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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세상

여왕의 미래가 심히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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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악의 폭군은 연산군이다. 그는 결국 신하들에 의해 쫓겨났다. 이어 왕으로 추대된 중종은 연산군 때의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해 언론자유를 강화한다.


그는 즉위 3년 승정원과 예문관에 붓 40자루와 먹 20개를 내리면서 "이것으로 나의 모든 과실을 숨김없이 쓰라"고 했다.


또 7년에는 "사관(史官)의 직무는 국가와 관계되며, 대저 역사란 사실대로 써서 천추에 전하는 것인데, 사화(史禍·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말함)를 겪은 이후로는 모두 사필(史筆)을 경계할 뿐"이라고 탄식하며 "사필 잡은 자들은 왕의 선악과 신하의 득실을 사실대로 써서 숨기고 꺼리는 폐단이 없어야 한다"고 전교했다.


이처럼 조선은 '대간에게 비판받으면 관료생활을 못하는 것으로 그치고, 왕에게 잘못 보이면 귀양을 갔지만, 사관에게 폄하되면 후세에 영원히 전해져 역사의 심판을 받는' 사회였다. 그래서 왕도, 신하도 모두 역사를 두려워했고, 왕이라도 마음대로 실록과 사초를 볼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빛나는 <조선왕조실록>을 갖게 되었다.


중종실록 3년 부분.


그로부터 500년도 훨씬 지난 지금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나서 역사교과서를 새로 쓰라고 지시하는 일이 벌어졌고, 집필진도 비밀에 붙인 채 일이 진행되고 있다. 옛날 같으면 선비들의 상소가 줄을 잇고,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시위에 나섰을 일이다.


절대왕조였던 조선에도 그런 언로(言路)는 열려 있었다. 왕이 부당한 결정을 하면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언론3사와 선비들의 상소가 줄을 이었고, 그래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머리를 풀고 도끼를 옆에 둔 채 도끼상소(持斧上疏)까지 했다. 내 상소가 틀렸다면 도끼로 내 머리를 치라는 뜻이었다. 성균관 유생들도 연대서명한 상소를 올리고 동맹휴학을 한 뒤, 집단농성이나 단식을 했다. 그래도 임금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학교에서 짐을 싸서 나와 집으로 가버렸다.


그래도 왕은 그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만일 조선의 왕이 그들을 '불법시위' 혐의로 잡아가두거나 목을 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연산군 꼴이 나지 않았을까.


최근 읽은 소설 <혜주>에 그런 대목이 나온다. 여왕의 폭정에 대한 간관의 상소가 잇따르지만 여왕은 불윤비답(不允批答)으로 묵살한다. 유생의 도끼상소가 시작되고, 왕을 비방하는 괴벽보와 괴소문까지 나돌자 여왕은 정탐서라는 정보기관을 설치, 유언비어 유포자를 색출해 단설형에 처하고, 유생을 의금부에 가둔다. 이에 흥분한 성균관 유생 200여 명이 광화문 육조거리에 모여 집단농성에 들어간다. 이들까지 모두 잡아들이려 하자 좌의정과 영의정이 이렇게 간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하! 태조대왕 이래로 이 나라 조선은 선비를 귀히 여겨 왔사옵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유생들의 언로를 막아서는 아니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연좌농성하는 유생들을 강제로 해산시켜 잡아들인 임금은 폭군 연산군 뿐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지금 대한민국에 이런 정승은 없고, 여왕 한 사람만 보인다. 여왕의 미래가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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