는 바닥에서도 물이 솟는다. 게다가 비가 내리면 산기슭에서도 물이 쏟아지고 낙동강에서도 본류가 역류해 들기 십상이다. 한두 해만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도 토사가 쌓이고 물길이 막혀서 금세 황폐해진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돌봄을 받지 못해 국농소는 휴한지가 되었고 수산제는 황무지가 되었다

19세기 말 함안군수로 와 있던 오횡묵이라는 사람이 <함안총쇄록>을 썼는데 188971일자에 수산을 지나간 기록이 있다.

수산에 있는 국농소는 본래 민보였는데, 오늘날은 명례궁(조선시대 왕비가 거처하던 공간)에 소속되어 있다

…… 온 김에 둘러보았더니 과연 10리 긴 보를 온전히 쌓았고 둑 안에는 농사를 짓는데 거의 300섬지기가 된다

바라보면 툭 트여 있고 아직 개간하지 않은 땅이 개간한 땅보다 몇 배나 넓다. ……수십 년이래 권세가에게 붙잡혀 있다

지세가 푹 꺼진 곳은 큰물을 만나면 안에서 물이 넘치고 밖에서는 강물이 불어 수문이 망가지고 당장 물바다가 된다. 그래서 비용을 많이 들였지만 아직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비록 두서가 조금 잡혀 시작만 잘 하고 마무리를 하지 않은 지난날과는 다르지만, 홍수를 만나면 역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개간하지 않은 땅이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소출이 300섬이라 했다. 300섬이라면 어느 정도일까? 많은 듯 여겨지지만 임진왜란 이전과 견주면 5~10%밖에 되지 않는다. <성종실록> 1489921일자 기사에 들어 있는 경상도관찰사 김여석의 보고다.

수산제는 …… 1487년은 소출이 7500여 석이었고 1488년은 4400여 석이었는데 올해는 지나친 가을비로 거의 물에 잠겼으므로 반드시 지난해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400년 세월이면 분명 농업 기술이 작으나마 발전했을 텐데도 소출은 오히려 이만큼이나 크게 줄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수산제와 국농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배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전에는 왕실(명례궁) 소유였다가 후에는 친일 귀족의 소유가 되었다

1913년에 조선총독부가 도야마 미츠루(頭山滿)라는 일본 사람에게 일대 개간권을 주었다. 도야마는 이를 받자마자 민병석(閔丙奭) 등 조선인 지주들에게 권리금을 받고 팔아넘겼다

민병석 등은 곧바로 개간에 들어가 1927년까지 270정보(町步)=81만평에 이르는 농지를 확보하였다. 1927년에는 이들이 소작을 짓고 있던 농민들에게서 소작권을 떼어 다른 농민들에게 주는 바람에 국농소 소작쟁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도야마 미츠루와 민병석은 어떤 사람일까? 도야마(1855~1944)는 일본 우익단체의 원조인 겐요샤(玄洋社)를 세운 인물이다. ‘일본의 지도 아래 아시아가 대동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우 국수주의자였다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 직후 그 논공행상으로 조선의 광활한 휴한지와 황무지에 대한 개간권을 받은 셈이다

그 뒤로도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조선인 학살을 주도하고 1940년대에는 일본군의 전쟁터로 위안부를 공출하는 데 나서기도 했다.

민병석(1858~1940)1910년 경술국치를 앞두고 궁내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경찰권을 비롯한 국가주권을 일본에 넘기는 어전회의에 참석해 이를 가결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 사람들한테는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국적(國賊)으로 지탄받았으나 일제로부터는 자작 귀족 작위를 받는 대접을 누렸다. 고종의 정비 민비의 친척 출신으로 왕조 시기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에도 갖은 부귀영화를 누렸던 인물이다.

그나저나 수산제 둘레에는 독뫼가 서넛 있다. 수산제 제방은 이런 독뫼를 잇는 방식으로 쌓아졌다. ()에 붙여서() 쌓는 제방(), 산부제다. 일제강점기 1km 남짓 제방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다

대신 자연 암반을 뚫어서 만든 수문은 남아 있다. 너비와 높이가 각각 1m1.5m 정도이고 길이는 25m가량 된다. 2000년 전 뚫은 것일 수도 있지만 조선 세조 때 뚫은 것일 개연성이 더 높은 것 같다

어느 시절이 되었든 부림을 받는 밑바닥 백성들은 엄청나게 고생을 했을 것이다. 수문 위에 가서 서면 양쪽으로 물줄기가 흐르면서 습지 경관이 한 눈에 담긴다.

진주 강주연못.

진주 강주연못

다음 자리는 강주연못 차지다. 진주시 정촌면 강주연못은 <진양지>에 처음 나온다. 조선시대 진주 읍지(邑誌)<진양지>는 성여신이 1622~32년 지었다

읍지는 대부분 고을 수령이 만들었는데 당시 성여신은 진주목사도 아니고 그냥 진주에 사는 선비였다. 단지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진양지>를 남긴 것이다

성여신은 여기서 강주연못(康州池)’을 다루며 그 위에 군영터가 있다. ‘고려 때 절도사가 이곳에 와서 진을 쳤다고 세상에 전해온다.”고 적었다.

