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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도 몰랐던 거창 민간인학살사건의 진실

기록하는 사람 2019. 1. 2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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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사건 등’이 아니라 ‘산청·함양·거창사건’이다


지난 5월 11일자 <한겨레> 인터넷판에 아래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역사 속 오늘] 58년 전인 1960년 5월 11일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유가족, 사건 당시 면장 살해

제목대로 ‘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을 다룬 기사였다. 문제는 본문의 이 대목이었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거창군 신원면에 이어 거창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등 일대 8개 마을로 퍼져갔다.”

한겨레 인터넷판

명백히 틀린 사실이다. 이 사건은 국군 11사단이 1951년 2월 7일 산청군 금서면에서 395명을 학살하면서 시작된다. 이 군인들은 이어 함양군 유림면으로 넘어가 310명을 학살한다. 이렇게 산청과 함양에서 705명을 죽이고 난 후, 이틀 뒤인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거창군 신원면에서 719명을 죽인 것이다. 따라서 3개 군의 학살을 모두 합쳐 ‘산청·함양·거창사건’이라 불러야 하는. 애당초 하나의 같은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기자는 ‘산청군 금서면’을 ‘거창군 금서면’으로 잘못 표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학살이 일어난 시점도 산청과 함양 학살이 거창 학살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명백한 오보다.

내가 이 문제를 지적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한 친구가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부에서 쓰는 부교재 <영화로 생각하기>에도 거창사건에 대한 엉터리 서술이 있다는 댓글을 달아줬다. 그래서 찾아보니 정말 엉터리였다.

“다음으로는 1951년 육군 제11사단 9연대가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300여 명의 어린이를 비롯하여 경남 거창군 신원면 지역 양민 719명을 모아 마을 뒤 산골짜기에서 학살한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있다. (중략) 박정희 군사정부 역시 학살사건의 주민 성분조사에 참여했던 박영복 씨를 타살하고 유족들과 유족회 간부 18명을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이후 국회는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으나 보상 관련 조항이 제외되고 미비점이 많이 지적되어 정부의 대처가 아직도 미흡한 실정이다. 그밖에도 함평, 산청, 문경 등 수많은 지역에서도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다.”

방송통신대 부교재의 잘못된 서술 부분 출처 : 김태경 페이스북

한국전쟁 시기 전국 각지에서 있었던 민간인학살 사건을 서술하는 글인 듯한데, 박영보 면장을 ‘박영복’으로 오기한 것은 물론 그를 박정희 정부가 타살했다는 황당한 내용도 문제지만, 이 글 또한 거창사건을 산청·함양사건과 별개의 학살로 보고 있다는 점은 <한겨레> 기사와 다름없다.

그나마 <한겨레>는 나의 지적 이후 사실관계를 바로잡긴 했지만, 방송통신대 부교재는 여전히 잘못된 내용 그대로 쓰이고 있을 것이다.

산청·함양·거창사건은 그나마 다른 지역의 민간인학살에 비해 빠른 1996년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진상규명과 위령사업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왜 이런 잘못이 되풀이되고 있는 걸까?

첫 단추가 그렇게 끼워졌기 때문이다.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이 3월 29일 국회에서 처음으로 이 사건을 폭로하면서 거창군에서 자행된 학살만을 거론했고, 이로 인해 국회 속기록은 물론 이에 대한 언론보도 또한 ‘거창사건’으로 명명되었던 것이다.

실제 사건에 대한 첫 보도라 할 수 있는 <동아일보> 1951년 3월 30일자 기사는 제목부터 ‘거창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본문에서도 “국회는 개회와 동시에 비공개회의에 들어갔는데 탐문한 바에 따르면 비공개회의에서는 경남 거창군 주민살해사건에 관하여 신중목 의원의 진상보고가 있었다 한다”고 전하고 있다. 산청과 함양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의 국회 조사활동이나 언론보도도 모두 거창사건에만 집중되어 있다.

한인섭 <거창양민학살사건 자료집> 중에서 동아일보 보도 영인.

