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우포늪과 함께 둘러볼 창녕 명소(3)

김훤주 2016. 8. 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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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정으로 경남 창녕을 찾아간다면 한 나절은 우포늪 또는 우포늪생태체험장에서 보내고 다른 한 나절은 창녕지석묘와 망우정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창녕지석묘

장마면 유리에 있는 창녕지석묘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놓인 자리가 산마루라는 점이고 둘째는 일대에서는 구할 수 없는 화강암 재질이라는 점이며 셋째는 규모가 상당히 크고 잘생겼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고인돌은 산기슭에 있거나 개울 가장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해당 지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을 주로 썼습니다. 그런데 창녕지석묘는 야트막하기는 하지만 산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옛날 고인돌을 만들려면 많은 사람들이 공동 노동을 통해 덮개로 쓰일 큰 돌을 옮겨와야 했습니다. 산기슭까지만 옮기면 그나마 품이 덜 들 텐데, 창녕지석묘는 산꼭대기까지 가져와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장마면 일대는 낙동강 강물이 드는 자리여서 그런지 모두 진흙이 쌓이고 굳어져서 이루어진 퇴적암 재질입니다. 창녕지석묘가 놓여 있는 산마루도 땅바닥을 살짝 걷어보면 죄다 재질이 퇴적암 계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 있는 사람들이 조그맣게 여겨집니다.

창녕지석묘와 같은 화강암 재질은 멀리 계성면이나 영산면까지 나가야 구할 수 있습니다. 김해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이영식 교수는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 여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둘러보면 이러한 바위를 캘 만한 산지는 사방 모두 5킬로미터 이상은 떨어져 보입니다. 많은 노동력의 동원이 가능했던 권력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옛날 청동기 시대 이 무덤을 만들기 위해 먼 데서 바위를 힘들여 옮겨왔다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창녕지석묘는 가로 5m, 세로 3m, 높이 2m를 훌쩍 넘는 크고 무거운 돌덩이입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무슨 목적으로 멀리에서 화강암을 가져와 산꼭대기까지 올려놓았을까요? 

7월 17일 창녕 팸투어에 참가해 이 곳을 함께 찾은 블로거들은 이 자리에 창녕지석묘라는 고인돌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하늘에서 툭 떨어졌을 것이다, 우스개 삼아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창녕지석묘가 놓여 있는 자리는 '동그랗게 펼쳐진 분지의 중심'(앞서 소개한 이영식 교수의 표현)이어서 여기에 서면 360도를 돌아도 모두 평평한 들만 보일 뿐입니다. 가만히 거꾸로 생각을 한 번 돌려봅니다. 산마루에서 내려다보지 않고 산 아래 평지에서 올려다보는 것입니다. 

일대 평지에서는 어디서나 야트막한 산마루에 자리잡은 창녕지석묘가 올려다 보일 것입니다. 원래는 지금처럼 창녕지석묘 하나만이 아니라 고인돌이 여남은 개 있었다고 합니다.(일제강점기 신작로를 까는 데 쓴다고 여기 고인돌들을 잘게 깨뜨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짐작해 볼 수는 없는 일일까요? 일대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올려다보며 그 존재를 새겨야 했을 만큼 대단한 무덤들이었다고 말씀입니다. 비록 근거는 뚜렷하게 없지만 나름 그럴 듯한 해석이 아닌지요? 창녕지석묘의 매력은 이처럼 여러 갈래로 상상을 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을까요.  

망우정(忘憂亭)

창녕지석묘 야트막한 산마루에서 쏟아지는 햇살과 불어오는 바람을 적당히 맛본 다음에는 도천면 우강리 낙동강변 망우정으로 옮겨갑니다. 망우정은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난 자리입니다. 

망우당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전혀 벼슬을 하지 않았습니다.(34살 되던 1585년 과거에 나가 2등인가 3등인가로 합격했지만 선조가 시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합격을 취소하자 벼슬살이할 생각을 버렸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장으로 전공을 세우니까 조정에서 이런저런 벼슬을 시켰습니다. 곽재우는 전란 중에는 시키는 벼슬을 했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 11월 이후에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심지어 선조 임금은 벼슬을 주는데도 사양 또는 거절한다는 죄목으로 곽재우를 귀양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망우정 뒤편 느티나무 아래에서 낙동강을 사진에 담고 있는 블로거들.

어쩌면 곽재우는 세상 물정에 밝아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벼슬살이로 지위가 높아지면 그만큼 자기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고 제 명에 죽지 못할 위험도 더불어 높아지는 줄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반역으로 몰려 자기도 죽고 일가친척도 화를 입는 경우가 적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호남 의병장 김덕령은 1596년 전란 중인데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습니다. 나중이기는 하지만 자기와 마찬가지로 남명 조식 선생한테서 가르침을 받은 선배인 정인홍도 그랬습니다.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꼽히는 정인홍은 임진왜란에서 합천·삼가·초계를 아우르는 의병장으로 활약했었습니다. 그런데 전란이 끝난 뒤 계속 벼슬에 나가 광해군 시절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인조반정으로 세상이 뒤집히자 곧바로 처형을 당했던 것입니다. 

반면 극구 벼슬살이를 사양하고 거절한 곽재우는 비록 가난했지만 제 명에 죽을 수는 있었습니다. 곽재우는 재산에 욕심이 없었기에 가진 바를 풀어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으며 또 벼슬에도 욕심이 없었기에 이처럼 비명횡사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7월 17일 망우정을 찾은 블로거들.

망우정은 그런 곽재우가 짚신을 삼아 입에 풀칠하며 엎드려 살았던 세 칸짜리 집입니다. 망우당이 망우정에서 잊으려(忘) 했던 걱정(憂)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백성들의 걱정이었을까요? 자기자신의 걱정이었을까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본가는 물론 처가·외가의 재산까지 모두 털어 의병을 일으킨 그이 행적에 비춰보면 그이가 잊으려고 했던 것은 자기자신만의 걱정이 아니라 백성들 모두의 걱정거리였었지 싶습니다. 물론 이또한 어설픈 짐작일 따름이지만은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망우정 대청마루에 서서 내다보면 낙동강 굽이치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한편으로는 휘감고 한편으로는 내치며 힘차게 흐르는 물길입니다. 

해질 무렵이면 쏟아지는 햇살을 물결이 뒤척이며 되쏘는 장관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낙동강은 금빛 비늘로 온통 뒤덮이면서 가볍고 따뜻한 기운이 망우정 일대를 가득 매우곤 합니다. 

이런 풍경을 눈에 담고 있노라면 아무 생각 없이 머리가 텅 비워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망우정에서는 근심걱정을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그런 경지를 잠깐이나마 누릴 수도 있습니다. 

망우정 뒷담장 너머에 있는 '충익공 망우당 곽선생 유허비'와 쉬기 좋은 느티나무.

망우정 들머리 커다란 팽나무는 나무가 멋지기는 하지만 앉아 쉴 만하지는 못합니다. 대신 뒷담장 너머 느티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는 품도 그럴 듯하고 자리도 평평해 서거나 앉아서 얘기 나누기 좋습니다. 돌아나올 때는 1789년 세워진 '충익공망우당곽선생유허비'를 눈에 담아도 나쁘지 않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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