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문화재가 모여 있는 만옥정공원
경남 창녕을 찾아 우포늪 또는 우포늪생태체험장에서 한 나절을 보낸다면 나머지 한 나절은 창녕읍내 만옥정공원에서 보내도 나쁘지 않습니다. 만옥정은 비록 조그만 공간이지만 거기 모여 있는 문화유산들까지 작은 것은 아니거든요. 7월 17~18일 창녕 블로거 팸투어를 하면서 만옥정 일대를 찾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각이 재미있는 창녕 선정비들
만옥정에서 가장 재미있는 문화재는 역대 고을 수령들의 선정비들입니다. 선정비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착한 다스림을 했다는 뜻을 새긴 빗돌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선정비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들인데요 거기 이수(머리돌)에 새겨진 용과 꽃의 문양이나 귀부(받침돌)에 남은 거북의 표정이 자유롭고 다채로워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한 것입니다.
선정비들을 살펴보는 블로거들.
17세기 중반 이후 조선 후기 사회는 전반적으로 경제력이 늘어나고 기성 질서와 통제는 느슨해지는 시기라고들 하더군요. 거듭되는 환란(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병자호란)으로 지배집단(=양반계급)은 위신이 추락한 반면 일반 백성들은 모내기와 이모작 등으로 처지가 나아지면서 생긴 현상이지 싶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선정비 빗돌에까지 무늬나 표정으로 새겨져 남았지 않나 싶은 것이, 조금만 살펴봐도 어떤 격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투박하지만 자유자재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머릿돌에 연꽃은 연꽃답지 않으면서도 연꽃이라 우깁니다.
또 용이랍시고 새겨넣은 조각은 어쩌면 뱀이랑 더 닮았습니다(가운데 사진). 머리가 닭 모양인 용은 계룡(鷄龍)이라고 이름이라도 들어봤지만 오리처럼 부리가 넙적한 용은 여기서 처음입니다(왼쪽). 또 어떤 용은 눈이 퉁방울 같아서 무슨 도롱뇽처럼 여겨집니다.(오른쪽) 무슨 이상적인 강산을 새긴 것 같기는 한데 그냥 둥글넙적한 반원형인 것도 있습니다.
거북 모양 받침돌은 이빨과 입 모양으로 더욱 파격을 해 놓았습니다. 그냥 좋아서 웃는 웃음도, 살짝 비웃는 웃음도, 의뭉스럽게 웃지 않는 듯한 웃음도 있습니다. 여기에 거북 눈알의 크기와 방향까지 제각각 달리 더해지니 더욱 다채로워집니다.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냥 한 번 웃자고 하는 노릇이야', 이것들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조각 문양을 즐기며 거닐다 고개를 돌리니 일제강점기 군수를 기리는 선정비가 눈에 들어옵니다. 블로거들은 일제강점기 군수를 했으면 분명한 친일파라고들 입을 모읍니다. 친일파가 무슨 선정을 했겠느냐, 오히려 악행을 일삼았을 테고 그래서 백성들이 가렴주구를 조금이나마 피해 보려고 부러 선정비를 세웠을 수도 있다 등등…….
하필이면 이름이 두환이로군요. 성은 오가이지만.
이리저리 살펴보니 흥학비도 두 개 있습니다. 학교를 세우거나 교육에 힘을 쏟아 지역 학문을 번성하게 한 원님에게 주어지는, 조금은 보기 드문 비석입니다. 이와 더불어 창녕 선정비에는 쇠로 만든 철비는 없고 모두 돌로 만든 석비라는 점도 어쩌면 특징일 수 있겠습니다.
다른 지역 같으면 나름 대접받았을 석탑이지만
이렇게 거닐며 노니는데 누군가의 지켜보는 눈길이 느껴집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석탑이 하나 있는 언저리 나무그늘 아래 긴의자에 동네 할매들이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어디서 왔소?" "마산에서요." "창녕이 고향이오?" "예, 읍내 장터에서 좀 살았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묻습니다. "여기 석탑이 원래는 이대로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하, 그렇지. (몸돌 하나를 가리키며) 그거는 새로 갖다 끼운 기라." 퇴천삼층석탑입니다. 원래는 남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토천(퇴천)에 있었기에 붙은 이름입니다.