그런데 <국제신보> 4월 2일자에 김종원 계엄민사부장(대령)의 기자회견을 전하는 기사가 실리는데, 여기에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금반(今般) 거창, 산청지역에서 전투부대가 약간의 주민에 민폐를 끼치고 풍기를 확립치 못한 탓으로 발생된 이 건에 관하여서는 지휘관에 대하여 엄정한 책임추궁을 할 것이며 대한민국의 국군으로서 국민의 친절한 군대, 국민을 위하여 살고 국민을 위하여 죽는 대한민국 국군의 장래를 위하여 거창, 산청사건은 엄중한 처벌을 하라는…(후략)”

한인섭 <거창양민학살사건 자료집> 중에서 국제신보 보도

가해자측인 군 책임자 중 한 명인 김종원의 입에서 ‘거창, 산청사건’이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온 것이다. 같은 날짜 <부산일보>에 보도된 같은 내용의 기사에서도 명확히 ‘거창, 산청사건’이라 나오는 걸 보아 기자가 잘못 받아적었거나 김종원이 헛말을 한 것 같진 않다. 내용을 알고 있는 자의 입장에서 무심코 진실의 일부를 고백한 것으로 보인다. <산청·함양사건의 전말과 명예회복>(2004, 산청·함양사건희생자유족회)을 쓴 강희근도 ‘김종원의 발설’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의미를 부여했으나, 이후의 조사과정이나 언론보도에서 ‘산청’은 다시 사라지고 만다.

아니나 다를까 4월 23일 이승만 정부는 내무·법무·국방부에서 조사한 ‘거창사건’의 진상을 발표하는데,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 한해 얼토당토않게 축소·왜곡된 내용이었다. 즉 “대다수의 면민은 공산주의에 감염되어 이적행위를 자행하고” “공비 및 공비에 가담한 다수 면민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경찰지서는 4차례나 후퇴”했으며, “통비부락민에게 소개(疏開)를 누차 명령하였으나 통비배는 역시 불응하고 아방 군경작전의 병력배치상황 및 경비 등 탐지정보를 제공하여 공비들로 하여금 산악으로 도주 잠복케 하고 2월 6일에는 완전무장 사백여 명과 비무장 5백 명의 공비 중에 부락민이 합류하여 아방 군경에 대전하고”, 이런 식으로 완전히 희생된 주민들을 통비분자로 덮어씌운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가 내린 ‘진상’이란 “현지 신원국민학교에서 고등군법회의를 설치하여 이적행위자 전기 남자 187명을 유죄로 인정, 사형을 언도하고 이어 군법회의 수속절차에 의하여 차(此)를 현지에서 총살 집행”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산청·함양·거창에서 1424명을 학살한 사건이 거창군 신원면 1곳에서 합법적 군법회의 선고에 따라 187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 것으로 축소·왜곡·은폐된 것이다.

이렇게 사건을 은폐·축소하려던 중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대서특필된 사실을 알게 된 이승만이 4월 24일 국무회의에서 화를 내며 신성모 국방장관과 조병옥 내무장관을 사임하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뉴욕타임스>의 4월 11일자 첫 보도 역시 거창에 국한되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 한인섭이 번역한 <뉴욕타임스> 기사 내용은 이랬다.

“신원면의 초가 마을에서 주민 1400명 중 500 내지 1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4주 전 발생한 이 이야기는 지금 한국의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중략) 지난 며칠 동안 ‘신원 대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국 신문들은 사건 자체의 진상이나 국회에서의 논란에 대해 어떤 보도도 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직접 받았다.”

이처럼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기 전까지 산청·함양 학살은 철저히 은폐되어 있었다.

산청·함양 학살이 언론에 등장한 것은 1960년 5월 16일 <한국일보>가 처음이었다. ‘참(慘)! 양민 800명을 무참히 사살 / 10년 만에 드러난 또 하나의 학살 / 지리산 지구 경남 산청 함양 두 군데서 / 거창사건 앞서 3일과 5일 전 / 노유·부녀자 가리지 않고 / 6개 촌락서, 역시 당시 11사단’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첫 문장만 옮기면 이렇다.

“거창사건이 감행되기 바로 3일과 5일 전인 지난 51년 2월 5일, 7일 두 차례에 걸쳐 경남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에서도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약 800명의 양민이 집단 학살당한 사실이 이제야 알려졌다.”

사건 발생일은 7일 하루로, 800명은 705명으로 바로잡아야 하지만, 비교적 구체적으로 산청·함양 학살을 전하고 있는 기사였다. 다음날인 17일에는 <동아일보>와 <부산일보>도 산청·함양 학살을 보도했고, 일부 외신도 <한국일보> 기사를 전하는 방식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산청·함양 학살은 다시 언론보도에서 사라지고 만다. 아마도 비슷한 시기(5월 11일)에 발생한 거창 유족들에 의한 박영보 면장 타살사건의 충격이 워낙 컸던 데다 문경, 함평, 대구, 동래, 금창(김해·창원), 마산, 통영 등 전국 곳곳에서 잇달아 유족회가 발족하고 진상규명 요구가 터져 나오다 보니 산청·함양은 충분히 재조명받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상황에서 이듬해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전국의 모든 민간인학살 유족회가 강제해산되고 간부들이 구속되면서 또다시 강요된 침묵의 시대로 되돌아갔다.

