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4. 논, 노동과 추억이 공존하는 생명터

김훤주 2019. 2. 1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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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픈 노동의 산물

인간 역사에서 농경은 채집과 수렵에 뒤이어 등장했다. 이 가운데 가장 쉬운 것이 채집이고 가장 어려운 것은 농경이다. 쉬운 쪽에서 어려운 쪽으로 진화해 온 셈이다

같은 농경에서도 먼저 시작된 밭농사보다 뒤에 시작된 논농사가 더 어렵다. 무엇보다 먼저 논농사는 논을 만들기가 무척 어렵다. 밭은 높낮이가 차이 져도 대충 표면을 고르고 이랑만 타면 된다

물을 담아야 하는 논은 높은 데는 깎아내리고 낮은 데는 높여야 한다. 물을 담아야 하기에 수평을 맞추는 것이다. 물을 확보하기 위해 저수지나 보·둠벙도 따로 만들어야 했다

이것들이 논으로 이어지도록 봇도랑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든 뒤에도 돌·자갈은 쉼 없이 골라낼 수밖에 없다

가을철 나락이 익어가고 있는 김해 봉하들녘.

평지에 논을 만들어도 이런데 비탈진 데에 논을 만들려면 얼마나 더 고되었을까. 비탈이 가파를수록 만들 수 있는 논배미는 좁아진다. 반면 차곡차곡 쌓아 받쳐야 하는 논두렁은 높아지고 치워야 할 바위와 자갈은 많아지게 마련이다

아울러 농사짓기도 가장 어려운 것이 논농사다. 밭농사는 이를테면 씨앗을 뿌려놓기만 하면 기본은 된다. 하지만 논농사는 볍씨 고르기에서 모내기를 거쳐 김매기까지 고된 노동이 줄기차게 이어진다.

201737일 합천 대병면 허굴산 중턱에서 노부부를 만났다. 다락진 삿갓배미에 거름을 넣고 있었다. 논들은 저마다 좁다랗고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커다란 바위도 많아서 그 중에는 집채만 한 크기도 있었다. 다섯 마지기도 안 될 논배미를 내려다보며 할매는 말했다.

“10년 전만 해도 논배미가 칠십 개였지. 이 양반 공직 생활 그만두고 포클레인 갖고 일곱 배미로 만들었어. 흩어진 바위를 한 데 모으고 논두렁을 크게 새로 탔지. 하이고, 고생고생 말도 못한다.”

다락논이 더욱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바위를 쌓아올려 만든 논두렁은 수직에 가깝다. 없는 살림에 땅을 한 뼘이라도 더 챙기기 위해서다. 삿갓배미 다락논을 보며 우와, 경치 좋네!” 감탄만 한다면 그이는 정작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다.

논 한가운데 있는 돌무더기. 논을 만들거나 고르면서 나온 돌들을 쌓아놓은 것이다.

100년 전 낙동강 하류 일대는

경남에서 논농사는 늦어도 3000년 전에 시작되었다. 밀양시 산외면 금천리 일대가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밀양강과 단장천이 합류하는 지점과 가깝다. 강물과 함께 떠내려온 흙과 모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여기에 충적지를 이루었다

청동기시대 초기 마을 집터와 보(봇도랑·논 같은 농경유적이 확인된 자리다. 집터는 자연제방 높은 자리에 있다. 밭 터는 집 터 바로 밑 다음 높은 지대에, 논 터는 그보다 낮은 지대에, 저수지 구실을 했던 배후습지는 논 터보다 뒤쪽에 있다.

봇도랑은 산비탈 끄트머리 부분을 따라 길게 나 있었다. 산기슭 아래쪽 언저리는 집터로도 논·밭으로도 적당하지 않았기에 이처럼 물길을 내었을 것이다. 논은 물론 보와 봇도랑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추었던 것이다

···봇도랑의 이 같은 배치는 창원 진동 청동기시대 유적과 진주 대평 청동기시대 논농사 유적에서도 되풀이 확인되었다. 이를 보면 옛날 사람들도 주어진 조건에 맞추어 자연을 개발하기 위하여 치밀하게 계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논은 그 뒤 2000년 넘는 동안 꾸준히 면적을 넓혀왔다. 그러다 획기적으로 넓어진 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부터였다. 일제가 근대토목기술을 들여와 낙동강 같은 거대 하천에까지 제방을 높게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함안·밀양·창녕·창원·김해 일대 낙동강 하류는 그 때만 해도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였다. 비가 조금만 많이 내려도 강물이 범람·역류하는 저습지였다. 일부는 그대로 습지로 남거나 저수지로 탈바꿈하였으나 대부분은 사라지고 대신 너른 평야가 되었다. 지금부터 100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일이다.

합천 허굴산 기슭에 있는 둠벙.

논에 생물이 많은 까닭

일본 간사이대학교 슈사쿠 미나토 선생은 논에 사는 생물이 5668가지라 했다. 2013614일 창녕군 부곡온천에서 열린 2차 논습지 생물다양성 증진을 위한 한·일 자치단체 네트워크에서였다

미나토 선생은 1981년부터 어린이들에게 논과 환경을 교육해 왔고, 2011년부터는 간사이대에 적을 두고 있다. 30년 넘게 논을 드나들며 연구·관찰했더니 그렇게나 많은 생물이 살더라는 얘기였다.