석탑 바로 옆 그늘 아래 할매들.
제가 철책 안에 들어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 살펴보면 이 또한 나름 잘 만든 석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례와 균형을 갖추고 있으며 다듬어 쓴 석재들 또한 꽤나 듬직한 크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도라면 산청 단속사지 또는 합천 월광사지에 있는 삼층석탑 정도와는 충분히 겨루고도 남음이 있지 싶습니다.
하지만 창녕에서는 크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운명입니다. 아주 잘 생긴 술정리동삼층석탑(국보)과 그보다는 못하지만 나름 가치를 인정받는 술정리서삼층석탑(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나오면서 동네 할매랑 석탑을 함께 담아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요, 어쨌거나 지금은 동네 할매랑 잘 어울리는 석탑이 되어 있습니다.
진흥왕척경비:신라 진격의 나팔소리=가야 멸망의 전주곡
흥선대원군의 척화비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UN군 창녕지구 전승기념비와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척화비에 잠깐 눈길을 돌렸다가 신라진흥왕척경비로 향합니다. 만옥정공원에서 가장 높은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진흥왕척경비는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네모지게 둘레에 테두리를 쳤습니다.
뒤편으로 화왕산이 멋진 능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문에 해독이 가능한 글짜가 많고 이를 통해 세워진 시기를 561년으로 특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이름과 당시 관직도 적혀 있어서 1500년 전 신라 사회상을 제대로 짐작하게 해 준다는 가치도 남다릅니다.
<삼국사기> 같은 옛 기록을 보면 신라가 창녕(옛 이름은 비사벌, 비자화, 비화. 우리말로는 모두 빛벌.)을 장악한 때는 555년입니다. 김해 가락국을 비롯해 대부분 가야세력이 사그라지고 오로지 경북 고령 대가야만 남아 버티는 시기였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561년 진흥왕은 핵심 장군을 비롯해 문무백관을 대거 거느리고 보란 듯이 창녕에 행차하여 척경비까지 세웠습니다. 한 해가 지난 562년에는 드디어 이사부를 앞장세워 바로 이웃 낙동강 건너편 대가야를 침략해 정복하고 맙니다.
대가야의 멸망은 낙동강에서 섬진강에 이르기까지 가야세력 모두의 최후였습니다. 561년 신라 진흥왕의 대규모 창녕 행차는 곧바로 대가야를 들이치겠다며 진격을 알리는 나팔 소리였던 셈입니다. 이 나팔 소리가 아마도 신라 왕족과 귀족에게는 희망이고 기쁨이고 즐거움이었을 것입니다.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달라지지 않는가
7월 17일 만옥정공원을 찾아 신라진흥왕척경비를 살펴보는 블로거들.
그러면 가야 사람들에게는 무엇이었을까요? 가야 지배집단에게는 무엇이었고 피지배집단에게는 무엇이었을까요? 누구에게는 희망이 누구에게는 절망이 됩니다. 누구에게는 즐거움과 기쁨이 누구에게는 고통과 괴로움이 됩니다.
하지만 어쩌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신라 왕족·귀족은 그냥 지배하는 영토와 사람이 늘었을 뿐입니다. 가야 지배세력은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신라 지배질서에 편입해 들어갔므로 별로 잃은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가야 피지배집단은 지배집단이 바뀌든 말든 이미 다 잃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지배하는 집단이 바뀌거나 했을 뿐이고 더 잃어야 하는 것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랬습니다. 당시 주권자는 백성이 아니라 오로지 지배하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신라진흥왕척경비 앞에 서면 정복과 지배 침략과 멸망 그 언저리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팩트 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팩트 그 뒤에 가려져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상상해보는 보람이 있는 신라진흥왕척경비입니다.
어쨌거나 창녕 만옥정공원은 이처럼 역사·문화유적과 더불어 한 나절 노닐기 좋은 장소입니다. 창녕 객사도 있고 곳곳에 나무그늘과 앉을 자리도 있어서 읍내장터에서 먹을거리라도 장만해 와서 풀어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에 딱 안성맞춤이라 하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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