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전라도 강진 백련사에서

김훤주 2017. 2. 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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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동백이 좋은 것은 꽃 때문이 아니었다. 동백이 좋은 것은 푸른 잎사귀 때문이었다. 울퉁불퉁한 줄기 때문이었고 햇살 때문이었다. 동백 나무 줄기는 사람의 잘 단련된 근육 같았다. 햇살은 잎사귀에 부딪히면 눈이 부실 정도였고 줄기나 잎들 사이로 잘게 부서지면 더없이 하얀색이었다. 이번에 전남 강진 백련사 동백숲에 들어가 보고 나는 알았다. 

꽃은 동백에게서 오히려 서글픈 존재였다. 어쩌면 생존 본능에 따라 열매나 맺으려고 솟아나온 몸부림만 같았다. 꽃몽오리는 무성한 잎사귀를 뚫고 달려 있었다. 잎사귀 사이로 삐죽 나온 모양이 마른 뻔데기 같았다. 

예전에는 왜 미처 몰랐을까 싶었다. 아마도 차갑고 황량한 겨울 이미지와 붉디 붉은 꽃의 이미지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꽃은 예쁘다, 꽃은 절정이다, 등등 선입견을 제대로 곱씹어보지 못한 때문이었을 것 같기도 하고. 

백련사 동백숲에 들어서니 무척 서늘했다. 그 서늘함은 벌거벗은 것 같은 무장해제였다. 무장해제는 원시의 블랙홀로 빨려들어갈 때와 같은 무기력증으로 머리를 아뜩하게 만들었다. 백련사 동백숲은 꽤 너른 편이었다. 이리저리 충분히 거닐 수 있었다. 

풀빛

그러다 풀밭이 환히 빛나는 자리를 만났다. 스님들 먼저 와서 살다가 스러져가며 남긴 부도가 몇몇 있었다. 풀은 마른 풀이었다. 마른 풀은 내리쬐는 햇살 덕분에 빛나고 있었다. 푸르게 물결칠 때보다도 빛은 더 빛나고 있었다. 

바람에 쓸리는데도 바람에 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마른 풀잎이 되쏘는 반짝거림이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반대쪽 그림자가 참으로 짙어서 풀빛이 더욱 환했는지도 모르겠다. 

배롱나무

동백이 아닌 나무들은 잎사귀를 죄다 떨어뜨린 상태였다. 경내에 있는 느티나무도 그러했고 배롱나무도 그러했다. 떨어뜨린 것은 잎사귀만이 아니었다. 당연하게 꽃도 꽃잎도 자취가 사라지고 없었다. 절간 건물 앞 모든 나무들이 그러했다.

이 풍경의 주인은 나무 아래 댓돌이다.

다실(茶室)에 들어가 양지바른 데에 자리를 잡았다. 주인은 없었고 나는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차창 밖으로는 느티나무도 보였고 배롱나무도 보였다. 모두다 벌거벗은 상태였다. 

봄 되고 여름 오면 저 녀석들 모습이 달라지겠지. 지금 겨울은 저렇게 줄기와 가지만 남았지만 때가 되면 부풀어올라 풍만함을 내보이겠지. 물론 그조차 보이고 싶어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하니까 그러한 것이겠지. 

여름 어느날 오후면 지금은 저기 저 단단한 줄기로만 남은 배롱나무지만 그 때는 한껏 물렁해져 잎사귀를 피운 데 더해 붉은 꽃들을 백일도 넘게 매달고 있겠지. 다실의 유리창을 붉은 꽃과 그 사이 잎사귀만으로 가득 채우고도 남겠지. 

얼마 안 되어 보살이 돌아왔다. 점심 공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발효차를 주문해 마셨다. 처음엔 좀 텁텁하였지만 곧바로 상큼하면서도 구수한 느낌을 주었다. 앉은 채로 팔을 뻗으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벌거벗은 배롱나무가 있었다. 꽃 피고 잎 무성할 때보다 더 멋져 보였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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