이후 <중앙일보>가 1971년 ‘민족의 증언’이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12회에 걸쳐 거창사건을 다뤘지만, 역시 거창 학살에만 국한됐고, <동아일보>의 1974년 ‘비화 제1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일보>의 1982년 ‘비화 임시수도천일’도 역시 그랬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사회 전반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다시 많은 매체들이 거창사건를 다시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대가 바뀐 젊은 기자들은 1960년 5월 산청·함양 학살을 다룬 <한국일보>와 <동아일보> 기사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거의 모든 기사는 산청·함양을 뺀 거창에만 집중했다.

1988년에는 전국 23개 대학의 학생대표들과 학보사 기자들이 거창 신원면을 찾아 합동묘소에 참배하고 각 대학신문에 거창 학살을 보도하면서 대학생들에게도 37년 전의 참상이 알려졌지만, 산청·함양은 역시 제외됐다.

이런 가운데 다행스럽게도 한 성실한 기자가 있었다. 월간 <말> 정희상 기자였다. 그는 1989년 전국의 민간인학살 사건을 추적해 보도했고, 1990년 6월 그 결과를 책으로 묶어냈다.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돌베개)라는 ‘6·25전후 민간인 학살사건 발굴르뽀’였다. 이 책에서 정 기사는 ‘산청·함양·거창양민학살사건’이라고 명명했고, 실제 세 지역의 학살이 하나의 사건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노민영 차석규의 책

그러나 앞서 출간된 <거창양민학살>(노민영·강희정, 1988, 온누리)과 <남부군과 거창사건>(차석규, 1988, 창작예술사)에는 1951년 2월 7일 산청과 함양의 학살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2월 9일과 10일, 11일에 일어난 거창 학살만 집중조명하고 있다. 그래서 정희상 기자의 취재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그는 이런 공로로 2016년 제6회 진실의힘 인권상을 받았다.)

정 기자는 1993년 <시사저널>로 옮겨 다시 ‘산청·함양 양민도 705명 학살’이라는 기사를 통해 다시 한 번 산청·함양·거창 학살이 하나의 사건임을 강조한다. 이런 그의 노력 덕분인지 1996년 1월 출간된 김상웅의 <해방후 양민학살사>에도 ‘산청 함양 양민학살’이 ‘거창 양민학살’ 바로 앞 순서에 배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5년 12월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은 산청·함양을 뺀 ‘거창사건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될 뻔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민자당 의원들이 하나의 동일 사건임을 잘 몰랐던 것이다. 거창 지역구 출신 국회의원 이강두가 발의한 법에는 당초 ‘거창’만 있었다. 유족회가 이를 항의하자 산청·함양 지역구 국회의원 노인환은 “거창사건 명예회복법을 먼저 통과시키고 산청·함양은 그 다음에 올리면 됩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합천 지역구 국회의원 권해옥이 ‘거창사건’ 뒤에 ‘등’을 붙여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으로 수정하자고 제안, 가까스로 산청·함안 희생자들도 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 있는 가해자 부조.

덕분에 거창사건추모공원과 더불어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도 조성되고 해마다 위령사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첫머리에 든 사례처럼 여전히 산청·함양사건은 거창사건보다 덜 알려져 있고, 동일 사건이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물론 그것이 언론 탓만은 아닐 것이다. 강희근도 앞서 인용한 책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자료읽기에 들어가면서는 우리 산청·함양유족회가 거창유족회에 많이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시 거창 국회의원 신중목 선생의 죽음을 무릅쓴 증언, 그 이후 거창 유족들의 합심 단결과 간단없는 투쟁, 휴식이 없는 명예회복의 열망과 그 실현을 위한 모색 등에서 선발주자로서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말처럼 거창 유족들의 적극적인 투쟁과 요구로 거창사건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미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지금에도 일부 게으른 기자들에 의해 역사가 왜곡되어 기록되는 일이 더 이상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아울러 특별법의 이름에서도 ‘등’을 빼고 ‘산청 함양 거창사건’으로 고쳤으면 한다.

참, 끝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양민학살’이 아니라 ‘민간인학살’이다. ‘양민’이 아니라면 법절차 없이 국민을 죽여도 되는 건 아니니까.

김주완 | 경남도민일보 이사·전 편집국장

※경남작가회의 기관지 <경남작가> 2018년 하반기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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