여기에 진을 쳤던 절도사는 누구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주조()에 하륜이 지은 촉석성문기가 인용되어 있다.

“1379년에 배극렴이 강주진에 장수로 와 있으면서 목사에게 공문을 보내 촉석성=진주성을 다시 수축하게 하고 감독하였다. 흙을 돌로 바꾸어 쌓게 하였으나 절반도 되기 전에 해구=왜구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해구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1379년 진주로 쳐들어온 왜구 3000명을 물리쳤던 배극렴(1325~92)은 이태 전인 1377년에는 마산 합포에 병영성을 쌓기도 했었다.

강주연못 서쪽에는 직선거리로 100m 옆에 개울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화개천이다. 아마 강주연못의 원형은 화개천변에 형성된 자연제방과 동쪽 야산 사이에 끼여 있는 배후습지였을 것 같다. 장병들 먹이려고 곡식을 기르던 둔전에다 여기에 고여 있던 물을 대었을 것이다

제방에 오르면 짙은 나무그늘 아래 까만 빗돌이 하나 있다. 고려 시대 강주진영이 있던 자리라고 알리는 것인데 19941231일 진양군청에서 세웠다. 진주시와 진양군의 통합(199511)을 하루 앞두고 이루어진, 진양군청의 마지막 행정 행위였다

강주연못은 동그랗고 자그맣다. 수면은 연잎으로 덮였고 둘레는 600년 된 이팝나무군락을 비롯해 오래된 나무들이 우거졌다. 강주는 진주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고성 장산숲.

고성 회화면 장산숲 연못도 강주연못과 비슷한 구실을 했다. 장산숲은 600년 전 호은 허기라는 인물이 조성했다. 고려에서 벼슬이 높았던 허기는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그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고 여기 들어왔다

지금은 바다가 십리 바깥에 있지만 당시에는 해수면이 높아 마을 앞이 바로 바다였다. 바다가 마을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고 해풍을 막기 위하여 숲을 조성하면서 그 가운데에 연못을 만들었다

숲은 원래 1km 길이로 마을을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알파벳 ‘L’자 모양으로 통째 감쌌지만 지금은 동남쪽 100m만 남았다

쉼터로 제격이라 평상도 여럿 있다. 나무 말고 돌로 만든 평상도 있다. 일대가 퇴적지층이라 편평하게 떼어내기 쉬운 무른 암석이 많기 때문이겠다.

장산숲에 놓여 있는 돌평상.

일제가 만든 저수지들

수산제는 옛날 저수지 치고는 예외적으로 큰 편이다. 예전에는 이처럼 크게 제방을 쌓기가 어려웠다. 동원을 할 수 있는 에너지와 도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조선시대까지는 제방보다는 천방(川防)이 기본이었다. 물을 얻기 위하여 하천()을 가로막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천은 낙동강이나 남강처럼 큰 강이 아니다. 이렇게 큰 강은 보()를 쌓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런 큰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지천만 보를 쌓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커다란 저수지들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근대적 토목기술을 들여와 쌓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왜 그랬을까? 조선 농민을 위하여? 당연히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쌀이 모자랐다. 일제는 조선에서 쌀을 많이 생산해 일본으로 가져가야 했다. 그러려면 벼논 면적을 늘리는 한편으로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필요가 있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마자 남부 곳곳에 저수지를 본격 짓기 시작한 까닭이다

저수지를 만들면 빗물에 기대야 하는 천수답은 줄고 수리안전답이 늘게 된다. 게다가 저수지 아래 저습지를 개간하면 경지 면적 자체도 늘릴 수 있다. 마당 쓸고 돈 줍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다.

사천 두량저수지.

일제가 만든 저수지로 유명한 것은 진주와 사천에 걸쳐 있는 두량저수지가 먼저 꼽힌다. 배수문 옆 대숲을 뒤지면 남주제 준공 기념비가 나온다. 옆면에 기공 소화(昭和) 6818’, ‘준공 소화 7520’, ‘공사감독대행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라 적혀 있다

소화 6년과 7년은 1931년과 32년이다. 고작 아홉 달 만에 완공까지 마치고 이름을 남주제(南洲堤)라 한 것이다. 넓이 51ha에 담기는 물은 1567000이다

저수지 언덕에는 두량숲이 들어앉아 있어 한 나절 놀이터로 딱 알맞다.

두량저수지 남주제 준공 기념비. 앞면을 뺀 나머지 3면에는 사업 개요와 직원 평의원 등이 적혀 있다.