우리나라 논을 두고는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2014~15년 조사한 적이 있다. <논습지 및 덤벙의 생물다양성 조사 결과 보고서>를 보면 식물 173가지, 저서성 무척추동물 64가지, 곤충 141가지, 어류 11가지, 척추동물 14가지 등 403가지였다

이 둘을 같이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일본은 미나토 선생이 30년 넘게 조사했고 한국은 람사르재단이 2년밖에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논은 이처럼 먹을거리 생산도 하고 생물다양성도 실현하는 훌륭한 생태계다.

논은 겨울철에 물을 채워 놓으면 철새들한테 먹이터가 된다

논에 사는 생물이 많은 까닭은 첫째 인간이 적당히 교란하기 때문이라 한다. 생물의 종류는 강한 교란이 있어도 줄어들고 아무 교란이 없어도 줄어든다고 한다. 강한 교란에서는 생존 조건이 파괴되기 때문에 줄어들고 교란이 없으면 생존 경쟁이 심해지기 때문에 준다는 것이다

반면 적당한 교란은 경쟁에 약해 도태되기 쉬운 생물까지 생존할 수 있게 해준다. 풀을 베고 땅을 일구고 논에 물을 대는 것이 중간 정도 교란에 해당된다. 이를테면 논두렁 풀을 지나치게 자주 베면 키 작은 잡초가 우묵해지고 전혀 베지 않으면 키 큰 풀만 웃자란다하지만 적당하게 하면 키 큰 식물이 베어져서 다른 작은 들풀도 함께할 수 있게 되는 이치다

논에 사는 생물이 많은 까닭 다른 하나는 논이 인간의 관리를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논은 사람이 거름을 치는 덕분에 영양분이 풍부하고 덩달아 미생물도 많아진다. 물높이도 일정하고 온도도 차갑지 않게 유지되어 어린 생명이 자라기 알맞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논은, 인간이 이른바 생물다양성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인 셈이다.

논두렁·봇도랑·둠벙

과거에는 자연습지였고 지금은 인공습지인 데가 논이다. 논농사란 계곡이나 개울·하천에서 물을 끌어들여 논 구석구석까지 물을 대거나 빼는 일이기도 하다. 논에 물을 가두어두거나 빼내는 구실을 하는 것이 논두렁과 거기에 나 있는 물꼬다

논두렁은 사람 다니는 길이기도 해서 거기 자라난 풀은 때맞추어 베어지게 마련이다. 이런 풀베기 덕분에 논두렁 풀밭에서 여러 생물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

논에서 사는 생물들에게도 논두렁은 필요하다. 위험에서 피하거나 겨울을 나거나 알을 낳거나 할 때. 논두렁을 거쳐 가까운 야산으로 옮겨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봇도랑은 논을 위한 물길이다. 물은 스며들어야 제 맛이다. 그것은 봇도랑도 예외가 아니다. 스며든 다음 천천히 조금씩 내뿜으면 좋다. 논이 말라도 봇도랑은 촉촉하게 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논에 살던 생물이 논이 메마르거나 겨울이 되었을 때 봇도랑으로 옮겨와 살 수 있다. 원래는 흙으로 도도록하게 쌓고는 물이 새지 않도록 진흙까지 발랐다

김해 봉하마을의 봇도랑. 요즘은 대부분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흙으로 친 봇도랑이 드물어졌다.

지금은 원래 모습을 많이 잃었다. 물이 빠르게 흘러 정확하게 닿도록 하는 콘크리트 봇도랑이 대세다. 흙이 아닌 콘크리트로 친 이런 봇도랑은 생물의 이동을 차단하고 생존을 버겁게 만든다.

둠벙은 논에 물을 대려고 만든 작은 웅덩이다. 바로 딱 붙어 있어서 논의 한 부분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런 둠벙이 지금은 별로 없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둠벙은 지하수가 나거나 지표수가 흘러 물이 고이는 자리를 따라 만들었다

둠벙은 봇도랑과 함께 논이 자연에게 발행해 주는 생물다양성 보증수표였다. 생물들이 논에서 살기 어려운 조건이 되면 손쉽게 옮겨갈 수 있는 데가 둠벙이다

고성 내산리 고분군 가까이에 있는 둠벙.

 

고성 내산리고분군 가까이에 있는 둠벙. 흙이 아닌 돌로 쌓았다는 특징이 있다.

한 곳에 뿌리박고 살아야 하는 식물한테도 둠벙은 논두렁·봇도랑보다 좋은 터전이다. 언제나 물이 고여 있기 때문이다. 둠벙은 이처럼 인간과 습지의 조화로운 관계 그 자체다.

1960년대나 70년대에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논두렁에서 메뚜기 잡고 봇도랑에서 미꾸라지 잡던 추억이 있다.(논바닥에서 논고둥을 캐기도 했다.) 

