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가식과 위세가 없으면 왜 심신이 편해질까?

김훤주 2017. 7. 30.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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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삼랑진읍 삼랑리 상부마을에 갔더니 후조창 유지 비석군이 있었다. 옛적 고을 수령 선정을 기리는 이른바 선정비들이다. 삼강사비 있는 오우정으로 올라가는 언덕배기 꺾어지는 길목이다

후조창은 1765년 여기에 설치되었던 조창인 삼랑창을 일컫는 말이다. 조창(漕倉)은 지역에서 조세로 곡식·면포·특산물을 걷어모아 쌓아두는 창고를 말한다. 경남에는 사천 가산창과 마산 마산창(또는 석두창, 1760년 설치)과 더불어 삼랑진 삼랑창 셋이 있었다

가산창은 임금이 있는 서울에서 볼 때 오른쪽에 있기 때문에 우()조창, 마산창은 그 왼쪽에 있어서 좌()조창, 삼랑창은 바다가 있는 앞쪽이 아니라 그 뒤쪽인 내륙에 있었으므로 후()조창이라 했다고 한다

오우정 아래 왼쪽 삼강사비각과 오른쪽 오우선생 약전비.

가장 안쪽에 바위가 하나 있다. 거기에는 崇梅臺(숭매대)라 적혀 있었다. 그리로부터 바깥쪽으로 8개가 나란히 줄을 지어 섰다. 가장 안쪽에 있는 녀석이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바깥쪽 셋은 가장 어려서 1872년 같은 해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가운데 세 번째 네 번째는 돌이 아니라 쇠로 만든 철비였다

왜 숭매대라 했을까? 매화를 떠받들어서? 아니면 그냥 매화나무가 높게 자라 있어서? ‘알고 보면 쓸데없는이런 생각을 잠깐 하다가 비석 머릿돌 생긴 모양새를 사진에 담았다.(받침돌은 찍을 만한 거리가 되지 못했다.) 

머릿돌을 한자로는 螭首(이수)라 하는 모양이다. ()는 용()의 일종이라 한다. 그러니 이수는 우리말로 용머리가 되는 셈이다. 여기 그려진 것은 그러니까 원래대로 하자면 용이라 여기고 새긴 조각쯤 되겠다

비석 머릿돌(이수)에 새긴 용 모양이 처음에는 아주 사실적이었지만(1500년 전 660년대 통일신라 초기 태종무열왕릉비 이수처럼) 지금 선정비로 남아 있는 조선 후기 즈음에서는 이런 어린아이 추상화 실력으로 남았다

해당 고을이나 마을 또는 특정 집단 공동체가 보유하고 있었을 빤한 실력으로 세우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금품은 해당 공동체 사람들 고만고만한 주머니에서 추렴을 했을 테니 대단한 수준이 되기는 어려웠겠다.  

그러다보니 먼 데 거창 화강석 함양 마천석 같은 좋은 돌을 가져오기도 어려웠겠고 큰 고을 솜씨 빼어난 석수장이 또한 부를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이것 만든 동네 석수장이는 어쩌면 머릿돌 이수에 새기는 것이 용머리라는 것을 몰랐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이런 품새가 나는 더 좋다. 가식과 위세가 없기 때문이겠다. 보고 있어도 심신이 불편해지지 않고 편안한 그대로가 유지되기 때문이겠다. 나는 세상에도 가식과 위세가 없으면 좋겠고 나 자신에게도 그런 따위 꾸밈이나 우쭐거림이 없으면 좋겠다

문화재청 페이지에 들어갔더니 개별 선정비마다 나름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허술한 데를 채우고 필요한 데를 더하여 간단하게 기록을 남긴다

여기서 성씨 뒤에 쓰여 있는 후()나 공()은 요즘으로 치면 씨()에 해당된다. 지금 말로 옮길 때는 생략하면 된다. 이를 모르면 특히 이름이 외자일 때 후나 공을 이름 첫 글자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보기로 창녕 석빙고비를 들 수 있다. 첫 줄이 縣監申侯曙等內營建(현감신후서등내영건)인데 여기서 縣監申侯曙는 '현감 신후서'가 아닌 '현감 신서'라 읽어야 맞다等內營建은 '재임 중에 지었다'는 뜻이라 한다.