고성 대가저수지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여기도 배수문 가까운 제방에 기념비가 있다. ‘수택천추(水澤千秋)’라고 앞에 새겨져 있다. 물이 주는 혜택이 1000년을 간다는 말이겠다원래는 준공기념비라 새긴 빗돌이 이 위에 놓여 있었을 것 같은데 해방이 되면서 조선 사람들이 없앴으리라

아래 본문 끝에는 □□□ 6531이라 세로로 적혀 있다. 위쪽 세 글자를 정으로 쪼아낸 것이다. 희미한 흔적을 헤아려보니 소화라 여겨진다. 소화 6(1931)이면 두량저수지 준공 1년 전이다

대가저수지는 두량저수지보다 크다. 넓이가 92ha, 담기는 물은 4902000이다.

고성 대가저수지 연꽃테마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대가저수지에는 수호탑도 있다. 배수문 건너편 산기슭 자리다. 4각 기단을 쌓고 단층을 올린 다음 6각 지붕을 얹었다. 일본 신사(神社)에 흔한 양식인데 작은 불상이 안에 있다. 당시 공사에서 숨진 이들의 넋을 위로했던 시설이다

얼마나 험난했으면 이렇게 죽은 사람을 위한 시설까지 만들어야 했을까. 이렇게 저수지를 쌓느라 피땀을 흘렸지만 조선 농민들 살림은 풍요로워지지 못했다. 저수지 만드느라 고생하고 소작 짓느라 또 고생했다. 한국농어촌공사는 지금도 위령제를 지낸다.

고성 대가저수지 수호탑. 수리조합의 후신인 농어촌공사가 지금도 여기서 위령제를 지낸다.

두량·대가저수지는 관에서 설치했다. 조선총독부가 자금 융자를 알선하고 해당 지역 수리조합이 발주하여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에 측량·설계·공사·감독을 모두 맡겼다. 관에서 맡아 했으니 관설(官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밖에 개인이 만든 사설(私設) 저수지도 있다. 사천시 용현면 신촌리 서택(西澤)저수지다. 사연을 모르면 서택을 서쪽 연못이라는 뜻으로 잘못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실은 일본 성씨 니시자와(にしざわ)의 한자를 조선식으로 읽은 것이다

고성 대가저수지 준공기념비.

고성 대가저수지 준공기념비 뒷면. 당시 고성수리조합 관계자들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대부분 지워졌다.고성 대가저수지 준공기념비 앞면. 저수지를 만든 내력이 한자로 적혀 있다.

서택저수지는 1935~4511년 동안 공사했다. 관설과 달리 강제력을 갖지 못하다 보니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나 장비가 적어서 시일이 오래 걸렸을 것이다. 반면 저수지의 넓이(7ha)와 담기는 물(235000)은 관설보다 훨씬 작다

일본사람 니시자와는 저수지 착공과 함께 종포~송지 1km에 방조제를 쌓고 안쪽 갯벌 73ha를 논으로 개간하기 시작하였다.(니시자와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이번에 알아내지 못했다.) 식민지 백성들의 피땀은 여기 서택 들녘에도 어려 있다.

요즘은 수질 정화용이 대세

진주 금호아파트 앞 남강 풍경.

습지는 요즘 들어 수질 오염이 심해지면서 이를 정화하는 쓰임새가 새롭게 관심을 끌게 되었다. 진주시 주약동 금호아파트 바로 앞 칠암배수문을 통하여 물줄기가 흘러드는 둘레에 습지식물이 자라게 해 놓은 데가 있다

진주시청에서 만든 생태습지로 수질 정화가 목적이다. 강변에는 생활체육시설도 여럿 있고 자전거길도 있다. 여기서 남강을 보면 한가운데에 땅이 솟아 있고 거기에는 수풀이 자라고 있다. 그런 사이로 물길이 흘러가는데 이를 통해서도 수질이 정화가 된다

이런 덕분에 진주 남강 수질이 예전보다 좋아졌다는 얘기를 듣는다. 20년 전에는 남강 본류에서는 재첩을 잡는 풍경을 볼 수 없었지만 이런 덕분에 10년 전부터는 볼 수 있도록 마뀌었다.

에코파크가 조성되어 있는 남해폐기물종합처리시설이 갯벌 너머에 보인다.

남해군청은 2002년 남해읍 남변리에 환경기초시설을 들이면서 생태물길과 연못을 함께 만들었다. ‘에코파크라 하는데 하수종말처리장·농어촌폐기물종합처리장·음식물쓰레기공공처리시설 등의 침출수 정화가 주어진 역할이다

아이들 생태학습장으로도 활용되는 에코파크는 매립하다가 그만둔 갯벌과 이어진다. 갈대를 비롯한 여러 물풀이 자라는 이 갯벌을 거쳐서 제방 너머 바다로 나가는 침출수가 하루 120t에 이른다. 바로 옆 매립이 중단된 채로 남은 갯벌을 마저 매립하는 대신 갯벌을 보호하는 시대 흐름에 맞추어 그대로 방치함으로써 수질 정화 효과를 얻는 셈이다

김훤주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는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년 11월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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