둠벙은 둘레의 예쁜 물풀이나 들꽃으로도 기억되지만 물고기를 한꺼번에 잡아 끓여먹는 푸짐함과 따뜻함으로 더 많이 기억된다. 여름비로 논물이 넘칠 때 봇도랑 등에서 새끼 물고기를 몰아넣은 다음 가을걷이를 앞두고 하루 날을 잡아 물을 퍼내면 된다

둠벙 바닥은 물 반 고기 반, 붕어·잉어·미꾸라지·메기·뱀장어 따위를 잔뜩 잡아 솥에 집어넣고 끓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요즘은 농촌에 사람이 없는 탓에 이마저 달라지는 모양이다

201736일 창녕 성산면 연당지 부근에서 만난 할매는 자기 논에 달린 둠벙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난 장날에 붕어 하고 메기를 사서 집어넣었어.”

고성 두호마을에서 본 둠벙.

 

논에 어린 정서와 문화

논은 삶을 받쳐주는 바탕이었다. 그래서 거기에는 우리네 인간의 감정도 스며들어 있게 마련이었다. 가을논에 벼가 넘실거리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논이 메말라 벼가 제대로 못 자라면 사람 속도 함께 탄다

시골 사람들에게 논은 희로애락이다. 하지만 도시 사람들에게 논은 고향을 상징한다. 농촌의 풍경을 떠올리며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끼는 것이다

또 머리에 논을 떠올리면 일하는 사람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삽자루 하나 실은 채 자전거 타고 가는 장면, 경운기 끌고 써레질하는 모습, 비 맞으며 물꼬를 돌보는 모습……. 그렇듯 논은 누군가에게는 삶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풍경이 된다.

논은 인간에게만 풍성한 게 아니다. 맑은 봄날 농부가 써레질하는 뒤를 해오라기·백로·왜가리 같은 새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써레질로 단단한 흙덩이가 파헤쳐지고 뒤집어지면 맛나게 먹을 수 있는 벌레들도 함께 올라오기 때문이다

나락이 여물어가는 가을논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에게는 삶의 배경이고 문화이고 역사인 논이 다른 많은 생명체들에게도 든든한 터전이 되어주는 것이다.

합천 허굴산 기슭 삿갓배미 논들 가운데 쌓여 있는 커다란 바위들. 주인 할매는 10년 전만 해도 다락논 곳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바깥양반이 포클레인으로 지금처럼 한 군데로 모았다고 말했다.

논이 사라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보면 20051104811ha에서 2010984140ha를 거쳐 2016895379ha로 면적이 적어졌다. 경남도 마찬가지로 2005113928ha에서 201010104ha를 거쳐 201688753ha로 떨어졌다. 쌀 생산도 20054768368t에서 20104295413t을 거쳐 20164196691t으로 내려앉았다

그런데도 쌀은 남아돈다. 쌀소비 감소폭이 논 감소폭보다 크기 때문이다. 2016년 현재 쌀의 정부 보관 재고가 200t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은 여기에 더해 2017년에도 29t 가량이 초과 공급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2018년에는 쌀값이 폭등했다. 쌀 소비가 줄어들고 있음에도 쌀값이 크게 오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쌀의 생산과 소비에는 경제 논리가 담겨져 있다. 농촌 사람들에게는 수입과 관련된 문제고 도시 사람들에게는 가정경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논도 이제는 좀더 합리적으로 관리되어 수요와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경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소비 촉진은 한계가 빤하다. 북한 주민 지원도 뜻은 좋지만 근본 해결책은 아니다. 재배 면적 축소도 무턱대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방안을 추가하면 어떨까? 쌀 초과 생산에 해당되는 만큼 논을 떼어내 절반은 사람 놀이터로 절반은 동물 먹이터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벼는 그대로 심은 채로 말이다. 이런 농사를 짓는 농가에 대한 정부 재정지원은 뒷받침되어야 한다. 동물을 위한 먹이터 활용은 이미 실행되고 있기에 여기서 따로 더 말할 필요는 없다.

창녕 용호늪 근처에서 본 둠벙.

논을 사람들 놀이터로도 삼으면 무엇이 달라질까

이나가키 히데히로 일본 시즈오카대 대학원 교수(잡초생태학자)2009년 발표한 논문 <논의 운영과 은혜>에서 이렇게 밝혔다

·중학생들한테 농업이나 이라는 말에서 무엇이 생각나는지 물었더니 논에서 놀아보지 못한 경우는 ’ ‘채소처럼 농산물 관련 단어를 주로 떠올렸다. 이에 반하여 논에서 놀아본 친구들은 녹색’ ‘’ ‘’ ‘송사리’ ‘잠자리등 생태환경·생물 관련 단어를 많이 떠올렸다.” 

논에서 논다는 것은 논에서 살고 있는 무수히 많은 생명들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놀라움과 기쁨과 즐거움이 동반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논에서 많이 놀아본 사람일수록 논에 대한 이미지와 지식이 풍성해지고 논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커지게 마련이다. 논을 지속가능한 미래 습지로 만들고 싶다면 우리가 먼저 논과 친해져야 한다. 어른아이 구분 없이 논에 가서 논을 놀이터 삼아 자꾸 놀수록 좋다

김훤주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는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년 11월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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