부사 김후 인대 유애비(府使金侯仁大遺愛碑

1765년 당시 밀양부사 김인대가 삼랑창을 조성하느라 애를 썼다고 하여 이듬해인 1766 주민들이 만든 비석이다

부사 홍후 이간 영세불망비(府使洪侯履簡永世不忘碑

밀양부사 홍이간이 자기 월급을 헐어 뱃사람들한테 혜택을 주었던 사실을 기리려고 선주(船主)들이 1812년 세웠다

관찰사 조상국 인영 조폐리정 영세불망비(觀察使趙相國寅永漕弊釐正永世不忘碑

상국(相國)은 정승급 벼슬아치에 붙이는 존칭이라 한다. 관찰사를 정승급으로 높인 셈이다. 조폐리정은 조창()의 폐단()을 정리()하여 바로잡았다()는 뜻이라 한다

1843년 만들어진 철비인데 조인영이 재임 중에 후조창 관련 규정을 만들어 여러 폐단을 없앴고 조선(漕船)도 규정대로 만들어 세곡 싣는 데 여유가 생겼다는 시문이 적혀 있다

도차사원 행도호부사 조공 운표 영세불망비(都差使員 行都護府使 趙公 雲杓 永世不忘碑

도차사원은 여러 고을에서 조창으로 세곡을 옮겨오고 다시 이것들을 서울로 실어나르는 전체 책임을 맡은 우두머리 관리를 이른다. 삼랑창 도차사원은 밀양부사였고 그 아래 차사원은 제포만호였다. 제포만호는 지금으로 치면 진해(=제포) 주둔 해군부대 대장쯤 된다

1839년 조운표 밀양부사가 자기 월급을 털어 어려운 주민들을 보살펴 주었다고 하여 선청(船廳)에서 세운 철비다. 요즘은 석재를 귀하게 치지만 쇠를 녹이고 거푸집을 만드는 등 쇠를 다루는 기술이 요즘 같지 않았던 옛날에는 철재가 더 귀한 존재였다고 한다

부사 이후 정재 선정비(府使李侯定在善政碑

머릿돌이 없는 조그맣고 소박한 빗돌이다. 1857년 이정배 밀양부사의 선정을 기리려고 삼랑리 주민들이 세웠다

순찰사 김공 세호 영세불망비(巡察使金公世鎬永世不忘碑

1872년 관찰사 김세호를 기리기 위해 삼랑리 주민들이 세운 빗돌이다. 50년 전 그 할아버지가 밀양부사로 와서 선정을 베풀었고 이번에는 손자 김세호가 관찰사로 와서 석두세(石頭稅=석두창 관련 운반 수당(?)으로 짐작) 2전을 복구하는 등으로 삼랑진에 은덕을 베풀었다고 한다

부사 이후 철연 영세불망비(府使李侯喆淵永世不忘碑

1872년 밀양부사 이철연을 위하여 삼랑리 주민들이 세웠다. 소금세(鹽稅)의 폐단을 감영에 보고하여 주민 요구에 맞도록 하였고 마을이 불에 탔을 때는 관아 비용을 내어놓아 집을 새로 지을 수 있게 했다고 한다

부사 이후 철연 영세불망비(府使李侯喆淵永世不忘碑

1872년 같은 부사 이철연을 위하여 선주(船主)들이 세웠다. 이철연을 위한 선정비가 같은 시기 한 곳에서 둘이 세워진 셈이다. 자기 월급을 헐어서 후조창 운영 잡비를 충당함으로써 그와 관련된 폐단을 줄여주었다는 내용이다

머릿돌이 없는 이정재 부사 선정비를 빼고 나머지는 내용이 알뜰하게 남아 있는 편이다. 내가 알기로 전국에 있는 선정비 무리 가운데 이런 정도로 내실이 있는 경우는 썩 드물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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